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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쌓여진 책 더미 사이에서 발견된 미공개 원고 200매!
‘고통의 축제’ 속에서 눈물로 기록한
‘인간 최인호’의 내밀한 고백
최인호 유고집 『눈물』
“오늘 자세히 탁상을 들여다보니 최근에 흘린 두 방울의 눈물 자국이 마치 애기 발자국처럼 나란히 찍혀 있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가장자리가 별처럼 빛이 난다는 겁니다.
부끄러운 마음에 알코올 솜을 가져다 눈물 자국을 닦았습니다. 눈물로 탁상의 옻칠을 지울 만큼 저의 기도가 절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탐스러운 포도송이 모양으로 흘러내린 탁상 겉면의 눈물 자국도 제게는 너무나 과분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알코올 솜으로 닦으면 영영 눈물 자국이 없어질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알코올이 증발해 버리자 이내 눈물 자국이 다시 그대로 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본문 13쪽
2008년 암 진단을 받은 작가 최인호는 세상과 단절한 채 고독한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그는 환자가 아닌 작가로서 죽고자 했다. 육신의 아픔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이러한 그의 열정을 파괴할 수 없었다. 깊은 밤, 탁상 앞에 앉아서 그는 자신의 고통과 마주한 채 한 자 한 자 원고지를 채워 나갔다. 고독과 눈물, 그리고 사랑의 언어로.
최인호의 비밀 원고―
“사랑하는 벗에게 띄우는 ‘인간 최인호’의 마지막 고백”
스스로 ‘고통의 축제’라고 명명했던 5년이라는 기나긴 투병의 시간을 지나, 그는 홀연히 별들의 고향으로 떠났다. 문학을 넘어 우리나라 문화계 전체의 지형도를 바꾼 우리시대의 거인, 최인호. 그 불꽃같은 혼의 흔적이 포도송이 같은 하얀 눈물 자국으로 남았다. 그가 묵상하며 고통과 마주보던 방, 덩그러니 놓인 빈 탁상 위에 배어 있는 하얀 눈물 자국… 그리고 방 한 켠 쌓여진 책 더미 사이에는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쓴 그의 육필 원고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작가는 깊은 밤 홀로 깨어 어쩌면 자신의 마지막 책이 될지도 모르는, 그리고 어쩌면 자신이 세상에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될지도 모르는 원고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벗이여’로 시작되는 인간 최인호의 내밀한 고백, 『눈물』이다.
책 더미 사이에서 발견된 육필 원고가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지기까지…
‘최인호 유고집’.
일반적으로 자신이 쓴 책의 제목 앞에 ‘유고집’이라는 단어가 붙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글을 집필하는 작가는 흔치 않을 것이다. 아마 작가 최인호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축제로 승화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러하기에 그는 쓰고 또 써야만 했다. 작가이기에…
“오늘은 2013년 새해 첫날입니다. 아이들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주님, 제게 힘을 주시어 제 얼굴에 미소가 떠오를 수 있게 하소서. 주님은 5년 동안 저를 이곳까지 데리고 오셨습니다. 오묘하게. 그러니 저를 죽음의 독침 손에 허락하시진 않으실 것입니다. 제게 글을 더 쓸 수 있는 달란트를 주시어 몇 년 뒤에 제가 수십 배, 수백 배로 이자를 붙여 갚아 주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본문 261쪽
어느 날, 그는 이미 책으로 출간된 자신의 책들을 읽으며 깊은 회의에 빠진다. 병에 걸리지 않았을 때 쓴 기존의 책들이 너무나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고백한다…
“저는 주님에게만은 거짓말쟁이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진실로 인정받고 칭찬받고 잊히지 않고 싶은 분은 오직 단 한 사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그러하오니 주님. 만년필을 잡은 제 손 위에 거짓이 없게 하소서. 제 손에 성령의 입김을 부디 내리소서.”
-본문 194쪽
그리고 그는 끝없는 침묵 속에서 교정 작업에 들어간다. 그는 거의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2013년 9월 15일 최인호 베드로는 다시 입원했습니다. 그리고 9월 23일 정진석 추기경님께서는 마지막 병자성사를 집전하셨습니다. 최 베드로는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9월 23일 오후 딸 다혜가 물었습니다. “아빠 주님 오셨어?” “…아니…” 그 다음 날 다시 다혜가 물었습니다. “아빠, 주님 오셨어?” “…아니…” 다음 날, 9월 25일 같은 시간에 다혜가 물었습니다. “아빠, 주님 오셨어?” “주님이 오셨다. 이제 됐다.” 그리고 2013년 9월 25일 저녁 7시 02분, 작가 최인호는 선종하였습니다. 최 베드로가 주인공이었던 1인극 ‘고통의 축제’는 이로서 막을 내렸습니다.”
-본문 39쪽
작가가 죽고 남은 것은 그가 생전에 교정을 본 그 글이 전부였다. 작가의 말도, 목차도 없는 미완성의 원고. 출판사는 최인호의 유고집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람에게도 자신만의 운명이 있듯, 책 역시 나름의 운명이 있는 것일까. 만약 작가의 방 책 더미 사이에서 새로 쓴 원고가 우연히 발견되지 않았다면 『눈물』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독자들과 만났을 것이다. 아내 황정숙 여사가 책 더미 속에서 미공개 원고 200매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의 원고 속에서 작가는 분명히 말하고 있다. ‘나는 이 시간을 기록해야 한다’…
그러나 미완성의 원고를 한 권의 책으로 엮는 작업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편집회의… 그 가운데 작가의 원고를 읽고 감명을 받은 아트디렉터 박화영이 작업에 동참하기로 했다. 서서히 책 틀이 잡혀갔다. 박화영은 끝으로 여백의 김성봉 대표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김 대표의 사진이 이 책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김 대표가 평소 작가와 형제처럼 지내던 사이라는 것을 알고 던진 말이었다. 평생 최인호 작가의 책에 펴낸이로만 이름을 올리는 데 익숙해 있던 그로서는 무척 당황스러운 물음이었다. 자신이 친형처럼 따르던 최인호 작가와 책을 함께 내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이 역시 보이지 않는 손의 이끌림에 무장해제를 당한 것일까. 전문가의 사진에 비하면 멋지지도, 세련되지도 못했지만, 그의 손은 어느새 사진을 고르고 있었다.
작가가 벗에게 보내는 편지들, 그리고 그 사이 사이에 책의 목차를 대신하여 들어갈 짤막한 내레이션이 결정되었다. 박화영은 이 책을 만드는 기간 동안 매일같이 새벽 성당에 나가 기도하고 간구했다. 작가의 문장이, 작가의 눈물이 자신의 마음에 스며들기를, 그리하여 이 책이 작가의 혼을 온전히 담은 그릇이 되기를… 편집팀 모두의 간절한 마음을 통해서 미완성 원고는 한 권의 책으로 차츰 그 모습을 갖춰 나갔다. 그리고 추도의 글들이 하나하나씩 보태지고, 끝으로 두 손녀의 글이 담겼다.
그렇게 『눈물』은 탄생했다.
『눈물』은 작가이기에 앞서 한 인간으로서의 최인호, 그의 영적 고백이다. 병마의 고통 속에서 작가는 새로운 눈으로 삶과 죽음을, 인간의 아름다움과 곡진한 슬픔을, 그리고 그 가운데서 드러나는 신의 기적을 바라본다. 죽음과 마주한 고독한 영혼의 울림―『눈물』을 통해 독자들은 우리시대를 대표하는 거장 최인호의 깊고 내밀한 목소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죽음 앞에서는 절대고독의 단독자가 된다. 어찌 외롭지 않았으랴. 어찌 두렵지 않았으랴. 그러나 작가 최인호는 자신의 외로움과 두려움을 애써 포장하려 들거나 그로부터 도망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정직하게 절망했고, 정직하게 다시, 일어섰다.
최근에 저는 서너 차례에 걸쳐 성모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아직도 병중에 있습니다. 며칠 전,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님의 사진과 말씀들을 엮은 『그래도 사랑하라』라는 책을 읽다가 어느 한 구절에서 깊은 공감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추기경님의 고독’에 관한 고찬근(루카) 신부님의 증언이었습니다.
“2008년 5월 23일.
오늘은 좀 무거운 말씀을 꺼내셨습니다.
‘고 신부, 고독해 보았는가.’
‘나는 요즘 정말 힘든 고독을 느끼고 있네. 86년 동안 살면서 느껴 보지 못했던 그런 절대 고독이라네.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 주는데도 모두가 다 떨어져 나가는 듯하고, 하느님마저 의심되는 고독 말일세. 모든 것이 끊어져 나가고 나는 아주 깜깜한 우주 공간에 떠다니는 느낌일세. 세상 모든 것이 끊어지면 오직 하느님만이 남는다는 것을 내게 가르쳐 주시려고 그러시나 봐. 하느님 당신을 더 사랑하게 하려고 그러시는 거겠지?”
감히 말씀드리면 저 역시 ‘깊은 고독’ 속에 있습니다.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그 고독이 ‘하느님께서 과연 계신 것일까 하는 악마적 의심’마저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이 고독과 의심의 두려움은 제게 있어 이제 시작에 불과할 것입니다.
-본문 235~237쪽
“이 생명의 저녁에 나는 ‘빈 손’으로 당신 앞에 나아가겠나이다.”
-본문 251쪽
병이 깊어갈수록 오히려 작가의 정신은 더 맑고 깊어졌다. 작가 최인호는 신을 향해 ‘빈손’으로 나아가길 꿈꾸었다. 자신을 비우고 또 비움으로써 작가 최인호는 신 앞에 벌거벗은 영혼으로 선다. 벌거벗은 영혼은 날것 그대로의 삶과 죽음을 본다. 생명의 경이, 죽음의 신비, 영혼의 광채, 만남과 이별, 그리고 구원… 『눈물』은 신 앞에 선 자가 보내는 삶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며, 동시에 그에 대한 응답이다.
작가 최인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 마지막 편지를 띄우며 사랑하는 벗들과의 이별을 준비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벗이여.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억지로, 강제로 내 생명을 연장시키려
노력하지 말 것을 부탁합니다.
2013. 1. 1. 잠들려 하기 전
-본문 263쪽
동갑내기 동무 이해인 수녀, 배우 안성기, 감독 이장호, 작가 오정희, 김홍신 등 최인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내온 감동의 편지
한국 문학의 큰 별 최인호가 떠나간 뒤 그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이들의 편지가 잇달아 도착했다. 『눈물』은 최인호의 동갑내기 동무 이해인 수녀에게 부친 정다운 편지들, 평생 동안 형과 아우로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었던 배우 안성기의 추도사, 초등학교 때부터 평생을 함께해 온 죽마고우 이장호 감독의 친구를 향한 절절한 작별인사 등을 비롯하여, 김인중, 곽성민, 허영엽 신부, 시인 김형영, 정호승, 평론가 김주연, 권영민, 소설가 윤후명, 오정희, 김홍신, 그리고 하성란, 조경란, 김연수와 같은 젊은 후배 작가에 이르기까지, 작가 최인호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많은 이들이 고백하는 진솔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담았다. 특히 샘터사 고문이며 전 국회의장인 김재순 씨는 각별했던 작가와의 인연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월간지 ‘샘터’에 연재된 『가족』은 작가가 1975년 9월호부터 2009년 10월호까지 34년 6개월간 총 402회 연재하여 최장기 연재소설 기록을 세운 작품이다.
최 군과의 인연은 참으로 길고 소중했던 것 같습니다. 1970년 초, 을지로 5가에 있던 옛 샘터 사무실에서 최 군을 처음 만났으니 벌써 40년이 되었군요. 그때 나의 원고 청탁 제의를 받고 답한 최 군의 당당한 음성이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것 같습니다.
“그만 쓰라고 할 때까지 샘터가 발행되는 한, 제가 살아 있는 한 계속 쓰겠습니다.”
갓 서른의 나이에 쓰기 시작한 ‘가족’의 원고 분량이 원고지로 8,000매가 넘었으니, 그야말로 ‘가족’은 대하소설 중의 대하소설입니다. 최 군의 부모님과 형제 누이는 물론, 황정숙 여사, 다혜, 도단, 사위 성민석, 자부 조세실,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손녀 정원이와 윤정이. 이들은 ‘가족’의 주인공들이자 우리 모두의 진정한 가족이었습니다.
-본문 293~294쪽
영혼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눈물’
인간은 영혼의 아픔 없이는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눈물을 동반하지 않는 울음은 그저 슬픔일 것입니다. 그것은 고통을 나타내 보이는 몸짓이며,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해 보이는 투정이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하나의 신호일 뿐입니다. 인간이 위대한 것은 자기 자신의 영혼의 상처 때문만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도 슬퍼하고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자비심慈悲心 때문입니다.
-본문 205쪽
작가 최인호는 외롭고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 가운데서도 감상이나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았다. 『눈물』은 죽음 앞에서, 그리고 신 앞에서 진실하게 슬퍼하고 진실하게 기뻐하는 한 작가의 내면 일기라 할 수 있다. 그의 탁상 위에 배인 포도송이 같은 눈물 자국… 그것은 영혼의 아픔의 흔적이며 작가 최인호가 걸어간 인간주의 문학의 가장 진실한 증명일 것이다.
괴테의 시 문구
‘산봉우리마다 휴식이 있으리라’처럼
나는 조용한 휴식에 묻힐지언정
결코 나는 잠을 자지 않노라
-1961년 서울고 1년 재학 시절 최인호가 쓴 시 「휴식」에서, 본문 264~265쪽
최인호는 별들의 고향으로 떠났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산봉우리에 깃든 침묵’처럼 ‘조용한 휴식에 묻힐지언정’ 결코 잠들지 않을 것이다. ‘그대와 나는 그 많은 별 중에서 내가 점찍은, 또한 그대의 별이 그 많은 사람 중에서 나만을 점찍은 절대적인 만남의 존재’라고 『눈물』에서 노래한 것처럼, 최인호는 우리 내면의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이 되어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의 존재로서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이다. 닦아도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그의 눈물 자국처럼, 그가 남기고 간 깊고 향기로운 글들은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므로.
2013년 10월 17일, 손녀의 편지
할아버지께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윤정이에요.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
할아버지 생신이에요.
하늘나라에서 천사들하고 맛있는 생일 케이크를 드셨나요?
할아버지랑 같이 여행 가고 싶었는데 못 가서 아쉬워요.
하늘나라에서도 저를 기억해 주세요.
저도 항상 할아버지를 기억할게요.
할아버지, 보고 싶어요.
우리 꿈에서 만나요.
잘 자요. 좋은 꿈꿔요. 내일 봐요.
사랑해요. 할아버지!
- 손녀 윤정의 편지, 본문 347쪽
‘고통의 축제’ 속에서 눈물로 기록한
‘인간 최인호’의 내밀한 고백
최인호 유고집 『눈물』
“오늘 자세히 탁상을 들여다보니 최근에 흘린 두 방울의 눈물 자국이 마치 애기 발자국처럼 나란히 찍혀 있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가장자리가 별처럼 빛이 난다는 겁니다.
부끄러운 마음에 알코올 솜을 가져다 눈물 자국을 닦았습니다. 눈물로 탁상의 옻칠을 지울 만큼 저의 기도가 절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탐스러운 포도송이 모양으로 흘러내린 탁상 겉면의 눈물 자국도 제게는 너무나 과분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알코올 솜으로 닦으면 영영 눈물 자국이 없어질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알코올이 증발해 버리자 이내 눈물 자국이 다시 그대로 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본문 13쪽
2008년 암 진단을 받은 작가 최인호는 세상과 단절한 채 고독한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그는 환자가 아닌 작가로서 죽고자 했다. 육신의 아픔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이러한 그의 열정을 파괴할 수 없었다. 깊은 밤, 탁상 앞에 앉아서 그는 자신의 고통과 마주한 채 한 자 한 자 원고지를 채워 나갔다. 고독과 눈물, 그리고 사랑의 언어로.
최인호의 비밀 원고―
“사랑하는 벗에게 띄우는 ‘인간 최인호’의 마지막 고백”
스스로 ‘고통의 축제’라고 명명했던 5년이라는 기나긴 투병의 시간을 지나, 그는 홀연히 별들의 고향으로 떠났다. 문학을 넘어 우리나라 문화계 전체의 지형도를 바꾼 우리시대의 거인, 최인호. 그 불꽃같은 혼의 흔적이 포도송이 같은 하얀 눈물 자국으로 남았다. 그가 묵상하며 고통과 마주보던 방, 덩그러니 놓인 빈 탁상 위에 배어 있는 하얀 눈물 자국… 그리고 방 한 켠 쌓여진 책 더미 사이에는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쓴 그의 육필 원고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작가는 깊은 밤 홀로 깨어 어쩌면 자신의 마지막 책이 될지도 모르는, 그리고 어쩌면 자신이 세상에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될지도 모르는 원고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벗이여’로 시작되는 인간 최인호의 내밀한 고백, 『눈물』이다.
책 더미 사이에서 발견된 육필 원고가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지기까지…
‘최인호 유고집’.
일반적으로 자신이 쓴 책의 제목 앞에 ‘유고집’이라는 단어가 붙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글을 집필하는 작가는 흔치 않을 것이다. 아마 작가 최인호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축제로 승화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러하기에 그는 쓰고 또 써야만 했다. 작가이기에…
“오늘은 2013년 새해 첫날입니다. 아이들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주님, 제게 힘을 주시어 제 얼굴에 미소가 떠오를 수 있게 하소서. 주님은 5년 동안 저를 이곳까지 데리고 오셨습니다. 오묘하게. 그러니 저를 죽음의 독침 손에 허락하시진 않으실 것입니다. 제게 글을 더 쓸 수 있는 달란트를 주시어 몇 년 뒤에 제가 수십 배, 수백 배로 이자를 붙여 갚아 주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본문 261쪽
어느 날, 그는 이미 책으로 출간된 자신의 책들을 읽으며 깊은 회의에 빠진다. 병에 걸리지 않았을 때 쓴 기존의 책들이 너무나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고백한다…
“저는 주님에게만은 거짓말쟁이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진실로 인정받고 칭찬받고 잊히지 않고 싶은 분은 오직 단 한 사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그러하오니 주님. 만년필을 잡은 제 손 위에 거짓이 없게 하소서. 제 손에 성령의 입김을 부디 내리소서.”
-본문 194쪽
그리고 그는 끝없는 침묵 속에서 교정 작업에 들어간다. 그는 거의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2013년 9월 15일 최인호 베드로는 다시 입원했습니다. 그리고 9월 23일 정진석 추기경님께서는 마지막 병자성사를 집전하셨습니다. 최 베드로는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9월 23일 오후 딸 다혜가 물었습니다. “아빠 주님 오셨어?” “…아니…” 그 다음 날 다시 다혜가 물었습니다. “아빠, 주님 오셨어?” “…아니…” 다음 날, 9월 25일 같은 시간에 다혜가 물었습니다. “아빠, 주님 오셨어?” “주님이 오셨다. 이제 됐다.” 그리고 2013년 9월 25일 저녁 7시 02분, 작가 최인호는 선종하였습니다. 최 베드로가 주인공이었던 1인극 ‘고통의 축제’는 이로서 막을 내렸습니다.”
-본문 39쪽
작가가 죽고 남은 것은 그가 생전에 교정을 본 그 글이 전부였다. 작가의 말도, 목차도 없는 미완성의 원고. 출판사는 최인호의 유고집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람에게도 자신만의 운명이 있듯, 책 역시 나름의 운명이 있는 것일까. 만약 작가의 방 책 더미 사이에서 새로 쓴 원고가 우연히 발견되지 않았다면 『눈물』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독자들과 만났을 것이다. 아내 황정숙 여사가 책 더미 속에서 미공개 원고 200매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의 원고 속에서 작가는 분명히 말하고 있다. ‘나는 이 시간을 기록해야 한다’…
그러나 미완성의 원고를 한 권의 책으로 엮는 작업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편집회의… 그 가운데 작가의 원고를 읽고 감명을 받은 아트디렉터 박화영이 작업에 동참하기로 했다. 서서히 책 틀이 잡혀갔다. 박화영은 끝으로 여백의 김성봉 대표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김 대표의 사진이 이 책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김 대표가 평소 작가와 형제처럼 지내던 사이라는 것을 알고 던진 말이었다. 평생 최인호 작가의 책에 펴낸이로만 이름을 올리는 데 익숙해 있던 그로서는 무척 당황스러운 물음이었다. 자신이 친형처럼 따르던 최인호 작가와 책을 함께 내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이 역시 보이지 않는 손의 이끌림에 무장해제를 당한 것일까. 전문가의 사진에 비하면 멋지지도, 세련되지도 못했지만, 그의 손은 어느새 사진을 고르고 있었다.
작가가 벗에게 보내는 편지들, 그리고 그 사이 사이에 책의 목차를 대신하여 들어갈 짤막한 내레이션이 결정되었다. 박화영은 이 책을 만드는 기간 동안 매일같이 새벽 성당에 나가 기도하고 간구했다. 작가의 문장이, 작가의 눈물이 자신의 마음에 스며들기를, 그리하여 이 책이 작가의 혼을 온전히 담은 그릇이 되기를… 편집팀 모두의 간절한 마음을 통해서 미완성 원고는 한 권의 책으로 차츰 그 모습을 갖춰 나갔다. 그리고 추도의 글들이 하나하나씩 보태지고, 끝으로 두 손녀의 글이 담겼다.
그렇게 『눈물』은 탄생했다.
『눈물』은 작가이기에 앞서 한 인간으로서의 최인호, 그의 영적 고백이다. 병마의 고통 속에서 작가는 새로운 눈으로 삶과 죽음을, 인간의 아름다움과 곡진한 슬픔을, 그리고 그 가운데서 드러나는 신의 기적을 바라본다. 죽음과 마주한 고독한 영혼의 울림―『눈물』을 통해 독자들은 우리시대를 대표하는 거장 최인호의 깊고 내밀한 목소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죽음 앞에서는 절대고독의 단독자가 된다. 어찌 외롭지 않았으랴. 어찌 두렵지 않았으랴. 그러나 작가 최인호는 자신의 외로움과 두려움을 애써 포장하려 들거나 그로부터 도망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정직하게 절망했고, 정직하게 다시, 일어섰다.
최근에 저는 서너 차례에 걸쳐 성모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아직도 병중에 있습니다. 며칠 전,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님의 사진과 말씀들을 엮은 『그래도 사랑하라』라는 책을 읽다가 어느 한 구절에서 깊은 공감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추기경님의 고독’에 관한 고찬근(루카) 신부님의 증언이었습니다.
“2008년 5월 23일.
오늘은 좀 무거운 말씀을 꺼내셨습니다.
‘고 신부, 고독해 보았는가.’
‘나는 요즘 정말 힘든 고독을 느끼고 있네. 86년 동안 살면서 느껴 보지 못했던 그런 절대 고독이라네.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 주는데도 모두가 다 떨어져 나가는 듯하고, 하느님마저 의심되는 고독 말일세. 모든 것이 끊어져 나가고 나는 아주 깜깜한 우주 공간에 떠다니는 느낌일세. 세상 모든 것이 끊어지면 오직 하느님만이 남는다는 것을 내게 가르쳐 주시려고 그러시나 봐. 하느님 당신을 더 사랑하게 하려고 그러시는 거겠지?”
감히 말씀드리면 저 역시 ‘깊은 고독’ 속에 있습니다.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그 고독이 ‘하느님께서 과연 계신 것일까 하는 악마적 의심’마저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이 고독과 의심의 두려움은 제게 있어 이제 시작에 불과할 것입니다.
-본문 235~237쪽
“이 생명의 저녁에 나는 ‘빈 손’으로 당신 앞에 나아가겠나이다.”
-본문 251쪽
병이 깊어갈수록 오히려 작가의 정신은 더 맑고 깊어졌다. 작가 최인호는 신을 향해 ‘빈손’으로 나아가길 꿈꾸었다. 자신을 비우고 또 비움으로써 작가 최인호는 신 앞에 벌거벗은 영혼으로 선다. 벌거벗은 영혼은 날것 그대로의 삶과 죽음을 본다. 생명의 경이, 죽음의 신비, 영혼의 광채, 만남과 이별, 그리고 구원… 『눈물』은 신 앞에 선 자가 보내는 삶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며, 동시에 그에 대한 응답이다.
작가 최인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 마지막 편지를 띄우며 사랑하는 벗들과의 이별을 준비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벗이여.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억지로, 강제로 내 생명을 연장시키려
노력하지 말 것을 부탁합니다.
2013. 1. 1. 잠들려 하기 전
-본문 263쪽
동갑내기 동무 이해인 수녀, 배우 안성기, 감독 이장호, 작가 오정희, 김홍신 등 최인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내온 감동의 편지
한국 문학의 큰 별 최인호가 떠나간 뒤 그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이들의 편지가 잇달아 도착했다. 『눈물』은 최인호의 동갑내기 동무 이해인 수녀에게 부친 정다운 편지들, 평생 동안 형과 아우로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었던 배우 안성기의 추도사, 초등학교 때부터 평생을 함께해 온 죽마고우 이장호 감독의 친구를 향한 절절한 작별인사 등을 비롯하여, 김인중, 곽성민, 허영엽 신부, 시인 김형영, 정호승, 평론가 김주연, 권영민, 소설가 윤후명, 오정희, 김홍신, 그리고 하성란, 조경란, 김연수와 같은 젊은 후배 작가에 이르기까지, 작가 최인호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많은 이들이 고백하는 진솔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담았다. 특히 샘터사 고문이며 전 국회의장인 김재순 씨는 각별했던 작가와의 인연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월간지 ‘샘터’에 연재된 『가족』은 작가가 1975년 9월호부터 2009년 10월호까지 34년 6개월간 총 402회 연재하여 최장기 연재소설 기록을 세운 작품이다.
최 군과의 인연은 참으로 길고 소중했던 것 같습니다. 1970년 초, 을지로 5가에 있던 옛 샘터 사무실에서 최 군을 처음 만났으니 벌써 40년이 되었군요. 그때 나의 원고 청탁 제의를 받고 답한 최 군의 당당한 음성이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것 같습니다.
“그만 쓰라고 할 때까지 샘터가 발행되는 한, 제가 살아 있는 한 계속 쓰겠습니다.”
갓 서른의 나이에 쓰기 시작한 ‘가족’의 원고 분량이 원고지로 8,000매가 넘었으니, 그야말로 ‘가족’은 대하소설 중의 대하소설입니다. 최 군의 부모님과 형제 누이는 물론, 황정숙 여사, 다혜, 도단, 사위 성민석, 자부 조세실,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손녀 정원이와 윤정이. 이들은 ‘가족’의 주인공들이자 우리 모두의 진정한 가족이었습니다.
-본문 293~294쪽
영혼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눈물’
인간은 영혼의 아픔 없이는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눈물을 동반하지 않는 울음은 그저 슬픔일 것입니다. 그것은 고통을 나타내 보이는 몸짓이며,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해 보이는 투정이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하나의 신호일 뿐입니다. 인간이 위대한 것은 자기 자신의 영혼의 상처 때문만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도 슬퍼하고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자비심慈悲心 때문입니다.
-본문 205쪽
작가 최인호는 외롭고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 가운데서도 감상이나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았다. 『눈물』은 죽음 앞에서, 그리고 신 앞에서 진실하게 슬퍼하고 진실하게 기뻐하는 한 작가의 내면 일기라 할 수 있다. 그의 탁상 위에 배인 포도송이 같은 눈물 자국… 그것은 영혼의 아픔의 흔적이며 작가 최인호가 걸어간 인간주의 문학의 가장 진실한 증명일 것이다.
괴테의 시 문구
‘산봉우리마다 휴식이 있으리라’처럼
나는 조용한 휴식에 묻힐지언정
결코 나는 잠을 자지 않노라
-1961년 서울고 1년 재학 시절 최인호가 쓴 시 「휴식」에서, 본문 264~265쪽
최인호는 별들의 고향으로 떠났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산봉우리에 깃든 침묵’처럼 ‘조용한 휴식에 묻힐지언정’ 결코 잠들지 않을 것이다. ‘그대와 나는 그 많은 별 중에서 내가 점찍은, 또한 그대의 별이 그 많은 사람 중에서 나만을 점찍은 절대적인 만남의 존재’라고 『눈물』에서 노래한 것처럼, 최인호는 우리 내면의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이 되어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의 존재로서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이다. 닦아도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그의 눈물 자국처럼, 그가 남기고 간 깊고 향기로운 글들은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므로.
2013년 10월 17일, 손녀의 편지
할아버지께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윤정이에요.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
할아버지 생신이에요.
하늘나라에서 천사들하고 맛있는 생일 케이크를 드셨나요?
할아버지랑 같이 여행 가고 싶었는데 못 가서 아쉬워요.
하늘나라에서도 저를 기억해 주세요.
저도 항상 할아버지를 기억할게요.
할아버지, 보고 싶어요.
우리 꿈에서 만나요.
잘 자요. 좋은 꿈꿔요. 내일 봐요.
사랑해요. 할아버지!
- 손녀 윤정의 편지, 본문 3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