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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류시화 제3시집

저자/역자
류시화 지음
펴낸곳
문학의숲
발행년도
2012
형태사항
146p.; 21cm
ISBN
9788993838220
소장정보
위치등록번호청구기호 / 출력상태반납예정일
이용 가능 (1)
북카페JG0000001066-
이용 가능 (1)
  • 등록번호
    JG0000001066
    상태/반납예정일
    -
    위치/청구기호(출력)
    북카페
책 소개
돌의 내부가 암흑이라고 믿는 사람은
돌을 부딪쳐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돌 속에 별이 갇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다
돌이 노래할 줄 모른다고 여기는 사람은
저물녘 강의 물살이 부르는 돌들의 노래를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 노래를 들으며 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돌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 사람이다
돌이 차갑다고 말하는 사람은
돌에서 울음을 꺼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 냉정이 한때 불이었다는 것을 잊은 사람이다
돌이 무표정하다고 무시하는 사람은
돌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안으로 소용돌이치는 파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 무표정의 모순어법을
-<돌 속의 별> 전문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1991),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1997)의 류시화 시인이 15년의 긴 침묵 후에 세 번째 시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을 펴냈다. 그동안 시 발표와는 거리를 둔 채 명상서적을 번역 소개하거나 변함없이 인도 네팔 등지를 여행하며 지내 온 시인의 신작 시집이라 더 반갑다. 사실 그는 시를 쓰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쓴 350여 편의 시 중에서 56편을 이번 시집에 묶었다. 시 <옹이> 외에는 모두 미발표작이다.
시집 출간이 늦은 이유에 대해 시인은 짧은 서문에서 말하고 있다. “시집을 묶는 것이 늦은 것도 같지만 주로 길 위에서 시를 썼기 때문에 완성되지 못한 채 마음의 갈피에서 유실된 시들이 많았다. 삶에는 시로써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이번 시집에는 긴 시간의 시적 침묵이 가져다 준 한층 깊어진 시의 세계가 있다. ‘시는 삶을 역광으로 비추는 빛’이라는 그의 말을 증명하듯, 시인의 혼이 담긴 56편의 시에는 상처와 허무를 넘어 인간 실존의 경이로움과 삶에 대한 투명한 관조가 담겨 있다. 또한 오랜 기간 미발표 상태에서 써 온 시들을 모은 것이라 시의 소재와 주제의 다양성도 이 시집의 특징이다. 그러나 그 다양한 노래 속에서도 시인은 “세상의 벼랑 중에/ 마음의 벼랑이 가장 아득하다”고 말한다.

사막에 길게 드리워진
내 그림자
등에 난 혹을 보고 나서야
내가 낙타라는 걸 알았다
눈썹 밑에 서걱이는 모래를 보고서야
사막을 건너고 있음을 알았다
옹이처럼 변한 무릎을 만져 보고서야
무릎 기도 드릴 일 많았음을 알았다
많은 날을 밤에도 눕지 못했음을 알았다
자꾸 넘어지는 다리를 보고서야
세상의 벼랑 중에
마음의 벼랑이 가장 아득하다는 걸 알았다
혹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보고서야
무거운 생을 등에 지고
흔들리며 흔들리며
사막을 건너왔음을 알았다
-<낙타의 생> 전문

삶을 신비주의적 차원에서 바라보면서 이 세계에 사는 것의 불가사의함을 독특한 감성과 섬세한 언어로 노래한 첫 번째 시집『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모두가 공감하는 보편적 정서에 도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몇 년 후 발표한 두 번째 시집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에서 시인은 일상의 언어로 신비의 세계를, 낯익음 속에 감춰진 낯설음의 세계를 막힘없이 읽히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깊이로 표현함으로써 많은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이번 시집의 해설을 쓴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이홍섭은 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빠스의 “시인은 언어에 봉사하는 자”라는 말을 인용하며 “시인은 언어에 봉사함으로써 언어의 본성을 되돌려 주고, 언어가 자신의 존재를 회복하게 해 준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다음의 시에 주목한다.

오늘 나는 달개비에 대해 쓴다
묶인 곳 없는 영혼에 대해
사물들은 저마다 시인을 통해 말하고 싶어 한다
나비가 태어나는 곳이나 생각의 틈새에서 자라는
이 마디풀에게서 배울 점은 다름 아닌
신비에 무릎 꿇을 필요
신비에 고개 숙일 필요
-<달개비가 별의 귀에 대고 한 말> 부분

이 시에 따르면, 시인은 자신의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물들이 시인을 통해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을 받아쓰는 자이다. 이 작품에서 ‘달개비’가 상징하는 것은 자연과 생명의 신비로움이다. “사물들은 저마다 시인을 통해 말하고 싶어 한다”라는 구절은, 시인이란 존재가 훼손되지 않은 사물의 원초적 본질과 물성을 언어로 표현하는 자임을 드러낸다.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세상의 말들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상상은 그래서 가능하다.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세상의 말들이 달라졌으리라
봄은 떠난 자들의 환생으로 자리바꿈하고
제비꽃은 자주색이 의미하는 모든 것으로
하루는 영원의 동의어로

(중략)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세상의 단어들이 바뀌었으리라
눈동자는 별을 잡는 그물로
상처는 세월이 지나서야 열어 보게 되는 선물로
목련의 잎은 꽃의 소멸로
죽음은 먼 공간을 건너와 내미는 손으로
오늘 밤의 주제는 사랑으로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부분

이 시대로라면, 아마도 시인이 만드는 사전은 감각과 정서와 통찰이 하나가 되어 사물과 현상을 관통하는 언어들로 가득할 것이다. 시인이 한 편의 시를 직조해 내면서 얼마만큼 섬세하게 언어에 귀 기울이는지는 이번 시집에 실린 많은 시들에서 잘 느낄 수 있다. 이홍섭은 말한다.
“사물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본 사람은 언어를 깊이 포옹할 줄 안다. 무릎을 꿇고 이들의 이야기에 먼저 귀 기울여 본 적이 없으면서, 언어와 포옹부터 하는 시인은 사이비일 확률이 높다. 류시화 시인이 일군의 대중적 시인들과 구별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그의 시는 먼저 사물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어둠 속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받아 적어 가면서 마침내 깊은 포옹에 이른다.”
한 해의 다섯 달 정도를 길 위에서 여행자로 살아가는 시인은 한 좌담에서 “시를 거의 종이에 쓰지 않는다. 모두 입 속에서 중얼거리며 외워서 쓰니까 시간이 오래 걸리고……. 여러 시들이 내 안에서 자기를 완성해 달라고 다가온다. 어떤 시는 거의 1년에 걸쳐서 한 줄씩 덧붙여 입 속에서 완성한 경우도 있다.”라고 말했다. 여행의 노정 위에서 수없이 반복된 중얼거림으로 완성한 시편들에는 그만의 독특한 리듬과 언어적 감성이 스며들어 있다.

이제 말하련다, 보리여
처마에서 떨어지는 눈 녹은 물처럼
나는 견자가 되지 못하고 고백자가 되었다
생의 흔들림을 시에 맡기고
고작 별똥별이나 반딧불이 정도의 사상밖에 노래하지 못하면서
고산 지방의 나귀와 벗하거나
노천의 빛에 길가 꽃처럼 빈혈이 번졌다
나의 전생이 티베트의 야크였다고 한 라마승이 옳았을까
그래서 낮은 세상에서는 습관처럼
머리가 뜨거울까
그러나 내 안의 어둠을 바람이라 명명한 그는 혹시 그 바람의
냄새를 맡았던 것일까
-<보리> 부분

이문재 시인은 이번 시집의 시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류시화의 시는 ‘감응의 시’다. 그의 감응은 시의 대상을 끌어안으면서 공감과 연대의 차원으로 확장된다. 이 과정에서 ‘큰 순환에 자신을 내맡기는 기술’을 터득한다. 하지만 그 기술이 늘 따뜻한 것만은 아니다. 냉정이 깊어지는가 하면, 분노가 폭발하기도 한다. 류시화의 시는 앨런 긴즈버그와 함께 ‘거대한 세탁’을 하면서 폭력에 바탕한 산업문명을 전복시킨다. 감응과 연대가 ‘안전한 수준’에서만 이뤄진다면 삶과 문명의 전환은 불가능하다. 지금과 다른 삶, 여기와 다른 세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 뭇 생명의 아픔을 이해하는 시적 감수성을 회복한다면, 오늘의 ‘나’는 분명 어제와는 다를 것이다.”

내가 아는 그는
가슴에 멍 자국 같은 새 발자국 가득한 사람이어서
누구와 부딪혀도 저 혼자 피 흘리는 사람이어서
세상 속에 벽을 쌓은 사람이 아니라 일생을 벽에 문을 낸 사람
이어서
물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파도를 마시는 사람이어서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밥 속의 별을 먹는 사람이어서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지평선 같은 사람이어서
그 지평선에 뜬 저녁 별 같은 사람이어서
때로 풀처럼 낮게 우는 사람이어서
고독이 저 높은 벼랑 위 눈개쑥부쟁이 닮은 사람이어서
어제로 내리는 성긴 눈발 같은 사람이어서
만 개의 기쁨과 만 개의 슬픔
다 내려놓아서 가벼워진 사람이어서
가벼워져서 환해진 사람이어서
시들기 전에 떨어진 동백이어서
떨어져서 더 붉게 아름다운 사람이어서
죽어도 죽지 않는 노래 같은 사람이어서
-<내가 아는 그는> 전문

류시화 시인은 이 시집을 묶기 몇 해 전 한 문학잡지와의 좌담에서 말했다.
“내게 있어 중요한 것은 시인의 눈을 간직하는 것, 시인의 영혼을 갖고 사는 것이다. 그것이 시인으로서 명성을 얻는 것보다 중요하다. 몇 권의 시집을 펴내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주위의 사물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삶이 어떻게 흘러가는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나는 내 삶이 공기 속을 걸어가는 나뭇잎이라는 생각이 들고, 어떤 순간에도 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무엇보다 한 사람의 시인일 뿐이다.”
시인 류시화가 15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은 ‘돌’과 ‘꽃’의 대화이다. 꽃에게 손을 내미는 돌, 돌에게 말을 거는 꽃. 각 시편들은 “천 개의 슬픔을 사라지게 하는 한 개의 기쁨”이 되어 준다. ‘한 개의 슬픔’이 ‘천 개의 기쁨’을 앗아가는 외롭고 가난하고 어두운 시절, 이 시집은 시인 류시화가 돌과 꽃에 새긴 기도문과 같다. 두근거리는 시의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시인 이문재).

이 생에 있으면서도 전생에 있는 것 같았던
지난겨울에 대해 나는 아무 할 말이 없다
가끔 눈 녹아 길이 질었다는 것 외에는
젖은 흙에 거듭 발이 미끄러졌다는 것 외에는
너는 나에게 상처를 주지만 나는 너에게 꽃을 준다, 삶이여
나의 상처는 돌이지만 너의 상처는 꽃이기를, 사랑이여
삶이라는 것이 언제 정말 우리의 것이었던 적이 있는가
우리에게 얼굴을 만들어 주고
그 얼굴을 마모시키는 삶
(중략)
그리움이 다할 때까지 살지는 말자
그리움이 끝날 때까지 만나지는 말자
사람은 살아서 작별해야 한다
우리 나머지 생을 일단 접자
나중에 다시 펴는 한이 있더라도
이제는 벼랑에서 혼자 피었다
혼자 지는 꽃이다
-<이런 시를 쓴 걸 보니 누구를 그 무렵 사랑했었나 보다> 부분

그의 말대로 삶에는 시로써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각각의 시에 담긴 독특한 시적 감성과 상상력이 이상한 빛을 발하며 다가온다. 세계가 한 권의 시집이라면 시는 감정, 풍경, 기억이 담긴 상자이다. 상처와 꽃이 그 안에 있다. 한 편의 시가 우리를 강하게 껴안는 때가 그때이다.
목차

바람의 찻집에서
옹이
돌 속의 별
소면
사하촌에서 겨울을 나다
반딧불이
낙타의 생
꽃 피었던 자리 어디였나 더듬어 본다
어머니
옛 수첩에는 아직
내가 아는 그는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모란의 緣
늙은 개와의 하루
얼음 연못
시골에서의 한 달
오늘처럼 내 손이
직박구리의 죽음
완전한 사랑
첫사랑의 강
당나귀
다르질링에서 온 편지
보리
태양의 불꽃을 지나온
오월 붓꽃
봄은 꽃을 열기도 하고 꽃을 닫기도 한다
자화상
두 번째 시집에 싣지 않은 시
물돌에 대한 명상
화양연화
언 연못 모서리에 봄물 들 때쯤
얼음 나무
바르도에서 걸려 온 수신자 부담 전화
제 안에 유폐시켰던 꽃 꺼내듯이
살아 있는 것 아프다

그들은 돌아올 것이다
그는 좋은 사람이다
만약 앨런 긴즈버그와 함께 세탁을 한다면
홍차
곰의 방문
한 개의 기쁨이 천 개의 슬픔을 사라지게 한다
나는 정원에 누워 있었다
다시 찾아온 구월의 이틀
일곱 편의 하이쿠
되새 떼를 생각한다
꽃잎 하나가 날려도 봄이 줄어든다
눈송이의 육각 결정체를 만든 손이
이런 시를 쓴 걸 보니 누구를 그 무렵 사랑했었나 보다
불혹에
파문의 이유
달개비가 별의 귀에 대고 한 말
비켜선 것들에 대한 예의
독자가 계속 이어서 써야 하는 시
순록으로 기억하다
모로 돌아누우며 귓속에 담긴 별들 쏟아내다
사물들은 시인을 통해 말하고 싶어 한다_이홍섭(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