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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촌유래
화북마을
"1270년 고려원종 11년경오11월에 삼별초군이 탐라를 정벌하려 할때 동제원(東濟院)에서 관군과 일전(一戰)을 하였다" 는 기록이 문헌상으로 알려진 화북경(禾北境)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며 1300년(고려 충렬왕 6년 경자년) 제주에 10현을 설치할때 제주를 동서로 구분 이도(二道)를 설치하면서 서도에 처음 별도현이 기록되었다. 이러한 기록들로 보아 적어도 600여년(余年) 이전부터 설촌되어 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601년(선조 34년) 김상헌(金尙憲) 이 기록한 남사록(南槎錄)에 별도포(別刀浦)라고 기술하고 있는 문헌을 근거할 때 1600여년까지 별도(別刀)라고 칭하여 왔으며, 최근 청풍대(淸風黛) 동쪽 개인소유 가옥을 허무는 과정에서 상설문(上楔文)이 발견되어 확인결과 1646년(인조24년)에 건축한 것으로 밝혀져 345년 전에 화북에 사람이 살았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되며 여러 정황근거로 보아 최소한 400여년 이전에서부터 사람들이 정착하여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음이 추정된다. 1653년(조선조 효종4년) 별도를 화북으로 개편하였으나 1843년 화북을 다시 중좌면 별도리로 개편하였고, 1879년부터 1907년까지 기간에는 성적호구장 (成籍戶口帳)에 공북리(拱北理)라고 쓰여진 기록들이 있으며 1908년에는 다시 화북이라고 공ㆍ사문서에 쓰여져 있어 오늘의 화북리가 되었다.
현재 화북동은 2개의 법정동(화북1동, 화북2동)과 6개의 자연마을(화북동, 중, 서마을, 거로, 황사평, 동화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1998년 주공아파트 4개 단지와 아파트 남측에 동화마을이 자리잡으면서 인구가 2만명을 넘는 거대동으로 장족의 발전을 하였으며 대학교 1, 고등학교 1, 중학교 2, 초등학교 3개소 등 문화와 교육의 도시, 제주시 동부권역의 중심도시로 지속적인 발전을 하고 있다.
거로와 부록마을
부록은 속칭 "부루기" 라고 불리어 지는데 이는 처음 이지경에 큰사찰이 있어 "불전이 있는 마을" 이란 뜻으로 불전을 의미할 때 사용 불우(佛宇)란 말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여진다. 1702년의 탐라순력도에는 마을명칭을 부로(夫老)로 표기되어 있으며 1864년 거로마을의 양지학반수가 제작한 제주양씨세보에 고조부 묘의 위치를 부록사동산(富祿寺童山)으로 기록되어 있어 오늘의 부록마을로 표기되었다. 거로마을은 탐라순력도 28도중 제1도인 한라장촉에 거로(居老)라고 표기 되었고, 1700년대 말에 그려졌다는 고지도에는 거로촌(巨老忖)으로 표기되어있다.
설촌연대로 보아 거로보다는 부록이 먼저 사람이 살았으며 부록에 살던 사람이 점차 거로지경까지 내려와 거주하면서 부록마을 사람들이 제주성이나 화북포로 가는 도로에 사는 사람이 사는 곳이란 뜻에서 거로(居路)라 하기 시작하여 오늘이 마을명이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거로와 부록마을의 형성은 약900년전 부록지정의 맑은샘터(속칭 절샘)를 중심으로 거주하기 시작하여 샘터 부근에 사찰이 생긴후 부터 마을이 점차 확대되었으나 4ㆍ3사건때 마을이 전소되는 불행을 맞아 화북1동 및 제주시로 흩어졌다가 4ㆍ3사건이 완전히 끝난 후 인 1954년부터 대부분 복위하여 현재의 마을을 재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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