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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촌유래

삼양1동

자연환경

삼양 1동은 동쪽으로는 조천읍 신촌리, 서쪽으로 삼양 2동, 남쪽으로 도련 2동(梅村), 회천동과 각각 이웃하고 있으며, 총면적은 3.11k㎡이다.

설촌유래

서기 1300년(충렬왕 36년)에 동서도현 설치령(東西都縣 設置令)에 따라 제주시 중심지를 중심으로 동도(東道)에는 신촌, 함덕, 김녕등이 서도(西道)에는 귀일, 고내, 애월, 곽지등 14개 도현의 말단지방 행정구역(末端地方 行政區域) 단위가 설치되었다. 그때 원당봉 서북쪽 밑에 봉수취락이 형성되었다. 또한 원나라 기황후에 의하여 원당사가 외도의 수정사와 함께 세워졌으며, 원당사 건립시에는 부락민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마을 지명중에는 웃모실, 불칸터, 정새미, 곱은터, 묵은터 등으로 불리워지고, 그 곳에 토기(土器)조각 등이 발견되어 옛부터 거주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보다 확실한 설촌유래는 이조(李朝)초에 고려유민들이 유배되고 또는 은둔할 목적으로 제주도에 입도하여 살기 시작할때 이루어 졌다고 짐작된다. 서기 1561년(명종 16년) 경주김씨가 입향을 시발로 李朝명종에서 숙종대에(1561년 ~ 1700년대) 비로서 오늘과 같은 자연부락이 이루어졌다.

마을이름의 유래

마을 지형이 높이 솟아있는 산(山) 기슭에 호미모양의 해안선을 따라 이룩된 갯마을이라 하여 서흘포라 이름짓고 통칭 설개라 불리워졌다. 약 백년전 풍수지리설에 의거, 마을 동쪽 원당봉이 높이 솟아 마을에 큰 인물이 배출치 못할 뿐 아니라 가난을 면치 못하겠다는 설에 따라 지명을 바꾸기로 하였다. 당시 유지인 원봉 장봉수, 함수 박운경 두분이 협의(協議)하여 설개, 감을개, 매촌(梅村) 세 마을이 합(合)해졌다는 데서 삼(三)을 따고 천기운도(天氣運度)의 동력중구(動力中木區)인 중양(重陽)의 양(陽)자를 합(合)해서 삼양(三陽)이라 호칭 하였다

삼양2동

마을의 위치

제주시에서 동쪽으로 약 6㎞ 일주도로의 남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삼양관내의 각 기관들이 삼양2동에 있다. (총면적은 0.79㎢)

설촌유래

영조 기미년(서기 1739년)에 휘(諱) 강여성(姜汝成)씨가 (당 34세) 속칭 "처남드르"에서 사시다가 본동 2058번지에 초옥(草屋)을 건립 이주한 것이 시초이다.

마을이름의 유래

약 150년 전에 서흘포(鋤屹浦)로 잠시 호칭하다가, 감을개(甘水洞)으로 개칭하여 오던 중 세가 확장됨에 따라 지금의 일주도로변에 마을을 거석동(擧石洞), 지금의 삼양3동을 伐浪洞(버렁)으로 3개동이 병합 3양(陽) 2구(區)로 호칭되어 왔다.
1947년에 伐浪(사근여)이 삼양(陽) 3구(區)로 분리되었는데 당시 제주읍 직권으로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본 동에서는 반대하였다. 행정구역으로는 삼양2구에서 삼양2동으로 개칭되었다.

삼양3동

자연환경

삼양3동은 서쪽으로 화북1동과 동쪽으로는 삼양2동을 끼고 삼양교(三陽橋)와 「죄기빌레」간의 일주도로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둠벵이내」가 삼양2동 경계를 따라 이어지고, 「죄기빌레」에서 「버렁」선창까지 연결된 버렁길이 화북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기후는 계절풍 영향이 심한곳으로 여름에는 북동풍이 많이불고 겨울에는 북서풍이 강하다. 이로 인하여 파도로 밀려온 모래가 해안 200m 이내에 평지와 동산을 형성하였으며, 선조들은 이 모래밭과 동산을 정리하여 농경지를 만들고 집을 지어 생활의 터전으로 삼았다. 그러나 해안을 벗어나서는 토질이 척박하여 경지로는 적합하지 못함으로 상당인구가 어업에 종사하여 왔다. (면적은 0.21㎢) ※ 현재 「죄기빌레」위치에는 화북주공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있음.

설촌유래

본 동에 사람이 정착하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70여년 전 1814년경에 「버렁」(현재는 화북1동 1476번지)에 경주이씨 자(字)는 종익(宗益)이 최초 정주(定住)하였고, 그 후 김해김씨가 들어오면서 점차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마을이름의 유래

본 동은 기후의 영향으로 사철 파도가 높고 파도치는 소리가 서로의 파도를 가르는 듯하다 하여 칠벌「伐」, 물결랑「浪」을 이어 「伐浪」(속칭 "버렁"이라 하였으며, 이는 지금의 화북1동 1반과 삼양3동 4반을 「버렁」이라 하고, 중동(中洞)은 「검은여」, 동동(東洞)은 「사근여」로 불리워지고 있으나, 최초에 「버렁」에서부터 사람이 살고 마을을 이루었기 때문에 대표적으로 「버렁」(伐浪洞)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1957년에 삼양3동으로 개칭되었으며, 그 이전에는 삼양3구, 삼양2리로 불렸던 적도 있었다.

도련1동

마을명칭 유래

옛부터 도련리(道蓮里)라는 명칭은 당초 물형으로 지었다고 하는데 연화도수형(蓮花倒水形)이라 하여 도련이라 하였고 그후 인구가 증가되면서 사면이 부락이 형성되어 동으로는 회천, 남으로는 봉개, 용강, 영평, 서으로는 거로, 북으로는 화북, 삼양이 연하여 중심에 있음으로 사통오달(四通五達)로 길이 이어졌음으로 도련(道連)이라 개명하였고 도련드르라 함은 동쪽은 당(黨)카름 서평대(西坪垈) 매촌(梅村)병디, 남당지(南堂旨) 북은 상근(桑根)이 머르로서 토질이 비옥하고 오곡이 풍성함은 물론 주거지도 평온하여 인근부락 사람들이 부러워하여 드르라 불렀다.
총면적은 4.01k㎡

창설씨족

유씨(兪氏) (득선(得瑄)), 강씨 (성업장의(成業掌義)), 고씨(高氏) (원적(遠積)), 양씨 (판관(判官) 및 효자(孝子)), 백씨(白氏) (선달(先達)), 신씨 (효자(孝子)), 이씨(李氏) (별감(別監)), 김씨 (학자(學者) 달현(達鉉) 한연(漢蓮) 석종부(錫鐘父), 기타(基他) 등(等)

설촌유래

처음 설촌하신 유삼재(兪三宰)의 십오세손 득선(得瑄)(년대말상(年代末詳)) 선후손(瑄後孫), 대수추정(代數推定)(고려충렬왕 때, 1295)하면 약 7백여년전이요.
그 후 강장의(康掌議)성업(成業)은 구공회당(舊公會堂)터에 살았는데 인물이 활발하였다는데 현재 그 자손이 남군으로 이거했고,
고참판(高參判) 익보(益普)는 회방과입시(回榜科入試)삼성사에 종문이 현존하고 왕조실록에 실려있으며 가묘에 봉주하였다가 4ㆍ3사건에 재진하였고, 공이 자(字) 자겸 영종 15년 을미(1739. 12. 26생) 연세 14에 향시진사, 25세에 등과, 35세에 정삼품 통정대부 의략장군명월진만호(宜略將軍明月鎭萬戶) 공조참판 중시조 말로의 26세손이고 영곡공 득종의 12대 손이며 참판공지성(參判公知盛)이 아들이다. 향선생 변성운의 문인으로 영종 52년 병신 1776년에 의략장군 명월진만후 통정대부겸 왕위장군을 역임하였다. 순조9년 을미 1809년에는 조정에 과상(課狀)을 올리어 고양부 삼성사에 있음. 순조25년 을유 1825년에는 나이 87세 노령인데도 제주 회방노인으로서의 왕의 특명을 받고 상경하여 옥수로 친히 기부찰찰(肌膚察察)을 받았으며 그 건강한 모습을 극구 칭찬하면서 가선대부 동중구부사 호조참판의 직위와 이로 말미암아 연삼대의 직품까지 추서하였다. 이듬해에 서울을 떠나게 되자 후한 예물을 내리셨고 급마회량을 주어 편히 가도록 하였다.
고통정대부 훈련원 고종익은 부민(部民)이 환상곡(당시 1894 고종 31) 삼백석을 대납하였으며 중현은(1889 고종26) 문학 덕망이 일세추존 받았고 의사 고사훈 독립운동가로서 현재 사라봉 모충사에 1977. 1. 25 비각이 건립되었다.
양판관 제하(濟厦)는 판관으로 통치삼읍(通治三邑)한 공적이 지대하였고

濟廈
同治 二年 癸亥 癸亥武科 甲科
通政大夫 行善 工主簿 經碧紗道察訪
靑岩察제訪兼 參禮察訪 宜略將軍門將
行訓練院主簿 濟州鎭兵島節制都尉行 濟州判官
光緖 二年 丙子
通政大夫爲祈衝將軍行龍양衛副護軍行龍양衛副護軍兼 慶州鎭後 營將討浦使府尹
特拜格浦鎭水軍僉節制使道 丁酉 二月 二日生 光武 甲辰 十二月 一日 終

백선달(운봉 雲鳳)은기골이 장대하여 일대호걸로 칭하였고
양효자(梁孝子)는 각(各) 지숙(智淑) 헌종 14년 도광 28년 무신생
孝子 善事繼母平 以貧寒 山樵水漁
以供 甘旨體無全 衣手足 抵以盡
定省世鮮始公開 干官延知州 李奎遠
甚衿嘉尙成院 文而給焉
隆熙 四年 宣統 三年 康戌 五月 二日終

신효자는 위(緯)정득, 자(字)공인, 영종을미 8월 11일생

마을내 유명지 지명 유래

동동(東洞)촉대거리와 서동(西洞)사장전이 있는데 촉대는 벼슬한 자가 있을때 경축으로 세웠다고 하며 (당시 고종학) 사장(射場)은 활쏘는 연습장인데 현존하고 있음.

도련2동

자연환경

제주시에서 6km 동쪽으로오면 삼양 2동 마을이 나오는 데 여기서 1.5km 남으로 올라온 곳이 도련 2동 마을이다. 주위에는 경작지대가 많고 송림지대, 밀감농원지대가 있다. 남쪽으로는 초원목장 지대가 있고 2km 경에 봉개동과 연접하고 있으며, 북으로는 1.5km 경에 소나무로 푸른 원당봉이 아름답게 보이고 동쪽으로는 조천읍 신촌리 소재 진드르 평지와 접하고 있다. 남서쪽으로는 도련 1동과 접하고 있고 한라산이 시원스럽게 보인다. 총면적은 1.39k㎡이다.

설촌유래

제주시 도련 2동 매촌 마을은 지금부터 500여년전 서기 1450년경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전하여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최초에는 탐라양씨(耽羅梁氏)가 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고증할 자료가 없기 때문에 확실하지 않다. 풍천임씨(豊川任氏) 족보에 의하면 이조명종 때에 서기 1560년경에 풍천임씨 방순(邦順)이란 분이 제주에 유배되어 도련 2동 696번지에 은거 정착한 내용이 전해지고 있어서 이 때부터 매촌 마을이 형성되었다 볼 수 있겠다. 그후 서기 1580년 경에는 남평문씨(南平文氏)가, 1650년경에는 원주변씨(原州邊氏)가 거주하고 그 후에 탐라고씨(耽羅高氏), 경주이씨(慶州李氏), 탐라부씨(耽羅夫氏), 밀양박씨(密陽朴氏), 고부이씨(古阜李氏), 경주김씨(慶州金氏), 남양홍씨(南陽洪氏), 거창신씨(愼氏), 광산김씨(光山金氏), 신씨(申氏), 진주강씨(晉州姜氏) 그 외에 여러 성씨(姓氏) 가문이 이 마을을 지켜오고 있다.
- 마을 이름 : 설촌 당시 이 마을 주위 개역샘미에서 이 마을을 바라보니 매촌(梅村)꽃형 같이 보인다해서 매화매(梅)자에 마을촌(村) 자를 써서 매촌(梅村)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 행정구역으로서의 동변천(洞變遷) : 매촌·삼양동·도련이구·도련이리·도련이동·삼양동(병함)

지명 유래

현재 매촌(梅村)을 맨돈지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당시 부락지명이 매둔지(梅屯地)였는데 시대가 흐르면서 매촌(梅村)을 맨촌으로 불리워지는 것과 같이 매돈지가 맨돈지로 불리워지게 되어 맨돈지라 부르고 있다. 여기서 맨돈지는 부락명이 아니라 부락지경명(部落地境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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