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자료
이성예찬: 마이클 린치 교수의 명강의
- 저자/역자
- 마이클 린치 지음 / 최훈 옮김
- 펴낸곳
- 진성북스
- 발행년도
- 2013
- 형태사항
- 323p.; 20cm
- 원서명
- In Praise of Reason
- ISBN
- 9788997743056
- 분류기호
- 한국십진분류법->001.3
소장정보
위치 | 등록번호 | 청구기호 / 출력 | 상태 | 반납예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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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 가능 (1) | ||||
종합자료센터 보존서고 | JG0000001664 | - |
이용 가능 (1)
- 등록번호
- JG0000001664
- 상태/반납예정일
- -
- 위치/청구기호(출력)
- 종합자료센터 보존서고
책 소개
▶<이성 예찬> 의 요약
세계적인 석학으로 꼽히는 마이클 린치의 <이성 예찬>은 현대사회의 단면을 날카롭게 꿰뚫고 있다. 고금을 넘나드는 철학자들을 불러 앉히고 나서 그는 냉철한 이성으로 들여다본다. 비판이 아니라, 말 그대로 진단하는 것이다. 진단이 끝난 뒤에 그는 동등하게 주장되는 두 개의 권리로 이성을 얘기한다.
감성은 시대와 호흡하며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지만 놓칠 수 없는 맹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변덕에서 비롯한다.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감성과 달리 이성은 변덕을 부리지 않는다. 이리저리 바쁘게 오가지 않고 조용하게 관찰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성의 원천이다. 뜨거운 논쟁거리에 대해서 한껏 목청을 높이지는 않지만 낮은 목소리로 설득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성과 감성이 정반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이성과 감성은 ‘등을 맞댄 동전’이 아니다. 감성은 걸음걸이가 좀 더 가볍고, 이성은 느리다. ‘빠름’과 ‘느림’의 차이일 뿐, 이성은 느려 보이지만, 보폭은 넓다. 세상이 빠르게 움직일 때, 놓치기 쉬운 것들을 이성은 챙긴다. 그래서 이성은 느리지만 침착하다. 그리고 깊다.
마이클 린치가 말하는 <이성 예찬>은, 이성에 대한 찬가가 아니다. 오히려 동전의 앞과 뒤를 차갑게 관찰하고, 앞과 뒤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동전이 만들어진 그 속내를 꿰뚫어 보는 ‘방법’에 대해서 얘기한다. 동등하게 주장되는 권리, 이율배반에 대해서, 동전은 서로 권리를 주장한 적이 없다. 앞이 중요하다거나 뒤가 중요하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마이클 린치는, 동전의 존재 가치에 대해서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기에 앞서, 그 둘이 공존하는 원리를 얘기한다. 그것이 바로, ‘인식론적 원칙’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서로 공존할 수밖에 없는 까닭을 제시해야 하고, 제시하기 이전에 이미 갖추어진 ‘자유로운 원칙’에 대해서 얘기한다. 서로 모순되어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명제가 아니라 동등하게 주장되는 두 개의 논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끌려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때로, 끌고 가려는 성향은 나타날 수 있지만 원천은 아니다. 서로 어떻게 소통하고 싶어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소통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할 뿐이다. 그 소통을 위해 다리를 이어주기 전 놓으려는 징검다리. 그것이 이성의 출발점이다. 부정과 긍정을 동시에 인정하면서, ‘징검다리’를 ‘다리’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누군가 감성이라는 징검다리를 놓았다면, 그 사이를 ‘온전하게 채우는’ 이성이라는 돌로, 다리를 완성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민주주의는 당연한 결과물이고, 늘 곁에서 호흡하는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현대인은 자꾸 폐쇄적으로 변해 가고, ‘우리’라는 공통분모를 잊어가는 경향이 짙다. <<이성예찬>>에서 말하는 ‘공통 화폐’의 개념은 그 점부터 짚는다. 서로 동등하게 설득하거나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토대가 아니라면 이성이라는 마차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마부가 되었든 마차가 되었든 따로 떨어져 있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마차가 없는 마부는 혼자 걸어가야 하듯, 마부 없는 마차도 혼자 굴러가야 하기 때문이다.
마이클 린치는 책의 끝에서 <이성 예찬>에 담겨 있는 모든 내용을 압축해서 이야기한다.
“경고와 희망으로 끝내려고 한다. 이성에 대한 수용으로부터 너무 하락하면 사회가 자신만의 방식을 되찾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게 경고다. 그렇기 때문에 희망이 필요하다…… 이성을 단순히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정열적으로 수용하고 그 원리를 행동으로 옮기는 사회에 살고 싶다.”
▶책과 내용 소개
감성의 변덕을 꿰뚫는 이성의 회귀 본능
현대사회의 화두는 감성이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움직이게 하는 힘이 사회 전반을 가로지르는 흐름이다. 자연스럽게 이성이 뒤로 밀리는 시대에 이성을 얘기하는 것은 자칫 폭포를 거슬러가는 ‘무모한 연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때가 되면 산란을 위해 온갖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회귀 본능. 이성은 바로 그 연어처럼 거센 물살을 가른다.
두 개의 본능, 감성과 이성
감성은 시대와 호흡하며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지만 놓칠 수 없는 맹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변덕에서 비롯한다.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감성과 달리 이성은 변덕을 부리지 않는다. 이리저리 바쁘게 오가지 않고 조용하게 관찰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성의 원천이다. 뜨거운 논쟁거리에 대해서 한껏 목청을 높이지는 않지만 낮은 목소리로 설득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성과 감성이 정반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이성과 감성은 ‘등을 맞댄 동전’이 아니다. 감성은 걸음걸이가 좀 더 가볍고, 이성은 좀 더 무거울 뿐이다. ‘빠름’과 ‘느림’의 차이일 뿐, 이성은 느려 보이지만, 보폭은 넓다. 세상이 빠르게 움직일 때, 놓치기 쉬운 것들을 이성은 챙긴다. 그래서 이성은 느리지만 침착하다. 그리고 깊다.
마이클 린치가 말하는 <<이성 예찬>>은, 이성에 대한 찬가가 아니다. 오히려 동전의 앞과 뒤를 냉철하게 관찰하고, 앞과 뒤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동전이 만들어진 그 속내를 꿰뚫어 보는 ‘방법’에 대해서 얘기한다.
동등하게 주장되는 권리, 이율배반에 대해서, 동전이 서로 권리를 주장한 적이 있는가. 앞이 중요하다거나 뒤가 중요하다고 주장한 적이 있는가. 마이클 린치의 얘기는, 동전의 존재 가치에 대해서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기에 앞서, 그 둘이 공존하는 원리에 대해서 얘기한다. 그것은 바로, ‘인식론적 원칙’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서로 공존할 수밖에 없는 까닭을 제시해야 하고, 제시하기 이전에 이미 갖추어진 ‘자유로운 원칙’에 대해서 얘기한다. 서로 모순되어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명제가 아니라 동등하게 주장되는 두 개의 논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토끼와 거북, 감성과 이성
토끼와 거북 이야기의 가장 큰 교훈은 ‘교만함과 성실함’이다. 속도와 승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겉으로 보이는 토끼와 거북의 속도와 승부를 들여다보면, 그것은 속도 이야기가 아니라 ‘뿌리’에 관련한 이야기이고, 그 뿌리를 통해 벋은 가지에 관한 이야기이고, 열매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성이라는 뿌리가 어떻게 가지를 벋고, 어떻게 열매를 맺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끌려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때로, 끌고 가려는 성향은 나타날 수 있지만 원천은 아니다. 서로 어떻게 소통하고 싶어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소통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할 뿐이다. 그 소통을 위해 다리를 이어주기 전 놓으려는 징검다리. 그것이 이성의 출발점이다.
부정과 긍정을 동시에 인정하면서, ‘징검다리’를 ‘다리’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누군가 감성이라는 징검다리를 놓았다면, 그 사이를 ‘온전하게 채우는’ 이성이라는 돌로, 다리를 완성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민주주의는 당연한 결과물이고, 늘 곁에서 호흡하는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현대인은 자꾸 폐쇄적으로 변해 가고, ‘우리’라는 공통분모를 잊어가는 경향이 짙다. <<이성예찬>>에서 말하는 ‘공통 화폐’의 개념은 그 점부터 짚는다. 서로 동등하게 설득하거나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토대가 아니라면 이성이라는 마차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마부가 되었든 마차가 되었든 따로 떨어져 있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마차가 없는 마부는 혼자 걸어가야 하듯, 마부 없는 마차도 혼자 굴러가야 하기 때문이다.
마부와 마차와 승객
마차가 되어 끌려갈 것인가, 마부가 되어 몰고 갈 것인가. 그것은 마이클 린치가 <<이성 예찬>>에서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가 어떻게 함께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질 뿐이다. 마차나 마부처럼 사회도, 사람도, ‘끌려가거나’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는 것이라는 상식에 대해서 되짚어볼 기회를 열어 주는 것이다. 소통은 상식이고, 상식은 소통이다. 이성이란, 상식에 대해서 들여다보는 열쇠구멍이라는 뜻이다.
이성은 어떻게, 어디로, 가야 한다는 고집이 아니다. 함께 가자는 청유이다. 협박이나 강요가 아니다. 그 청유에는 거절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강제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끌림과 떨림에 의해서 함께 갈 수밖에 없는 손길을 건네는 것이다. ‘빠름’이 놓친 ‘느림’의 미학에 대해서. 토끼가 놓친 거북의 미학에 대해서. 그러나 승패를 가늠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성과 감성의 ‘악수’를 위해서이다.
세계적인 석학으로 꼽히는 마이클 린치의 <이성 예찬>은 현대사회의 단면을 날카롭게 꿰뚫고 있다. 고금을 넘나드는 철학자들을 불러 앉히고 나서 그는 냉철한 이성으로 들여다본다. 비판이 아니라, 말 그대로 진단하는 것이다. 진단이 끝난 뒤에 그는 동등하게 주장되는 두 개의 권리로 이성을 얘기한다.
감성은 시대와 호흡하며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지만 놓칠 수 없는 맹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변덕에서 비롯한다.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감성과 달리 이성은 변덕을 부리지 않는다. 이리저리 바쁘게 오가지 않고 조용하게 관찰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성의 원천이다. 뜨거운 논쟁거리에 대해서 한껏 목청을 높이지는 않지만 낮은 목소리로 설득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성과 감성이 정반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이성과 감성은 ‘등을 맞댄 동전’이 아니다. 감성은 걸음걸이가 좀 더 가볍고, 이성은 느리다. ‘빠름’과 ‘느림’의 차이일 뿐, 이성은 느려 보이지만, 보폭은 넓다. 세상이 빠르게 움직일 때, 놓치기 쉬운 것들을 이성은 챙긴다. 그래서 이성은 느리지만 침착하다. 그리고 깊다.
마이클 린치가 말하는 <이성 예찬>은, 이성에 대한 찬가가 아니다. 오히려 동전의 앞과 뒤를 차갑게 관찰하고, 앞과 뒤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동전이 만들어진 그 속내를 꿰뚫어 보는 ‘방법’에 대해서 얘기한다. 동등하게 주장되는 권리, 이율배반에 대해서, 동전은 서로 권리를 주장한 적이 없다. 앞이 중요하다거나 뒤가 중요하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마이클 린치는, 동전의 존재 가치에 대해서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기에 앞서, 그 둘이 공존하는 원리를 얘기한다. 그것이 바로, ‘인식론적 원칙’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서로 공존할 수밖에 없는 까닭을 제시해야 하고, 제시하기 이전에 이미 갖추어진 ‘자유로운 원칙’에 대해서 얘기한다. 서로 모순되어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명제가 아니라 동등하게 주장되는 두 개의 논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끌려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때로, 끌고 가려는 성향은 나타날 수 있지만 원천은 아니다. 서로 어떻게 소통하고 싶어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소통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할 뿐이다. 그 소통을 위해 다리를 이어주기 전 놓으려는 징검다리. 그것이 이성의 출발점이다. 부정과 긍정을 동시에 인정하면서, ‘징검다리’를 ‘다리’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누군가 감성이라는 징검다리를 놓았다면, 그 사이를 ‘온전하게 채우는’ 이성이라는 돌로, 다리를 완성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민주주의는 당연한 결과물이고, 늘 곁에서 호흡하는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현대인은 자꾸 폐쇄적으로 변해 가고, ‘우리’라는 공통분모를 잊어가는 경향이 짙다. <<이성예찬>>에서 말하는 ‘공통 화폐’의 개념은 그 점부터 짚는다. 서로 동등하게 설득하거나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토대가 아니라면 이성이라는 마차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마부가 되었든 마차가 되었든 따로 떨어져 있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마차가 없는 마부는 혼자 걸어가야 하듯, 마부 없는 마차도 혼자 굴러가야 하기 때문이다.
마이클 린치는 책의 끝에서 <이성 예찬>에 담겨 있는 모든 내용을 압축해서 이야기한다.
“경고와 희망으로 끝내려고 한다. 이성에 대한 수용으로부터 너무 하락하면 사회가 자신만의 방식을 되찾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게 경고다. 그렇기 때문에 희망이 필요하다…… 이성을 단순히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정열적으로 수용하고 그 원리를 행동으로 옮기는 사회에 살고 싶다.”
▶책과 내용 소개
감성의 변덕을 꿰뚫는 이성의 회귀 본능
현대사회의 화두는 감성이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움직이게 하는 힘이 사회 전반을 가로지르는 흐름이다. 자연스럽게 이성이 뒤로 밀리는 시대에 이성을 얘기하는 것은 자칫 폭포를 거슬러가는 ‘무모한 연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때가 되면 산란을 위해 온갖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회귀 본능. 이성은 바로 그 연어처럼 거센 물살을 가른다.
두 개의 본능, 감성과 이성
감성은 시대와 호흡하며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지만 놓칠 수 없는 맹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변덕에서 비롯한다.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감성과 달리 이성은 변덕을 부리지 않는다. 이리저리 바쁘게 오가지 않고 조용하게 관찰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성의 원천이다. 뜨거운 논쟁거리에 대해서 한껏 목청을 높이지는 않지만 낮은 목소리로 설득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성과 감성이 정반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이성과 감성은 ‘등을 맞댄 동전’이 아니다. 감성은 걸음걸이가 좀 더 가볍고, 이성은 좀 더 무거울 뿐이다. ‘빠름’과 ‘느림’의 차이일 뿐, 이성은 느려 보이지만, 보폭은 넓다. 세상이 빠르게 움직일 때, 놓치기 쉬운 것들을 이성은 챙긴다. 그래서 이성은 느리지만 침착하다. 그리고 깊다.
마이클 린치가 말하는 <<이성 예찬>>은, 이성에 대한 찬가가 아니다. 오히려 동전의 앞과 뒤를 냉철하게 관찰하고, 앞과 뒤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동전이 만들어진 그 속내를 꿰뚫어 보는 ‘방법’에 대해서 얘기한다.
동등하게 주장되는 권리, 이율배반에 대해서, 동전이 서로 권리를 주장한 적이 있는가. 앞이 중요하다거나 뒤가 중요하다고 주장한 적이 있는가. 마이클 린치의 얘기는, 동전의 존재 가치에 대해서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기에 앞서, 그 둘이 공존하는 원리에 대해서 얘기한다. 그것은 바로, ‘인식론적 원칙’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서로 공존할 수밖에 없는 까닭을 제시해야 하고, 제시하기 이전에 이미 갖추어진 ‘자유로운 원칙’에 대해서 얘기한다. 서로 모순되어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명제가 아니라 동등하게 주장되는 두 개의 논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토끼와 거북, 감성과 이성
토끼와 거북 이야기의 가장 큰 교훈은 ‘교만함과 성실함’이다. 속도와 승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겉으로 보이는 토끼와 거북의 속도와 승부를 들여다보면, 그것은 속도 이야기가 아니라 ‘뿌리’에 관련한 이야기이고, 그 뿌리를 통해 벋은 가지에 관한 이야기이고, 열매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성이라는 뿌리가 어떻게 가지를 벋고, 어떻게 열매를 맺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끌려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때로, 끌고 가려는 성향은 나타날 수 있지만 원천은 아니다. 서로 어떻게 소통하고 싶어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소통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할 뿐이다. 그 소통을 위해 다리를 이어주기 전 놓으려는 징검다리. 그것이 이성의 출발점이다.
부정과 긍정을 동시에 인정하면서, ‘징검다리’를 ‘다리’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누군가 감성이라는 징검다리를 놓았다면, 그 사이를 ‘온전하게 채우는’ 이성이라는 돌로, 다리를 완성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민주주의는 당연한 결과물이고, 늘 곁에서 호흡하는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현대인은 자꾸 폐쇄적으로 변해 가고, ‘우리’라는 공통분모를 잊어가는 경향이 짙다. <<이성예찬>>에서 말하는 ‘공통 화폐’의 개념은 그 점부터 짚는다. 서로 동등하게 설득하거나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토대가 아니라면 이성이라는 마차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마부가 되었든 마차가 되었든 따로 떨어져 있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마차가 없는 마부는 혼자 걸어가야 하듯, 마부 없는 마차도 혼자 굴러가야 하기 때문이다.
마부와 마차와 승객
마차가 되어 끌려갈 것인가, 마부가 되어 몰고 갈 것인가. 그것은 마이클 린치가 <<이성 예찬>>에서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가 어떻게 함께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질 뿐이다. 마차나 마부처럼 사회도, 사람도, ‘끌려가거나’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는 것이라는 상식에 대해서 되짚어볼 기회를 열어 주는 것이다. 소통은 상식이고, 상식은 소통이다. 이성이란, 상식에 대해서 들여다보는 열쇠구멍이라는 뜻이다.
이성은 어떻게, 어디로, 가야 한다는 고집이 아니다. 함께 가자는 청유이다. 협박이나 강요가 아니다. 그 청유에는 거절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강제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끌림과 떨림에 의해서 함께 갈 수밖에 없는 손길을 건네는 것이다. ‘빠름’이 놓친 ‘느림’의 미학에 대해서. 토끼가 놓친 거북의 미학에 대해서. 그러나 승패를 가늠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성과 감성의 ‘악수’를 위해서이다.
목차
서문
1장 희망과 이성
회의론의 근원
이성의 공간으로서의 민주주의
2장 노예도 주인도 아니다 : 이성과 감정
놀라운 데이터
두 가지 그림
손가락 까딱하기
직관 : 척 보면 아는
이성 없다면?
3장 단지 꿈과 연기뿐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회의론
명석 판명한
회의론과 인식적 공약 불가능성
4장 이성의 종말 : 전통과 상식
이 곳에서는 원래 이렇게 한다
상식과 가정
5장 인간성의 성스러운 전통
믿음, 신념, 수용
객관성과 공통의 관점
방법 게임
질문과 대답
6장 진리와 거리의 파토스
지식의 그림
진리와 탐구
세계의 표상
진리와 인간적인 것
결론
옮긴이 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