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자료
틀낭에 진실꽃 피엄수다: 제주 4·3을 그리다
- 저자/역자
- 박진우 / 이하진 글 , 이수진 그림
- 펴낸곳
- 메디치미디어
- 발행년도
- 2023
- 형태사항
- 191p.: 24cm
- ISBN
- 9791157062850
- 분류기호
- 한국십진분류법->911.072
소장정보
위치 | 등록번호 | 청구기호 / 출력 | 상태 | 반납예정일 |
---|---|---|---|---|
이용 가능 (1) | ||||
북카페 | JG0000007511 | - |
이용 가능 (1)
- 등록번호
- JG0000007511
- 상태/반납예정일
- -
- 위치/청구기호(출력)
- 북카페
책 소개
제주 4·3, 그 진실을 전하는 그래픽 다큐멘터리
비극의 현장, 폐허가 된 마을 터에서 자란 보리줄기에 진실의 그림을 그리다
‘속솜허라’(입 다물라)에 갇히지 않는다! 이제 4·3이 역사가 된다
‘틀낭’은 산딸나무를 부르는 제주 말이다. 한반도 중부 이남에 많이 자라고 특히 제주에 많다. 제주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산딸나무 열매를 많이 먹으며 자랐다. 4·3 당시 산으로 피신 간 사람들도 허기를 덜기 위해 산딸나무 열매를 먹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매달려 죽은 십자가도 산딸나무로 만들었다. 꽃받침이 지고 남은 열매는 꼭 심장 같기도 하다. ‘틀낭에 진실꽃 피엄수다’는 ‘산딸나무에 진실꽃이 피었습니다’라는 말이다. 4·3의 진실이 마침내 피게 되었다는 것을 담은 제목이다.
이 책은 오래도록 국가가 숨기고 억눌러온 폭력과 야만의 역사에 관해 이야기한다. ‘속솜허라’라는 제주 말은 ‘입 다물라’라는 말이다. 4·3에 대해 국가가 침묵을 강요하면서 제주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그 말을 썼다. 하지만 결국 어떤 사람들은 끊임없이 진실을 찾고 그 이야기들을 세상에 더 큰 목소리로 돌려주려 했다. 많은 제주사람들이 ‘속솜허라’에 갇히지 않고 4·3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틀낭에 진실꽃 피엄수다》는 그런 목소리를 그림과 글로 담았다.
“이수진의 4·3 보리미술은 지금은 사라진 4·3 희생자들을 오늘에 불러내 진실을 세우려는 작업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이제 제주의 모든 풍경이 달리 보일 것이다. 오르한 파묵의 말처럼 <모든 풍경의 아름다움은 슬픔에 있다>.”
그래픽 다큐멘터리로 살피는 4·3
2023년은 ‘제주 4·3’이 75주년이 되는 해다. 또 노무현 대통령이 4·3 당시에 자행된 국가폭력에 대해 사과한 지 2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1948년 4월 3일 첫 봉기의 순간으로부터 75년의 세월이 흐르고, 또 국가원수가 명백한 국가폭력에 대해 사과하고 20년이 지났어도 4·3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4·3은 아직 제대로 된 이름을 갖고 있지 못하다. 누구는 사건이라 하고 누구는 항쟁이라 한다. 4·3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그 희생의 성격을 무엇으로 바라보고, 그 희생과 피해에 대해 어떻게 보상할지는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다.
《틀낭에 진실꽃 피엄수다》는 4·3의 진실을 전하고, 여전히 남아있는 문제들을 살피는 책이다. 그림으로 이야기를 전하는 ‘그래픽 노블’처럼 《틀낭에 진실꽃 피엄수다》는 보리줄기를 사용해 만든 그림에 4·3의 결정적인 순간들과 비극적 운명의 사람들을 소개하는 ‘그래픽 다큐멘터리’다. 이수진 작가가 보리미술로 탄생시킨 그림들은 4·3 당시 사라져버린 사람들과 마을들의 존재를 증언하고, 희생된 이들의 영혼을 불러내 진실의 목소리로 위로한다. 이수진 작가가 소재로 사용하는 보리줄기는 4·3 때 폐허가 돼 끝내 재건되지 않은 마을들의 옛 터에서 자란 것들이다. 작가는 사라진 사람들의 혼이 그 보리줄기에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며 작품을 만들었다.
산딸나무에 진실꽃이 피었습니다: 틀낭에 진실꽃 피엄수다
《틀낭에 진실꽃 피엄수다》는 제주가 품고 있는, 반세기 이상 국가가 숨기고 억눌러온 폭력과 야만의 역사에 관해 이야기한다. 제주는 오래도록 변방의 섬으로 역사의 주 무대에서 떨어져 있었지만, 해방 후 이념 전쟁에 휘말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제주 4·3’으로 적게 잡아도 당시 제주도 전체인구 10분의 1을 넘는, 최소 3만 명에서 최대 9만 명에 이르는 제주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또한 그 와중에 살아남은 이들과 그 가족들은 수십 년 세월 동안 ‘빨갱이’ ‘폭도’ ‘반역자’라는 낙인과 연좌제 등 불명예와 부당함을 참고 견뎌야만 했다.
제주에는 ‘속솜허라’라는 말이 있다. 뭍의 표준어로 ‘입 다물라’ ‘아무 말도 하지 말라’라는 말이다. 수십 년 세월 동안 4·3의 진실을 알리고자 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행여 4·3과 같은 국가폭력이 또다시 자행될까 두려워 ‘속솜허라’ ‘속솜허라’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수십 년 동안 국가가 강요하는 침묵 속에서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결국 누군가들은 끊임없이 진실을 찾아 발굴하고 그 이야기들을 다시 세상에 더 큰 목소리로 돌려주려 했다. 많은 제주사람들이 ‘속솜허라’에 갇히지 않고 세상에 4·3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틀낭에 진실꽃 피엄수다》 역시 그런 목소리 중의 하나다.
‘틀낭’은 한반도 중부 이남에 많이 자라는 산딸나무를 부르는 제주 말이다. 제주 곳곳에 산딸나무가 많다. 제주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산딸나무 열매를 많이 먹으며 큰다. 4·3 당시 산으로 피신 간 사람들도 허기를 덜기 위해 산딸나무 열매를 먹었다. 산딸나무는 예수 그리스도가 매달려 죽은 십자가를 만든 나무이고, 또 꽃받침이 지고 남은 열매는 꼭 심장 같기도 하다. 그런 여러 가지 뜻을 살려 ‘틀낭에 진실꽃 피엄수다’라고 제목을 지었다. ‘산딸나무에 진실꽃이 피었습니다’로 곧 4·3의 진실이 마침내 피게 되었다는 기원을 담았다.
봄은 왔지만…
《틀낭에 진실꽃 피엄수다》는 제주사람들이 척박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이웃들과 이룬 공동체적 관계인 ‘궨당’을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이는 4·3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사람을 파괴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파괴하고, 마침내 궨당 공동체를 파괴하는 과정이었음을 예고한다.
1부 ‘봄은 왔지만’은 19세기 말 제국주의 열강이 세계 각지를 식민지로 삼고, 열강들끼리 때로 경쟁하고 때로 협력하며 세계를 게임판으로 만들던 과정에서 한반도의 운명이 결정되었던 것을 앞세워 이야기한다. 이는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맞이한 해방 때도 마찬가지여서, 한반도 사람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38도선을 경계로 소련과 미국이 각각 분할 통치하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제주에서 미군정은 해방자가 아니었다. 1947년 3월 1일, 삼일절 기념집회에서 미군정은 집회를 불허하고, 이에 항의하는 시위대를 강경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6명이 죽고 8명이 중상을 입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등 뒤에서 총을 맞은 것으로 판명되면서(도망가는 사람들을 조준 사격했다는 말이다) 제주사람들은 3월 10일 총파업으로 대응했다. 일손을 멈추고 감자를 쪄서 나눠먹는 평화로운 파업이었지만 미군정과 경찰은 여전히 강경하게 대응했다. 제주도는 ‘빨갱이 섬’이라는 누명을 썼고, ‘반공 투사’라 자처하는 서북청년단까지 육지에서 건너와 갈등을 키웠다.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되고 고문당하고 몇몇이 죽음에 이르렀다. 제주사람들의 억울함과 분노가 차곡차곡 쌓여갔다.
꽃 이파리가 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1948년 4월 3일, 섬 곳곳에서 싹터 자라던 민중의 분노가 마침내 제주도 전역에서 붉은 횃불로 타올랐다.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 조국의 통일독립!” 4월 3일 봉기에서 외친 구호들은 4·3의 성격을 잘 말해준다. 한편으로 4·3은 미군정과 경찰이 자행하던 국가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열망이었다. 또 한편 4·3은 곧 예정된 남한만의 5·10 단독 총선거를 앞두고 이에 항의하는, 반으로 쪼개진 나라 대신 온전한 통일국가에서 살고 싶은 제주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제2의 독립운동이었다.
4·3이 일어나자 국가는 무자비하고 끔찍한 폭력으로 대응했다. 국제연합(UN)이 금지시킨 초토화작전이 광범위하게 실행되었다. 마을이 불타고, 무장대가 아닌 사람들―특히 어린아이들과 노인들까지 가리지 않고 학살됐다. 여자들은 성폭행을 당하고 학살되거나 끌려가거나 했다. 자세히 적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일들이 태연하게 벌어졌다. 토벌대는 사람들을 파괴한 것만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를 파괴했다. 나 대신 죽을 사람을 지목하게 하는 ‘손가락 총’은 제주도를 갈가리 찢어 분열시켰다. 137개의 마을이 폐허가 됐고, 그중 많은 마을은 아직까지 폐허로 남아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 희생자의 수는 아직도 논쟁중이다. 적게는 3만, 많이는 9만 명이라 한다. 희생자의 90%가 토벌대, 국가가 자행한 폭력의 희생자들이었다. 아이라고 봐주지 않았고, 종교인이라고 넘어가지 않았다. 열여섯 명의 스님이 희생됐고, 서른다섯 곳의 절이 불태워졌다. 오래도록 제주사람들의 믿음의 장소이자 제주 불교의 상징이었던 관음사 역시 불태워지고 말았다.
가해자들은 뻔뻔하고 당당했다. 미군정의 진압 책임자 로스웰 브라운 대령은 “(4·3의)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오직 진압뿐!”이라고 공언했고, 토벌대 지휘관이었던 박진경 대령도 “제주 폭동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라면 제주도민 30만 명을 다 희생시켜도 괜찮다.”라고 말하였다. 하수인뿐만 아니라 단독정부 수립 이후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도 가차 없었다. 그는 국무회의에서 “지방 토색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라.”라고 지시했다.
국가폭력은 잔인하고 끈질겼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예비검속’이라는 명분으로 또 다시 학살이 자행됐다.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을 것 같은 사람을 미리 찾아내 조치를 취한 것인데, 사실상 빨갱이가 될 가능성이 조금만 있어도 미리 찾아내 가두고 죽이는 게 목적이었다.
학살 과정을 목격한 사람들은 평생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시달렸다. 지금은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대표적 여행지인 정방폭포나 성산포 터진목 등 제주도 곳곳에 학살과 희생의 기억이 남았다. 정방폭포의 학살을 목격한 생존자는 사람들의 손과 손을 묶은 뒤 총을 쏘아 죽이거나 죽창으로 찔러 죽인 후 아득한 폭포 아래로 떨어뜨렸다고 했다. 증언자는 그 장면을 이렇게 아프게 기억한다. “사람들이 팔랑팔랑 떨어지는 것이 꼭 꽃 이파리가 지는 것처럼 보입디다.”
까마귀도 모르는 제사
제주 말에 ‘가메기 모르는 식게’라는 말이 있다. 까마귀도 모르는 제사, 라는 말이다. 언제 죽었는지도 확실하지 않고, 심지어 뼈들이 뒤엉켜 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죽음이 너무 많았다. 맘 놓고 이들에 대한 제사를 지낼 수도 없었다. 비밀리에 기도를 올리고 비밀리에 제사를 지내야 했다. 슬픔을 가슴에 묻고 지내야 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연좌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죽은 사람들, 혹은 감옥에 갇혔다 돌아온 사람들의 가족들에게는 성공할 수 있는 사다리가 치워져버렸다. ‘속솜허라’, 입 다물라, 아무 말도 하지 마라, 라는 말만 남았다.
그래도 사람들은 역사의 진실을 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수집하고 사건의 진상을 추적하며 4·3이 우리 역사에서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높였다. 국가권력이 여전히 침묵을 강요하는데도 희생자들의 죽음의 흔적을 수습하고, 발굴된 진실들을 세상에 더 큰 목소리로 돌려줬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이던 2001년 1월, 4·3 이후 최초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 공포됐다. 그리고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도민들에게 4·3에 대해 정부 차원의 공식사과를 했다. 대한민국 국가원수로서 최초의 사과였다. 2021년 ‘4·3특별법 전부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4·3 전개 과정에서 빚어진 인명 피해 등에 대해 국가 차원의 피해보상을 할 수 있는 근거가 최초로 마련되었다. 또 영문도 모른 채 군경에 끌려가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4·3 수형인들의 명예도 회복할 수 있게 됐다. 제주섬은 이제 4·3을 통해 배운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세계에 전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4·3의 진실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화해와 상생을 실현하는 것이다.
비극의 현장, 폐허가 된 마을 터에서 자란 보리줄기에 진실의 그림을 그리다
‘속솜허라’(입 다물라)에 갇히지 않는다! 이제 4·3이 역사가 된다
‘틀낭’은 산딸나무를 부르는 제주 말이다. 한반도 중부 이남에 많이 자라고 특히 제주에 많다. 제주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산딸나무 열매를 많이 먹으며 자랐다. 4·3 당시 산으로 피신 간 사람들도 허기를 덜기 위해 산딸나무 열매를 먹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매달려 죽은 십자가도 산딸나무로 만들었다. 꽃받침이 지고 남은 열매는 꼭 심장 같기도 하다. ‘틀낭에 진실꽃 피엄수다’는 ‘산딸나무에 진실꽃이 피었습니다’라는 말이다. 4·3의 진실이 마침내 피게 되었다는 것을 담은 제목이다.
이 책은 오래도록 국가가 숨기고 억눌러온 폭력과 야만의 역사에 관해 이야기한다. ‘속솜허라’라는 제주 말은 ‘입 다물라’라는 말이다. 4·3에 대해 국가가 침묵을 강요하면서 제주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그 말을 썼다. 하지만 결국 어떤 사람들은 끊임없이 진실을 찾고 그 이야기들을 세상에 더 큰 목소리로 돌려주려 했다. 많은 제주사람들이 ‘속솜허라’에 갇히지 않고 4·3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틀낭에 진실꽃 피엄수다》는 그런 목소리를 그림과 글로 담았다.
“이수진의 4·3 보리미술은 지금은 사라진 4·3 희생자들을 오늘에 불러내 진실을 세우려는 작업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이제 제주의 모든 풍경이 달리 보일 것이다. 오르한 파묵의 말처럼 <모든 풍경의 아름다움은 슬픔에 있다>.”
그래픽 다큐멘터리로 살피는 4·3
2023년은 ‘제주 4·3’이 75주년이 되는 해다. 또 노무현 대통령이 4·3 당시에 자행된 국가폭력에 대해 사과한 지 2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1948년 4월 3일 첫 봉기의 순간으로부터 75년의 세월이 흐르고, 또 국가원수가 명백한 국가폭력에 대해 사과하고 20년이 지났어도 4·3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4·3은 아직 제대로 된 이름을 갖고 있지 못하다. 누구는 사건이라 하고 누구는 항쟁이라 한다. 4·3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그 희생의 성격을 무엇으로 바라보고, 그 희생과 피해에 대해 어떻게 보상할지는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다.
《틀낭에 진실꽃 피엄수다》는 4·3의 진실을 전하고, 여전히 남아있는 문제들을 살피는 책이다. 그림으로 이야기를 전하는 ‘그래픽 노블’처럼 《틀낭에 진실꽃 피엄수다》는 보리줄기를 사용해 만든 그림에 4·3의 결정적인 순간들과 비극적 운명의 사람들을 소개하는 ‘그래픽 다큐멘터리’다. 이수진 작가가 보리미술로 탄생시킨 그림들은 4·3 당시 사라져버린 사람들과 마을들의 존재를 증언하고, 희생된 이들의 영혼을 불러내 진실의 목소리로 위로한다. 이수진 작가가 소재로 사용하는 보리줄기는 4·3 때 폐허가 돼 끝내 재건되지 않은 마을들의 옛 터에서 자란 것들이다. 작가는 사라진 사람들의 혼이 그 보리줄기에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며 작품을 만들었다.
산딸나무에 진실꽃이 피었습니다: 틀낭에 진실꽃 피엄수다
《틀낭에 진실꽃 피엄수다》는 제주가 품고 있는, 반세기 이상 국가가 숨기고 억눌러온 폭력과 야만의 역사에 관해 이야기한다. 제주는 오래도록 변방의 섬으로 역사의 주 무대에서 떨어져 있었지만, 해방 후 이념 전쟁에 휘말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제주 4·3’으로 적게 잡아도 당시 제주도 전체인구 10분의 1을 넘는, 최소 3만 명에서 최대 9만 명에 이르는 제주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또한 그 와중에 살아남은 이들과 그 가족들은 수십 년 세월 동안 ‘빨갱이’ ‘폭도’ ‘반역자’라는 낙인과 연좌제 등 불명예와 부당함을 참고 견뎌야만 했다.
제주에는 ‘속솜허라’라는 말이 있다. 뭍의 표준어로 ‘입 다물라’ ‘아무 말도 하지 말라’라는 말이다. 수십 년 세월 동안 4·3의 진실을 알리고자 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행여 4·3과 같은 국가폭력이 또다시 자행될까 두려워 ‘속솜허라’ ‘속솜허라’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수십 년 동안 국가가 강요하는 침묵 속에서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결국 누군가들은 끊임없이 진실을 찾아 발굴하고 그 이야기들을 다시 세상에 더 큰 목소리로 돌려주려 했다. 많은 제주사람들이 ‘속솜허라’에 갇히지 않고 세상에 4·3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틀낭에 진실꽃 피엄수다》 역시 그런 목소리 중의 하나다.
‘틀낭’은 한반도 중부 이남에 많이 자라는 산딸나무를 부르는 제주 말이다. 제주 곳곳에 산딸나무가 많다. 제주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산딸나무 열매를 많이 먹으며 큰다. 4·3 당시 산으로 피신 간 사람들도 허기를 덜기 위해 산딸나무 열매를 먹었다. 산딸나무는 예수 그리스도가 매달려 죽은 십자가를 만든 나무이고, 또 꽃받침이 지고 남은 열매는 꼭 심장 같기도 하다. 그런 여러 가지 뜻을 살려 ‘틀낭에 진실꽃 피엄수다’라고 제목을 지었다. ‘산딸나무에 진실꽃이 피었습니다’로 곧 4·3의 진실이 마침내 피게 되었다는 기원을 담았다.
봄은 왔지만…
《틀낭에 진실꽃 피엄수다》는 제주사람들이 척박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이웃들과 이룬 공동체적 관계인 ‘궨당’을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이는 4·3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사람을 파괴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파괴하고, 마침내 궨당 공동체를 파괴하는 과정이었음을 예고한다.
1부 ‘봄은 왔지만’은 19세기 말 제국주의 열강이 세계 각지를 식민지로 삼고, 열강들끼리 때로 경쟁하고 때로 협력하며 세계를 게임판으로 만들던 과정에서 한반도의 운명이 결정되었던 것을 앞세워 이야기한다. 이는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맞이한 해방 때도 마찬가지여서, 한반도 사람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38도선을 경계로 소련과 미국이 각각 분할 통치하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제주에서 미군정은 해방자가 아니었다. 1947년 3월 1일, 삼일절 기념집회에서 미군정은 집회를 불허하고, 이에 항의하는 시위대를 강경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6명이 죽고 8명이 중상을 입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등 뒤에서 총을 맞은 것으로 판명되면서(도망가는 사람들을 조준 사격했다는 말이다) 제주사람들은 3월 10일 총파업으로 대응했다. 일손을 멈추고 감자를 쪄서 나눠먹는 평화로운 파업이었지만 미군정과 경찰은 여전히 강경하게 대응했다. 제주도는 ‘빨갱이 섬’이라는 누명을 썼고, ‘반공 투사’라 자처하는 서북청년단까지 육지에서 건너와 갈등을 키웠다.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되고 고문당하고 몇몇이 죽음에 이르렀다. 제주사람들의 억울함과 분노가 차곡차곡 쌓여갔다.
꽃 이파리가 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1948년 4월 3일, 섬 곳곳에서 싹터 자라던 민중의 분노가 마침내 제주도 전역에서 붉은 횃불로 타올랐다.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 조국의 통일독립!” 4월 3일 봉기에서 외친 구호들은 4·3의 성격을 잘 말해준다. 한편으로 4·3은 미군정과 경찰이 자행하던 국가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열망이었다. 또 한편 4·3은 곧 예정된 남한만의 5·10 단독 총선거를 앞두고 이에 항의하는, 반으로 쪼개진 나라 대신 온전한 통일국가에서 살고 싶은 제주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제2의 독립운동이었다.
4·3이 일어나자 국가는 무자비하고 끔찍한 폭력으로 대응했다. 국제연합(UN)이 금지시킨 초토화작전이 광범위하게 실행되었다. 마을이 불타고, 무장대가 아닌 사람들―특히 어린아이들과 노인들까지 가리지 않고 학살됐다. 여자들은 성폭행을 당하고 학살되거나 끌려가거나 했다. 자세히 적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일들이 태연하게 벌어졌다. 토벌대는 사람들을 파괴한 것만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를 파괴했다. 나 대신 죽을 사람을 지목하게 하는 ‘손가락 총’은 제주도를 갈가리 찢어 분열시켰다. 137개의 마을이 폐허가 됐고, 그중 많은 마을은 아직까지 폐허로 남아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 희생자의 수는 아직도 논쟁중이다. 적게는 3만, 많이는 9만 명이라 한다. 희생자의 90%가 토벌대, 국가가 자행한 폭력의 희생자들이었다. 아이라고 봐주지 않았고, 종교인이라고 넘어가지 않았다. 열여섯 명의 스님이 희생됐고, 서른다섯 곳의 절이 불태워졌다. 오래도록 제주사람들의 믿음의 장소이자 제주 불교의 상징이었던 관음사 역시 불태워지고 말았다.
가해자들은 뻔뻔하고 당당했다. 미군정의 진압 책임자 로스웰 브라운 대령은 “(4·3의)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오직 진압뿐!”이라고 공언했고, 토벌대 지휘관이었던 박진경 대령도 “제주 폭동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라면 제주도민 30만 명을 다 희생시켜도 괜찮다.”라고 말하였다. 하수인뿐만 아니라 단독정부 수립 이후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도 가차 없었다. 그는 국무회의에서 “지방 토색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라.”라고 지시했다.
국가폭력은 잔인하고 끈질겼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예비검속’이라는 명분으로 또 다시 학살이 자행됐다.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을 것 같은 사람을 미리 찾아내 조치를 취한 것인데, 사실상 빨갱이가 될 가능성이 조금만 있어도 미리 찾아내 가두고 죽이는 게 목적이었다.
학살 과정을 목격한 사람들은 평생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시달렸다. 지금은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대표적 여행지인 정방폭포나 성산포 터진목 등 제주도 곳곳에 학살과 희생의 기억이 남았다. 정방폭포의 학살을 목격한 생존자는 사람들의 손과 손을 묶은 뒤 총을 쏘아 죽이거나 죽창으로 찔러 죽인 후 아득한 폭포 아래로 떨어뜨렸다고 했다. 증언자는 그 장면을 이렇게 아프게 기억한다. “사람들이 팔랑팔랑 떨어지는 것이 꼭 꽃 이파리가 지는 것처럼 보입디다.”
까마귀도 모르는 제사
제주 말에 ‘가메기 모르는 식게’라는 말이 있다. 까마귀도 모르는 제사, 라는 말이다. 언제 죽었는지도 확실하지 않고, 심지어 뼈들이 뒤엉켜 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죽음이 너무 많았다. 맘 놓고 이들에 대한 제사를 지낼 수도 없었다. 비밀리에 기도를 올리고 비밀리에 제사를 지내야 했다. 슬픔을 가슴에 묻고 지내야 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연좌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죽은 사람들, 혹은 감옥에 갇혔다 돌아온 사람들의 가족들에게는 성공할 수 있는 사다리가 치워져버렸다. ‘속솜허라’, 입 다물라, 아무 말도 하지 마라, 라는 말만 남았다.
그래도 사람들은 역사의 진실을 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수집하고 사건의 진상을 추적하며 4·3이 우리 역사에서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높였다. 국가권력이 여전히 침묵을 강요하는데도 희생자들의 죽음의 흔적을 수습하고, 발굴된 진실들을 세상에 더 큰 목소리로 돌려줬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이던 2001년 1월, 4·3 이후 최초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 공포됐다. 그리고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도민들에게 4·3에 대해 정부 차원의 공식사과를 했다. 대한민국 국가원수로서 최초의 사과였다. 2021년 ‘4·3특별법 전부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4·3 전개 과정에서 빚어진 인명 피해 등에 대해 국가 차원의 피해보상을 할 수 있는 근거가 최초로 마련되었다. 또 영문도 모른 채 군경에 끌려가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4·3 수형인들의 명예도 회복할 수 있게 됐다. 제주섬은 이제 4·3을 통해 배운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세계에 전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4·3의 진실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화해와 상생을 실현하는 것이다.
목차
책을 내며 4
1부 봄은 왔지만 9
2부 꽃 이파리가 지는 것처럼 보입디다 37
3부 까마귀도 모르는 제사 121
부록
제주4·3항쟁 연표 174
제주 4·3 희생자 마을별 분포지도 183
참고문헌 184
노무현 대통령 사과문 186
추천사 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