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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디아스포라 에세이스트 서경식이 다시 찾은 인문학의 고향 이탈리아!
“‘기행’인 이상 단순히 인문적인 사실과 현상에 대한 고찰에 머물지 않고, 설령 단편적이라 할지라도 직접 찾아가 그 지역의 풍토를 온몸으로 느끼며 과거와 미래로 상상을 펼쳐나가는 일이 필요하다. 이 책은 ‘나’라는 인간이 몇 번씩 찾아갔던 ‘이탈리아’라는 장소에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생각해보았던 인간을 향한 마음의 기록이다. 당연히 ‘나’의 주관적인 프리즘을 통해서 본 이미지이며, ‘이탈리아’를 이야기함과 동시에 ‘나’를 말하는 것에 다름없다.
아아, 이탈리아. 항상 나를 지치게 만드는 이탈리아. 여행을 끝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이제 다시는 갈 일은 없을 거야, 라는 생각이 드는 이탈리아. 그렇지만 잠시 시간이 흐르면 잊기 어려운 추억이 되어 반복해서 되살아나는 이탈리아. 이런 생각은 인간 그 자체를 향한 애증과도 어딘가 닮았다.”
_저자의 말 중에서
미켈란젤로에서 마리노 마리니, 단테에서 나탈리아 긴츠부르그까지,
이탈리아에서 인문주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탐색하다
1. 이탈리아에서 다시 인문학에 대해, 인간에 대해 묻다
이 책은 저자가 2014년부터 2017년까지 로마, 페라라, 볼로냐, 밀라노 등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방문해 다양한 예술가들과 예술작품을 만나고 생각한 바를 기록한 여행 에세이이다. 저자의 이탈리아에 대한 열렬한 관심은 전작을 읽어본 독자라면 이미 알 만한 것이다. 저자는 이탈리아의 작가인 프리모 레비의 삶을 조명한 에세이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마르코폴로상을 수상한 바 있고, 카라바조, 단테, 미켈란젤로, 나탈리 긴츠부르그, 레오네 긴츠부르그 등 이탈리아의 여러 작가와 예술가를 소개하는 글을 여러 차례 써왔다.
하지만 이 책에 엮인 내용은 조금 특별하다. 이탈리아 유대인의 역사, 1,2차 세계대전 시기 이탈리아 저항의 역사에 대한 관심은 이전과 연결되지만 주된 관심은 ‘근대 인문학의 황혼’이라고 할 법한 시대적 변화로 한 발 옮겨져 있다. 60대의 저자가 찾은 이탈리아는 어딘가 조금 달라졌다. 이탈리아뿐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전쟁으로부터의 교훈, 역사로부터의 교훈을 망각하고 이전보다 더욱 더 천박해져간다. 인간은 애초부터 잔혹하고 어리석은 존재였지만 간혹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어떤 근대적인 시도가, 예술적이고 정치적인 시도가 반짝 하고 빛났던 시기가 있다. 그 시기의 기억은 계속해서 희미해져가지만, 그 시기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새로운 성찰의 계기를 만들어낸다.
1943년 10월 16일 토요일 이른 아침부터 이탈리아에서 첫 번째 유대인 일제 체포가 시작됐다. 이때 구속된 사람의 수는 1022명. 그중에는 비유대인 여성 한 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자신이 돌보던, 몸이 자유롭지 못한 유대인 고아와 운명을 함께했던 것이다. 이틀 후 포로들은 가축 운반용 수레 열여덟 대에 실려 아우슈비츠로 압송됐다. 물도 음식도 허용되지 않았던 가혹한 이송과정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죽었고 사체는 이송 도중 정차장에 차례차례 버려졌다. 1022명 가운데 전쟁이 끝난 후 살아서 돌아온 자는 열다섯 명이었다고 한다. 고대도 중세도 아닌, 그리 얼마 지나지 않은 과거에 일어난 일이다.
옛 유대인 거리에서 달콤한 과자와 진한 커피를 마시고 있던 내 머릿속은 처참한 이미지로 가득 찼다. 카라바조가 그렸던 세계와 겹쳐진다. ‘로마의 참극’은 유럽의 유대인이 경험했던 수난 전체에서 본다면 아주 작은 하나의 삽화에 불과하다. 로마라는 장소에 몸을 두고 있으면, 이조차도 고대부터 거듭되어온 수많은 참극 가운데 한 장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감각에 휩싸인다.(61)
‘시대정신’이라고 할까. 1차 세계대전 종전 후인 1920년대 ‘에콜 드 파리’의 공기를 전해주는 모딜리아니와 수틴의 작품은 확실히 어딘가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1950~1960년대 일본 사회의 공기와 공명하고 있었다. 빈곤과 질병으로 스러져간 천재들의 작품이 전후 일본에서 동경의 대상이 된 까닭은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사람들의 마음속에 현세적이고 실리적인 성공을 넘어 삶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찾고자 했던 바람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리라. 지금 40대 이하의 많은 일본인들은 모딜리아니와 수틴에게 조금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듯하다. 과거 30년 동안 신자유주의적 가치관이 사회 전체를 석권했기 때문에 그런 식의 마음은 거의 사라져버렸다. 그랬기에 로마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모딜리아니와 재회했던 나는 마치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 그리고 젊은 시절의 나 자신과 다시 만난 듯한 기묘한 생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73~75)
카라바조는 전 생애에 걸쳐 약 열두 점에 이르는 목이 잘린 사람을 모티프로 한 그림을 그렸다. 참수에 매혹된 화가라고 해도 좋겠다. 나폴리에서 그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비드」에 등장하는 골리앗은 자화상이다. 두 눈은 각각 다른 반응을 보인다. 왼쪽 눈에는 생명의 잔광이 느껴지지만 오른쪽 눈은 이미 흐릿해져버렸다. 카라바조는 스스로에게 절망하면서, 한편으로 그런 자신을 철저히 응시하고 있다. 이러한 자화상을 그릴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지극히 ‘근대적인 자아’라는 의미가 아닐까. 나는 이 점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아아, 얼마나 혹독하며 무참한가……. 카라바조라는 인물이 잔혹하다는 뜻이 아니다. 타협 없는 그의 묘사가 인간의 잔혹함, 현실 바로 그대로의 잔혹함과 길항하고 있는 것이다.(47)
미로 같은 좁은 통로를 더듬어 나아가보니 앞에 지하 감옥이 있었다. 천장도, 바닥도, 사방의 벽도 모두 돌로 만들어졌다. 해자 수면보다 위치가 낮아서인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에스테 가문의 당주 니콜로 3세(1383~1441)는 명문 말라테스타 가문 출신의 파리시나를 두 번째 아내로 맞이했는데, 그녀는 자신보다 스무 살이나 어렸다. 어린 아내는 그의 사생아였던 우고와 불륜에 빠졌다. 열아홉 살과 스무 살이었던 두 사람은 이 지하 감옥에 유폐되어, 이후 참수에 처해졌다. 니콜로 3세는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 번째 결혼을 페라라의 에스텐세 성. 하지만 새로 맞은 아내도 파리시나의 망령에 시달리다 목을 매어 자살해버렸다고 한다.(119)
알폰소 1세는 친동생과 배다른 동생을 각각 수십 년이나 차갑고 습한 지하 감옥에 가두었던 셈이다. 게다가 같은 성 안에서 궁정의 의전은 물론, 연회 같은 일상이 계속 벌어졌다. 맛있는 음식에도 질렸을 때, 알폰소 1세는 잠깐이라도 지하 감옥에서 신음하는 동생들을 상상하지 않았을까? 분명 상상했을 것이다. 오히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떠올려보고, 그런 상상이 냉혹한 기쁨을 증식시켜, 맛 좋은 술로 도취된 기분을 더더욱 북돋웠으리라. 이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다. 그렇지 않은가?(121)
넓은 거리에 서서 살짝 고개를 들어 보면 하얗게 빛나는 알프스의 봉우리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험한 산길을 반파시즘의 투사나 망명자들이 넘나들었을 것이다.
“인간성의 이상으로 하얗게 빛나는 봉우리들.”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서 토리노를 방문했을 때 주위를 둘러싼 험준한 산들을 가리켜 나는 그렇게 불렀다. 지금도 산들은 변함없이 거기에 있지만 이상의 광휘는 위협받고 있다. 반파시즘 투쟁의 사명을 짊어지고서 전후 이탈리아의 풍요로운 지적 문화를 형성한 세대는 세상에서 거의 퇴장했다. 이제는 거칠고 천박한 포퓰리스트의 사나운 목소리가 사회를 휘어잡고 있다. 이탈리아만이 아니다. 전세계적인 현상이며 일본이야말로 한층 더 심각하다. 아우슈비츠의 해방 이후 40년도 더 지난 지금, ‘인간성’의 재건을 위해 힘겨운 증언자의 역할을 맡았던 프리모 레비가 살아 있었다면 이 사회를 어떻게 바라봤을까. 그리고 무슨 말을 했을까.(231)
내가 아는 토리노, 그을린 듯 우울한 토리노의 모습이 사라져가는 것처럼 느껴진 것은 그저 여행자의 감상일까. 모든 장소에서, 온갖 것들이 급속도로 천박해지고 가벼워지고 있다. 훌륭한 사람들, 선한 자들은 이제 가고 없다. 말하자면 다 지나가버린 게다.
이 도시는 지난 한 세기 동안 그람시에서 긴츠부르그, 파베세를 거쳐 프리모 레비에 이르는 지식인들을 배출하면서 풍요로운 문화적 자원을 전 세계로 공급해왔다. 고문, 학살, 추방, 망명, 배신……. 그런 경험들 속에서 토리노의 지식인들이 비춘 문화의 빛, 그리고 나탈리아 긴츠부르그와 프리모 레비의 작품에서 반짝이는 놀랄 만한 유머! 지적 휴머니즘의 극치라는 의미에서의 유머! 극동에서 삶을 누리고 있는 디아스포라인 나 역시 그 빛으로부터 자극과 은혜를 입었던 한 사람이다. 그것도 한순간의 빛줄기에 불과했던 걸까.(279)
2. 『나의 서양 미술 순례』 이후 30년, 노교수가 된 저자가 기록하는 시간의 힘
한국의 많은 독자들이 서경식이라는 이름을 저자로서 기억하게 된 것은 1993년 번역 출간된 『나의 서양 미술 순례』 덕분이다. 지금은 ‘미술 기행’이라는 말이 흔하게 여겨지지만 당시로서는 인문학적인 에세이면서 여행기이면서 작품과 작가에 대한 소개가 섞인 이런 형태는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고, 많은 독자들이 『나의 서양 미술 순례』를 통해 개인적이고도 정치적인 그림 읽기의 방법을 배웠다고 고백한다. 조국에서 옥살이를 하는 형들(서승, 서준식)의 옥바라지를 하는 30대의 재일조선인 청년에게 유럽의 다양한 미술관에서 만난 작품들은 지하실에 난 창문으로 겨우 들어오는 희박한 공기였다고, 저자는 그 책에 기록한 바 있다. 예술이 역사와 현실과 삶과 독특하게 뒤섞이며 서로를 해석하거나 확장하는 놀라운 장면들이 그 책에 가득 담겨 있었다. 『나의 조선미술 순례』에 이어 이제 60대가 된 저자가 다시 유럽, 이탈리아의 작가들과 작품들을 만난 소회를 기록했다.
20~30년 사이 달라진 세계에 대한 기록도 흥미롭지만, 그에 못지않게 저자가 ‘늙음’에 대해 사유하는 장면들도 인상적이다. 고통의 순간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던 30년 전 비관적인 청년의 관점은, 인간의 역사 전체가 그와 비슷한 고통의 반복으로 이루어진다는 노장의 관점으로 확장된다. 한편 예술, 예술작품을 인간이 유한한 시간을 극복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역사 속에 기어코 남기는 흔적으로서 읽어내는 것도 인상 깊다. 특히 저자가 언젠가 꼭 기록하고 싶다고 반복해서 언급하는 인간에 대한 더 어둡고 더 솔직한 진실이 어떤 이야기일지 궁금해진다.
슈트케이스가 또 망가졌다. 이번이 두 번째다. 2006년 독일 뒤셀도르프에 머물던 때 구입했던 가방이다. 2016년 3월 코스타리카와 미국을 한 달 가까이 여행하면서 그 부담을 견뎌내지 못한 것이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의 계기가 되었던 1983년 유럽 여행 이후, 나는 세계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돌아다녔으니 슈트케이스처럼 나 역시 슬슬 사용기한이 다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여행지에서 보았던 미술 작품과 들었던 음악, 읽은 책과 만난 사람들에 대한 흥미는 수그러들지 않고 이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 역시 잦아들지 않는 듯하다.(4)
그 이후, 셀 수 없을 만큼 자주 이탈리아에 왔지만 로마에만은 들르지 않았다. 로마는 거의 27년만이었다. 27년 전이라면 한국의 군사독재 정권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던 해였다. 물론 ‘마지막’이라는 말은 지금에야 할 수 있을 뿐, 당시에는 그 암울한 나날이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다.(15)
처음 로마를 방문하고 27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땐 예상을 못했지만 두 형은 살아서 출소했고 나는 글쟁이가 되어 대학에 직장도 얻었다. 전에는 언제나 혼자서 여행을 떠났지만 15년 정도 전부터는 F라는 동행도 생겼다. 나 개인에 관해서만 말하자면 1990년대 이후로는 점점 불만 없는 일상을 살고 있다고 해도 좋을 법하다. 하지만 내 마음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평안을 찾지 못한다. 내가 이런 안정을 얻은 것은 단순한 우연과 행운의 덕이라는 의식, 과거 언젠가의 시점에 가혹하고 무참한 운명 속으로 떠밀렸더라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는 생각, 레비식으로 말하자면, 좀 더 어울리는 다른 누군가를 대신해 내가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집요하게 따라붙어 사라지지 않는다(실제 내가 아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참혹한 운명을 겪기도 했다). 무엇보다 여러 우연이 겹쳐진 결과로 나 자신은 30년가량의 세월을 이렇게 어려움 없이 살아가고 있지만 세상과 인간은 조금도 나아진 바 없다는 생각이 늦가을의 그림자처럼 하루하루 짙어지고 있는 것이다.(19)
트리에스테에도 가보고 싶다. 아니, 가봐야만 한다. 그런 생각을 했지만 이번 여정에는 그곳까지 발길을 옮기지 못한다. 그렇지만 다음이란 있을까.(95)
밝고 친절하지만 신랄한 사회비평가였고 누이나 선생님처럼 나를 대해줬던 리타, 귀족 공산주의자 베를링구에르가 체현했던 유로코뮤니즘을 향한 기대, 남과 어울리기 싫어하는 성격을 바보 같은 농담으로 숨기고자 했던 젊은 시절의 나. 모두 멀리 사라져버렸다. 인생은 이다지도 속절없이 지나가버린다.(105)
여행을 시작할 무렵부터 집요하게 뇌리에서 떠나지 않던 어두운 생각이, 다시 솟아올랐다. 가능하다면 나는 그런 생각을 긴 소설로 풀어내고 싶다. 목숨이 다하기 전에, 그 검은 것들을 토해내고 싶다. 그렇지만 단편적인 세부가 떠올랐다가 사라질 뿐이라서 어떤 소설이 될지 아직 형태도 갖추지 못했다. 아주 조금 생각해둔 것은 소설의 무대가 어제 본 저 에스텐세 성의 지하 감옥 같은 공간이라는 점이다. 여기가 어디인지, 지금이 언제인지, 내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게 된 인물이 그곳에 있다. 아마도 그 인물은 나 자신일 것이다.
오후부터 이케부쿠로의 찻집에서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철학자 T교수 일행과 연구회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서둘러 이불을 개고 있었다. 그러자 어느새 어머니가 나타나, “넌 참 얄미워.”라고 말했다. “어? 내가 얄밉다고?” 나는 엉겁결에 반문했다. “지금까지 60년의 인생에서, 스무 살 이후 40년간을 이런 식으로 살아온 내가 얄밉다고?” 격앙된 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어머니께 대들었다. 나의 부모도, 적지 않은 친구와 지인들도 심하게 상처 입고 괴로워하며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나만은 살아남았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 점이 ‘얄미운’ 걸까……. 어느새 잠에 빠져, 꿈을 꾼 것이었다.(135)
어느덧 길게도, 한순간처럼 짧게도 생각되던 그런 세월이 흘러버린 후 형들은 석방되었고, (행운이라고 말해야만 하겠지만) 나는 글쟁이가 되어 책을 내고 대학에 자리를 얻어 그럭저럭 무난한 삶을 살아오고 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상황에 대해 ‘진실은 이렇지 않아, 이럴 리 없어.’라는 감각이 떠나지 않는다. 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의 나이도 훌쩍 넘겨버린 지금, 과연 나 자신의 인생은 이대로 괜찮을 걸까. 이 생각은 언제까지나 매듭지어지지 않는다.
꿈일지언정 오랜만에 어머니와 만났다. 그 꿈은 어머니가 저 세상에서 내려와 나에게 경고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네가 쓰고자 하는 소설에는 아직 번지르르한 겉치레나 자기보신적인 속임수가 있다고, 진실은 더욱, 더욱 어두운 것이라고.(139)
3. 디아스포라의 눈으로 본 이탈리아 예술의 매력, 이탈리아의 매력
이 책에서는 그동안 저자의 전작에서 다루어진 바 있는 카라바조, 미켈란젤로, 프리모 레미, 나탈리아 긴츠부르그 외에 모딜리아니, 샤임 수틴, 잔 에뷔테른, 조르조 모란디, 주세페 펠리차 다 볼페도, 마리노 마리니, 주세페 스칼라리니, 오기와라 로쿠잔, 사에키 유조, 마리오 시로니 등의 작가와 작품이 소개된다.
각각 다른 시대에 다른 장소에서 활동했던 예술가들이지만 각자의 시대 각자의 장소에서 치열하게 고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반종교개혁의 시대 종교적으로는 정통파이면서도 예술적으로 혁명가이기 때문에 인간 존재의 본성을 가차 없이 그려낸다거나(카라바조), 파시즘의 시대에 고전성, 고요함, 조화라는 주제에 집중함으로써 반파시즘적인 가치를 추구한다든가(모란디), 2차대전 이후에도 계속 인간의 승리가 아닌 패배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든가(마리니), 예술적인 완성 이후의 완성을 추구하며 탈진해버린다든가(미켈란젤로).
또 이탈리아 곳곳을 수차례 여행하면서 겪은 여러 일상적인 에피소드들이 더해져 생생한 이탈리아 여행기로도 손색이 없다.
직경 60센티미터 정도의 원형 방패 모양으로 펼쳐진 캔버스에 묘사된 것은 참수된 메두사의 얼굴이다. 머리카락대신 뱀으로 뒤덮인 머리, 사팔뜨기 느낌마저 드는 초점 안 맞는 눈을 부릅뜨고서, 벌린 입으로는 무언가 뜻도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는 듯하다. 절단된 목에서는 선혈이 치솟는다. 말 그대로 참수의 결정적 순간을 그렸다. 급속한 출혈로 인해 이 인물의 시야는 혼탁해질 테고 의식도 곧 흐릿해지리라. 반면에 뇌는 여전히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자신에게 덮친 운명을 명료하게 인식하고 있어서, 그 시선이 관람자인 있는 나를 사로잡아버린 것이다. 이런 그림이 이전에도 존재했을까.(25)
이 그림이 그려질 무렵인 1600년은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사제였던 조르다노 부르노가 이단으로 몰려 7년의 투옥생활 끝에 로마에서 화형에 처해진 해이기도 하다. 반종교개혁의 시대, 로마라는 위험한 도시의 공기가 “기질적으로는 반역자였지만, 종교적 신조에서는 열광적인 정통파”였던 이 젊은 화가를 혁명가로 키워낸 셈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성을, 그 잔학함과 어리석음까지 놓치지 않고 가차 없이 그려낼 수 있었던 혁명가로.(43)
행동당의 젊은이들에게 모란디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로운 존재, 모든 웅변이나 과잉, 격렬함과 천박함에 대립하는 존재, 바꿔 말하면 파시스트적 신념이 전제로 하는 폭력적 사고와 정신적인 퇴락과 대립하는 그런 존재”로서 커다란 버팀목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조르조 모란디는 유서 깊은 도시 볼로냐에서 위대한 유럽 장인의 노래를 이탈리아풍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모란디는 반파시즘 사상가는 아니다. 아무래도 실천가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저 고난의 시대에, 10년을 하루처럼 병과 항아리를 계속 그려나갔던 ‘훌륭한 장인’으로서, 파시즘과는 양립할 수 없는 미적 실천을 관철해갔다.
그런데 ‘고전성’, ‘고요함’, ‘조화’, ‘엄격’과 같이 오늘날에는 폭넓게 받아들여지는 모란디의 이미지에 관해 근래 들어 비판적 주석이 덧붙여지고 있다. 모란디에 대한 이런 기존의 이미지는 화가 자신이 적극적으로 의도하고 개입함으로써 형성되었다는 지적이다. 다시 말해 ‘훌륭한 장인 모란디’라는 이미지 자체가 그의 ‘작품’이었다면, 모란디를 찬탄하는 나의 마음은 더욱 깊어진다. 모란디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과 예술운동의 동향에 무감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 ‘거리’를 두는 법을 ‘선택’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피렌체와 베네치아, 로마와 밀라노의 중간에 위치한 볼로냐의 예술가다운 ‘선택’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169)
이 대목을 읽었을 때,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기마상을 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바람이 실현되어 가까이서 보니 과연 페기 구겐하임이 썼던 그대로의 느낌이었다. 감탄이 나왔지만 그 부분만을 너무 응시해서도 안 되었다.
현대 세계의 고뇌를 진지하게 표현하고자 했던 마리니는 한편으로는 장난기 넘치는 사람이기도 했다. 진지함과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점이 마리니의 표현이 가진 온화함과 풍성함의 비밀이며, 초상 조각에서 회화 작품까지 관통하고 있는, 쉽사리 도달하기 어려운 장점이다.(193)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문학에서도 이와 비슷한 유머가 느껴진다. 파시스트에게 남편을 참혹하게 잃은 작가 나탈리아 긴츠부르그의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성격을 ‘이탈리아적’이라고 해도 좋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독일어권의 예술가들에게서는 발견하기 힘든 특징일 것이다. 내가 좋아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특징이다.(193)
미켈란젤로가 89년 생애의 고투 끝에 만든 마지막이자 미완성 작품이다. ‘미완’이라고 썼는데 분명 사실이다. 정을 한 자루 손에 쥐고 순백의 대리석 덩어리 속에 갇혀 있는 무언가를 깎아내어 바깥으로 드러내는 행위. 미켈란젤로는 몇 번이나 그 일을 시도한 끝에 결국 도중에 그만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무릇 ‘미완’이란 무슨 의미일까, 예술에서 ‘완성’이란 또 무엇일까. 이 작품과 마주하면 이런 의문이 들끓듯 일어난다.(305)
나는 미켈란젤로에 대해 오랫동안 선입견을 가져왔고 실제로 그의 명작을 여러 번 접했어도 피상적인 것을 넘어서는 감격에 휩싸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 최후의 작품을 기점으로 해서 시간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듯 작품들을 상기해보니 또 다른 풍경이 떠오르는 듯했다. 천재 미켈란젤로는 20대에 완성이라는 영역에 도달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후에 타성에 빠진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형식’에 만족해 줄곧 그 안에 머물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이 ‘완성’에서 한발 더 앞으로 나아가려고 힘겨운 싸움을 계속했고, 마지막으로 ‘미완성의 완성’을 남기고서 목숨이 다했던 것이다. 「론다니니의 피에타」, 미켈란젤로에게 이보다 더 완벽한 ‘완성’이 있었을까.(313)
“저런 사람들을 말끔히 정리해버린 것이 나치였어. 독일 국민 대다수도 ‘나치가 거리를 청소해줬다.’라며 그런 난폭한 해결책을 환영했고, 그 결과가 바로 홀로코스트로 이어졌지. 한국에서도 군사정권이 나치와 비슷한 일을 펼쳤고…….”
“그러네. 성가시긴 하지만 저런 사람들의 존재가 용인된다는 것만 봐도 이탈리아는 느슨하고 살기에 팍팍하지 않은 사회일지도 몰라.”
“그렇지, 신경 쓰이고 피곤한 것은 피할 수 없는 대가라고나 할까…….”
그날 나와 F와 사이에 오간 대화다.
카라바조의 초기작 중에는 「카드 사기꾼」과 「여자 점쟁이」라는 그림이 있다. 모두 우의화지만 현실 그 자체를 그린 그림이기도 하다. 이탈리아는 400년 이상 전에도(아마 그보다 훨씬 전에도) 지금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 후에도 로마 체류 중에 계속 이러한 종류의 ‘피곤함’이 따라다녔다. 예를 하나 들어보면 보르게세 공원 근처에 있던 고급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기분 좋게 숙소로 돌아와 아무 생각 없이 영수증을 확인했더니 주문도 하지 않고 먹은 적도 없는 샴페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마다 나와 F는 얼굴을 맞대고 “치러야 할 대가, 대가……”라고 중얼거렸다.(31)
한번은 테르미니 역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스니커즈를 신은 소매치기 같은 남자들이 세 번이나 다가와서 양해도 구하지 않고 슈트케이스에 손을 대려고 했다. 멍하게 있으면 가방을 훔쳐갈 기색이라 안절부절 못하다가 “Don’t touch me!”라고 영어로 크게 외치며 그들을 쫓았다. 그렇게 말한 후 ‘놀리 메 탄게레Noli me tangere(나를 만지지 말라)’를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한 예수와 처음으로 만난 여인이다. 예수의 무덤에 가본 마리아는 무덤 구덩이를 막아놓은 돌이 옮겨져 있고 유해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된다. “누군가가 주님의 몸을 가져가버렸다.”라며 그녀가 울고 있을 때 등 뒤에서 예수가 나타나 “마리아야”라며 이름을 불렀다. 마리아가 “선생님!”이라 하며 다가가자 예수는 “나를 만지지 말라. 나는 아직 내 아버지 곁으로 가지 못하였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다. 이 ‘놀리 메 탄게레’는 서양 회화에서 되풀이되며 나타나는 주제다.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이 역에서 만났던, 거스름돈을 챙기려던 노파가 내게 “어디로 가느냐”라고 물었던 일도 떠올랐다. ‘쿠오바디스’였던 걸까……. 이 유서 깊은 거리에서 교회를 몇 군데 돌면서 온통 종교화만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치 중독이라도 된 듯 소매치기와 사기꾼들까지 기독교 이야기 속 인물처럼 보이기 시작했다.(67)
스칼라 극장까지는 지하철을 타면 금방이다. 그런데 포르타 베네치아 역에 갔더니 입구의 철문이 모두 닫혀 있었다. 역무원에게 묻자 쌀쌀맞게 “큐조!chiuso!(닫혔음)”라고만 말하고는 휙 가버린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퇴근길 러시아워에 이유도 알리지 않은 채 지하철이 멈추다니. 트램을 타고 가기로 황급히 계획을 바꿨다. 전차를 기다리는 중년 부부에게 “지하철이 멈췄는데 왜 그렇죠?”라고 물어도 “이탈리아니까……”라며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몇 분 늦게 스칼라 극장에 도착했다. 이미 공연이 시작되어 원래 예약해둔 자리에 앉지 못했다. 그러나 안내원이 막간 휴식 때 발코니 좌석으로 안내해주었다. 나름대로 흥미롭고 쾌적했다. 이런 식의 융통성도 이탈리아니까 가능한 것이 아닐까?(201)
“‘기행’인 이상 단순히 인문적인 사실과 현상에 대한 고찰에 머물지 않고, 설령 단편적이라 할지라도 직접 찾아가 그 지역의 풍토를 온몸으로 느끼며 과거와 미래로 상상을 펼쳐나가는 일이 필요하다. 이 책은 ‘나’라는 인간이 몇 번씩 찾아갔던 ‘이탈리아’라는 장소에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생각해보았던 인간을 향한 마음의 기록이다. 당연히 ‘나’의 주관적인 프리즘을 통해서 본 이미지이며, ‘이탈리아’를 이야기함과 동시에 ‘나’를 말하는 것에 다름없다.
아아, 이탈리아. 항상 나를 지치게 만드는 이탈리아. 여행을 끝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이제 다시는 갈 일은 없을 거야, 라는 생각이 드는 이탈리아. 그렇지만 잠시 시간이 흐르면 잊기 어려운 추억이 되어 반복해서 되살아나는 이탈리아. 이런 생각은 인간 그 자체를 향한 애증과도 어딘가 닮았다.”
_저자의 말 중에서
미켈란젤로에서 마리노 마리니, 단테에서 나탈리아 긴츠부르그까지,
이탈리아에서 인문주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탐색하다
1. 이탈리아에서 다시 인문학에 대해, 인간에 대해 묻다
이 책은 저자가 2014년부터 2017년까지 로마, 페라라, 볼로냐, 밀라노 등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방문해 다양한 예술가들과 예술작품을 만나고 생각한 바를 기록한 여행 에세이이다. 저자의 이탈리아에 대한 열렬한 관심은 전작을 읽어본 독자라면 이미 알 만한 것이다. 저자는 이탈리아의 작가인 프리모 레비의 삶을 조명한 에세이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마르코폴로상을 수상한 바 있고, 카라바조, 단테, 미켈란젤로, 나탈리 긴츠부르그, 레오네 긴츠부르그 등 이탈리아의 여러 작가와 예술가를 소개하는 글을 여러 차례 써왔다.
하지만 이 책에 엮인 내용은 조금 특별하다. 이탈리아 유대인의 역사, 1,2차 세계대전 시기 이탈리아 저항의 역사에 대한 관심은 이전과 연결되지만 주된 관심은 ‘근대 인문학의 황혼’이라고 할 법한 시대적 변화로 한 발 옮겨져 있다. 60대의 저자가 찾은 이탈리아는 어딘가 조금 달라졌다. 이탈리아뿐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전쟁으로부터의 교훈, 역사로부터의 교훈을 망각하고 이전보다 더욱 더 천박해져간다. 인간은 애초부터 잔혹하고 어리석은 존재였지만 간혹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어떤 근대적인 시도가, 예술적이고 정치적인 시도가 반짝 하고 빛났던 시기가 있다. 그 시기의 기억은 계속해서 희미해져가지만, 그 시기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새로운 성찰의 계기를 만들어낸다.
1943년 10월 16일 토요일 이른 아침부터 이탈리아에서 첫 번째 유대인 일제 체포가 시작됐다. 이때 구속된 사람의 수는 1022명. 그중에는 비유대인 여성 한 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자신이 돌보던, 몸이 자유롭지 못한 유대인 고아와 운명을 함께했던 것이다. 이틀 후 포로들은 가축 운반용 수레 열여덟 대에 실려 아우슈비츠로 압송됐다. 물도 음식도 허용되지 않았던 가혹한 이송과정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죽었고 사체는 이송 도중 정차장에 차례차례 버려졌다. 1022명 가운데 전쟁이 끝난 후 살아서 돌아온 자는 열다섯 명이었다고 한다. 고대도 중세도 아닌, 그리 얼마 지나지 않은 과거에 일어난 일이다.
옛 유대인 거리에서 달콤한 과자와 진한 커피를 마시고 있던 내 머릿속은 처참한 이미지로 가득 찼다. 카라바조가 그렸던 세계와 겹쳐진다. ‘로마의 참극’은 유럽의 유대인이 경험했던 수난 전체에서 본다면 아주 작은 하나의 삽화에 불과하다. 로마라는 장소에 몸을 두고 있으면, 이조차도 고대부터 거듭되어온 수많은 참극 가운데 한 장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감각에 휩싸인다.(61)
‘시대정신’이라고 할까. 1차 세계대전 종전 후인 1920년대 ‘에콜 드 파리’의 공기를 전해주는 모딜리아니와 수틴의 작품은 확실히 어딘가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1950~1960년대 일본 사회의 공기와 공명하고 있었다. 빈곤과 질병으로 스러져간 천재들의 작품이 전후 일본에서 동경의 대상이 된 까닭은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사람들의 마음속에 현세적이고 실리적인 성공을 넘어 삶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찾고자 했던 바람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리라. 지금 40대 이하의 많은 일본인들은 모딜리아니와 수틴에게 조금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듯하다. 과거 30년 동안 신자유주의적 가치관이 사회 전체를 석권했기 때문에 그런 식의 마음은 거의 사라져버렸다. 그랬기에 로마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모딜리아니와 재회했던 나는 마치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 그리고 젊은 시절의 나 자신과 다시 만난 듯한 기묘한 생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73~75)
카라바조는 전 생애에 걸쳐 약 열두 점에 이르는 목이 잘린 사람을 모티프로 한 그림을 그렸다. 참수에 매혹된 화가라고 해도 좋겠다. 나폴리에서 그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비드」에 등장하는 골리앗은 자화상이다. 두 눈은 각각 다른 반응을 보인다. 왼쪽 눈에는 생명의 잔광이 느껴지지만 오른쪽 눈은 이미 흐릿해져버렸다. 카라바조는 스스로에게 절망하면서, 한편으로 그런 자신을 철저히 응시하고 있다. 이러한 자화상을 그릴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지극히 ‘근대적인 자아’라는 의미가 아닐까. 나는 이 점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아아, 얼마나 혹독하며 무참한가……. 카라바조라는 인물이 잔혹하다는 뜻이 아니다. 타협 없는 그의 묘사가 인간의 잔혹함, 현실 바로 그대로의 잔혹함과 길항하고 있는 것이다.(47)
미로 같은 좁은 통로를 더듬어 나아가보니 앞에 지하 감옥이 있었다. 천장도, 바닥도, 사방의 벽도 모두 돌로 만들어졌다. 해자 수면보다 위치가 낮아서인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에스테 가문의 당주 니콜로 3세(1383~1441)는 명문 말라테스타 가문 출신의 파리시나를 두 번째 아내로 맞이했는데, 그녀는 자신보다 스무 살이나 어렸다. 어린 아내는 그의 사생아였던 우고와 불륜에 빠졌다. 열아홉 살과 스무 살이었던 두 사람은 이 지하 감옥에 유폐되어, 이후 참수에 처해졌다. 니콜로 3세는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 번째 결혼을 페라라의 에스텐세 성. 하지만 새로 맞은 아내도 파리시나의 망령에 시달리다 목을 매어 자살해버렸다고 한다.(119)
알폰소 1세는 친동생과 배다른 동생을 각각 수십 년이나 차갑고 습한 지하 감옥에 가두었던 셈이다. 게다가 같은 성 안에서 궁정의 의전은 물론, 연회 같은 일상이 계속 벌어졌다. 맛있는 음식에도 질렸을 때, 알폰소 1세는 잠깐이라도 지하 감옥에서 신음하는 동생들을 상상하지 않았을까? 분명 상상했을 것이다. 오히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떠올려보고, 그런 상상이 냉혹한 기쁨을 증식시켜, 맛 좋은 술로 도취된 기분을 더더욱 북돋웠으리라. 이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다. 그렇지 않은가?(121)
넓은 거리에 서서 살짝 고개를 들어 보면 하얗게 빛나는 알프스의 봉우리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험한 산길을 반파시즘의 투사나 망명자들이 넘나들었을 것이다.
“인간성의 이상으로 하얗게 빛나는 봉우리들.”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서 토리노를 방문했을 때 주위를 둘러싼 험준한 산들을 가리켜 나는 그렇게 불렀다. 지금도 산들은 변함없이 거기에 있지만 이상의 광휘는 위협받고 있다. 반파시즘 투쟁의 사명을 짊어지고서 전후 이탈리아의 풍요로운 지적 문화를 형성한 세대는 세상에서 거의 퇴장했다. 이제는 거칠고 천박한 포퓰리스트의 사나운 목소리가 사회를 휘어잡고 있다. 이탈리아만이 아니다. 전세계적인 현상이며 일본이야말로 한층 더 심각하다. 아우슈비츠의 해방 이후 40년도 더 지난 지금, ‘인간성’의 재건을 위해 힘겨운 증언자의 역할을 맡았던 프리모 레비가 살아 있었다면 이 사회를 어떻게 바라봤을까. 그리고 무슨 말을 했을까.(231)
내가 아는 토리노, 그을린 듯 우울한 토리노의 모습이 사라져가는 것처럼 느껴진 것은 그저 여행자의 감상일까. 모든 장소에서, 온갖 것들이 급속도로 천박해지고 가벼워지고 있다. 훌륭한 사람들, 선한 자들은 이제 가고 없다. 말하자면 다 지나가버린 게다.
이 도시는 지난 한 세기 동안 그람시에서 긴츠부르그, 파베세를 거쳐 프리모 레비에 이르는 지식인들을 배출하면서 풍요로운 문화적 자원을 전 세계로 공급해왔다. 고문, 학살, 추방, 망명, 배신……. 그런 경험들 속에서 토리노의 지식인들이 비춘 문화의 빛, 그리고 나탈리아 긴츠부르그와 프리모 레비의 작품에서 반짝이는 놀랄 만한 유머! 지적 휴머니즘의 극치라는 의미에서의 유머! 극동에서 삶을 누리고 있는 디아스포라인 나 역시 그 빛으로부터 자극과 은혜를 입었던 한 사람이다. 그것도 한순간의 빛줄기에 불과했던 걸까.(279)
2. 『나의 서양 미술 순례』 이후 30년, 노교수가 된 저자가 기록하는 시간의 힘
한국의 많은 독자들이 서경식이라는 이름을 저자로서 기억하게 된 것은 1993년 번역 출간된 『나의 서양 미술 순례』 덕분이다. 지금은 ‘미술 기행’이라는 말이 흔하게 여겨지지만 당시로서는 인문학적인 에세이면서 여행기이면서 작품과 작가에 대한 소개가 섞인 이런 형태는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고, 많은 독자들이 『나의 서양 미술 순례』를 통해 개인적이고도 정치적인 그림 읽기의 방법을 배웠다고 고백한다. 조국에서 옥살이를 하는 형들(서승, 서준식)의 옥바라지를 하는 30대의 재일조선인 청년에게 유럽의 다양한 미술관에서 만난 작품들은 지하실에 난 창문으로 겨우 들어오는 희박한 공기였다고, 저자는 그 책에 기록한 바 있다. 예술이 역사와 현실과 삶과 독특하게 뒤섞이며 서로를 해석하거나 확장하는 놀라운 장면들이 그 책에 가득 담겨 있었다. 『나의 조선미술 순례』에 이어 이제 60대가 된 저자가 다시 유럽, 이탈리아의 작가들과 작품들을 만난 소회를 기록했다.
20~30년 사이 달라진 세계에 대한 기록도 흥미롭지만, 그에 못지않게 저자가 ‘늙음’에 대해 사유하는 장면들도 인상적이다. 고통의 순간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던 30년 전 비관적인 청년의 관점은, 인간의 역사 전체가 그와 비슷한 고통의 반복으로 이루어진다는 노장의 관점으로 확장된다. 한편 예술, 예술작품을 인간이 유한한 시간을 극복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역사 속에 기어코 남기는 흔적으로서 읽어내는 것도 인상 깊다. 특히 저자가 언젠가 꼭 기록하고 싶다고 반복해서 언급하는 인간에 대한 더 어둡고 더 솔직한 진실이 어떤 이야기일지 궁금해진다.
슈트케이스가 또 망가졌다. 이번이 두 번째다. 2006년 독일 뒤셀도르프에 머물던 때 구입했던 가방이다. 2016년 3월 코스타리카와 미국을 한 달 가까이 여행하면서 그 부담을 견뎌내지 못한 것이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의 계기가 되었던 1983년 유럽 여행 이후, 나는 세계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돌아다녔으니 슈트케이스처럼 나 역시 슬슬 사용기한이 다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여행지에서 보았던 미술 작품과 들었던 음악, 읽은 책과 만난 사람들에 대한 흥미는 수그러들지 않고 이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 역시 잦아들지 않는 듯하다.(4)
그 이후, 셀 수 없을 만큼 자주 이탈리아에 왔지만 로마에만은 들르지 않았다. 로마는 거의 27년만이었다. 27년 전이라면 한국의 군사독재 정권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던 해였다. 물론 ‘마지막’이라는 말은 지금에야 할 수 있을 뿐, 당시에는 그 암울한 나날이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다.(15)
처음 로마를 방문하고 27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땐 예상을 못했지만 두 형은 살아서 출소했고 나는 글쟁이가 되어 대학에 직장도 얻었다. 전에는 언제나 혼자서 여행을 떠났지만 15년 정도 전부터는 F라는 동행도 생겼다. 나 개인에 관해서만 말하자면 1990년대 이후로는 점점 불만 없는 일상을 살고 있다고 해도 좋을 법하다. 하지만 내 마음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평안을 찾지 못한다. 내가 이런 안정을 얻은 것은 단순한 우연과 행운의 덕이라는 의식, 과거 언젠가의 시점에 가혹하고 무참한 운명 속으로 떠밀렸더라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는 생각, 레비식으로 말하자면, 좀 더 어울리는 다른 누군가를 대신해 내가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집요하게 따라붙어 사라지지 않는다(실제 내가 아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참혹한 운명을 겪기도 했다). 무엇보다 여러 우연이 겹쳐진 결과로 나 자신은 30년가량의 세월을 이렇게 어려움 없이 살아가고 있지만 세상과 인간은 조금도 나아진 바 없다는 생각이 늦가을의 그림자처럼 하루하루 짙어지고 있는 것이다.(19)
트리에스테에도 가보고 싶다. 아니, 가봐야만 한다. 그런 생각을 했지만 이번 여정에는 그곳까지 발길을 옮기지 못한다. 그렇지만 다음이란 있을까.(95)
밝고 친절하지만 신랄한 사회비평가였고 누이나 선생님처럼 나를 대해줬던 리타, 귀족 공산주의자 베를링구에르가 체현했던 유로코뮤니즘을 향한 기대, 남과 어울리기 싫어하는 성격을 바보 같은 농담으로 숨기고자 했던 젊은 시절의 나. 모두 멀리 사라져버렸다. 인생은 이다지도 속절없이 지나가버린다.(105)
여행을 시작할 무렵부터 집요하게 뇌리에서 떠나지 않던 어두운 생각이, 다시 솟아올랐다. 가능하다면 나는 그런 생각을 긴 소설로 풀어내고 싶다. 목숨이 다하기 전에, 그 검은 것들을 토해내고 싶다. 그렇지만 단편적인 세부가 떠올랐다가 사라질 뿐이라서 어떤 소설이 될지 아직 형태도 갖추지 못했다. 아주 조금 생각해둔 것은 소설의 무대가 어제 본 저 에스텐세 성의 지하 감옥 같은 공간이라는 점이다. 여기가 어디인지, 지금이 언제인지, 내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게 된 인물이 그곳에 있다. 아마도 그 인물은 나 자신일 것이다.
오후부터 이케부쿠로의 찻집에서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철학자 T교수 일행과 연구회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서둘러 이불을 개고 있었다. 그러자 어느새 어머니가 나타나, “넌 참 얄미워.”라고 말했다. “어? 내가 얄밉다고?” 나는 엉겁결에 반문했다. “지금까지 60년의 인생에서, 스무 살 이후 40년간을 이런 식으로 살아온 내가 얄밉다고?” 격앙된 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어머니께 대들었다. 나의 부모도, 적지 않은 친구와 지인들도 심하게 상처 입고 괴로워하며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나만은 살아남았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 점이 ‘얄미운’ 걸까……. 어느새 잠에 빠져, 꿈을 꾼 것이었다.(135)
어느덧 길게도, 한순간처럼 짧게도 생각되던 그런 세월이 흘러버린 후 형들은 석방되었고, (행운이라고 말해야만 하겠지만) 나는 글쟁이가 되어 책을 내고 대학에 자리를 얻어 그럭저럭 무난한 삶을 살아오고 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상황에 대해 ‘진실은 이렇지 않아, 이럴 리 없어.’라는 감각이 떠나지 않는다. 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의 나이도 훌쩍 넘겨버린 지금, 과연 나 자신의 인생은 이대로 괜찮을 걸까. 이 생각은 언제까지나 매듭지어지지 않는다.
꿈일지언정 오랜만에 어머니와 만났다. 그 꿈은 어머니가 저 세상에서 내려와 나에게 경고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네가 쓰고자 하는 소설에는 아직 번지르르한 겉치레나 자기보신적인 속임수가 있다고, 진실은 더욱, 더욱 어두운 것이라고.(139)
3. 디아스포라의 눈으로 본 이탈리아 예술의 매력, 이탈리아의 매력
이 책에서는 그동안 저자의 전작에서 다루어진 바 있는 카라바조, 미켈란젤로, 프리모 레미, 나탈리아 긴츠부르그 외에 모딜리아니, 샤임 수틴, 잔 에뷔테른, 조르조 모란디, 주세페 펠리차 다 볼페도, 마리노 마리니, 주세페 스칼라리니, 오기와라 로쿠잔, 사에키 유조, 마리오 시로니 등의 작가와 작품이 소개된다.
각각 다른 시대에 다른 장소에서 활동했던 예술가들이지만 각자의 시대 각자의 장소에서 치열하게 고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반종교개혁의 시대 종교적으로는 정통파이면서도 예술적으로 혁명가이기 때문에 인간 존재의 본성을 가차 없이 그려낸다거나(카라바조), 파시즘의 시대에 고전성, 고요함, 조화라는 주제에 집중함으로써 반파시즘적인 가치를 추구한다든가(모란디), 2차대전 이후에도 계속 인간의 승리가 아닌 패배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든가(마리니), 예술적인 완성 이후의 완성을 추구하며 탈진해버린다든가(미켈란젤로).
또 이탈리아 곳곳을 수차례 여행하면서 겪은 여러 일상적인 에피소드들이 더해져 생생한 이탈리아 여행기로도 손색이 없다.
직경 60센티미터 정도의 원형 방패 모양으로 펼쳐진 캔버스에 묘사된 것은 참수된 메두사의 얼굴이다. 머리카락대신 뱀으로 뒤덮인 머리, 사팔뜨기 느낌마저 드는 초점 안 맞는 눈을 부릅뜨고서, 벌린 입으로는 무언가 뜻도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는 듯하다. 절단된 목에서는 선혈이 치솟는다. 말 그대로 참수의 결정적 순간을 그렸다. 급속한 출혈로 인해 이 인물의 시야는 혼탁해질 테고 의식도 곧 흐릿해지리라. 반면에 뇌는 여전히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자신에게 덮친 운명을 명료하게 인식하고 있어서, 그 시선이 관람자인 있는 나를 사로잡아버린 것이다. 이런 그림이 이전에도 존재했을까.(25)
이 그림이 그려질 무렵인 1600년은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사제였던 조르다노 부르노가 이단으로 몰려 7년의 투옥생활 끝에 로마에서 화형에 처해진 해이기도 하다. 반종교개혁의 시대, 로마라는 위험한 도시의 공기가 “기질적으로는 반역자였지만, 종교적 신조에서는 열광적인 정통파”였던 이 젊은 화가를 혁명가로 키워낸 셈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성을, 그 잔학함과 어리석음까지 놓치지 않고 가차 없이 그려낼 수 있었던 혁명가로.(43)
행동당의 젊은이들에게 모란디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로운 존재, 모든 웅변이나 과잉, 격렬함과 천박함에 대립하는 존재, 바꿔 말하면 파시스트적 신념이 전제로 하는 폭력적 사고와 정신적인 퇴락과 대립하는 그런 존재”로서 커다란 버팀목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조르조 모란디는 유서 깊은 도시 볼로냐에서 위대한 유럽 장인의 노래를 이탈리아풍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모란디는 반파시즘 사상가는 아니다. 아무래도 실천가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저 고난의 시대에, 10년을 하루처럼 병과 항아리를 계속 그려나갔던 ‘훌륭한 장인’으로서, 파시즘과는 양립할 수 없는 미적 실천을 관철해갔다.
그런데 ‘고전성’, ‘고요함’, ‘조화’, ‘엄격’과 같이 오늘날에는 폭넓게 받아들여지는 모란디의 이미지에 관해 근래 들어 비판적 주석이 덧붙여지고 있다. 모란디에 대한 이런 기존의 이미지는 화가 자신이 적극적으로 의도하고 개입함으로써 형성되었다는 지적이다. 다시 말해 ‘훌륭한 장인 모란디’라는 이미지 자체가 그의 ‘작품’이었다면, 모란디를 찬탄하는 나의 마음은 더욱 깊어진다. 모란디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과 예술운동의 동향에 무감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 ‘거리’를 두는 법을 ‘선택’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피렌체와 베네치아, 로마와 밀라노의 중간에 위치한 볼로냐의 예술가다운 ‘선택’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169)
이 대목을 읽었을 때,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기마상을 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바람이 실현되어 가까이서 보니 과연 페기 구겐하임이 썼던 그대로의 느낌이었다. 감탄이 나왔지만 그 부분만을 너무 응시해서도 안 되었다.
현대 세계의 고뇌를 진지하게 표현하고자 했던 마리니는 한편으로는 장난기 넘치는 사람이기도 했다. 진지함과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점이 마리니의 표현이 가진 온화함과 풍성함의 비밀이며, 초상 조각에서 회화 작품까지 관통하고 있는, 쉽사리 도달하기 어려운 장점이다.(193)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문학에서도 이와 비슷한 유머가 느껴진다. 파시스트에게 남편을 참혹하게 잃은 작가 나탈리아 긴츠부르그의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성격을 ‘이탈리아적’이라고 해도 좋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독일어권의 예술가들에게서는 발견하기 힘든 특징일 것이다. 내가 좋아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특징이다.(193)
미켈란젤로가 89년 생애의 고투 끝에 만든 마지막이자 미완성 작품이다. ‘미완’이라고 썼는데 분명 사실이다. 정을 한 자루 손에 쥐고 순백의 대리석 덩어리 속에 갇혀 있는 무언가를 깎아내어 바깥으로 드러내는 행위. 미켈란젤로는 몇 번이나 그 일을 시도한 끝에 결국 도중에 그만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무릇 ‘미완’이란 무슨 의미일까, 예술에서 ‘완성’이란 또 무엇일까. 이 작품과 마주하면 이런 의문이 들끓듯 일어난다.(305)
나는 미켈란젤로에 대해 오랫동안 선입견을 가져왔고 실제로 그의 명작을 여러 번 접했어도 피상적인 것을 넘어서는 감격에 휩싸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 최후의 작품을 기점으로 해서 시간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듯 작품들을 상기해보니 또 다른 풍경이 떠오르는 듯했다. 천재 미켈란젤로는 20대에 완성이라는 영역에 도달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후에 타성에 빠진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형식’에 만족해 줄곧 그 안에 머물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이 ‘완성’에서 한발 더 앞으로 나아가려고 힘겨운 싸움을 계속했고, 마지막으로 ‘미완성의 완성’을 남기고서 목숨이 다했던 것이다. 「론다니니의 피에타」, 미켈란젤로에게 이보다 더 완벽한 ‘완성’이 있었을까.(313)
“저런 사람들을 말끔히 정리해버린 것이 나치였어. 독일 국민 대다수도 ‘나치가 거리를 청소해줬다.’라며 그런 난폭한 해결책을 환영했고, 그 결과가 바로 홀로코스트로 이어졌지. 한국에서도 군사정권이 나치와 비슷한 일을 펼쳤고…….”
“그러네. 성가시긴 하지만 저런 사람들의 존재가 용인된다는 것만 봐도 이탈리아는 느슨하고 살기에 팍팍하지 않은 사회일지도 몰라.”
“그렇지, 신경 쓰이고 피곤한 것은 피할 수 없는 대가라고나 할까…….”
그날 나와 F와 사이에 오간 대화다.
카라바조의 초기작 중에는 「카드 사기꾼」과 「여자 점쟁이」라는 그림이 있다. 모두 우의화지만 현실 그 자체를 그린 그림이기도 하다. 이탈리아는 400년 이상 전에도(아마 그보다 훨씬 전에도) 지금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 후에도 로마 체류 중에 계속 이러한 종류의 ‘피곤함’이 따라다녔다. 예를 하나 들어보면 보르게세 공원 근처에 있던 고급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기분 좋게 숙소로 돌아와 아무 생각 없이 영수증을 확인했더니 주문도 하지 않고 먹은 적도 없는 샴페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마다 나와 F는 얼굴을 맞대고 “치러야 할 대가, 대가……”라고 중얼거렸다.(31)
한번은 테르미니 역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스니커즈를 신은 소매치기 같은 남자들이 세 번이나 다가와서 양해도 구하지 않고 슈트케이스에 손을 대려고 했다. 멍하게 있으면 가방을 훔쳐갈 기색이라 안절부절 못하다가 “Don’t touch me!”라고 영어로 크게 외치며 그들을 쫓았다. 그렇게 말한 후 ‘놀리 메 탄게레Noli me tangere(나를 만지지 말라)’를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한 예수와 처음으로 만난 여인이다. 예수의 무덤에 가본 마리아는 무덤 구덩이를 막아놓은 돌이 옮겨져 있고 유해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된다. “누군가가 주님의 몸을 가져가버렸다.”라며 그녀가 울고 있을 때 등 뒤에서 예수가 나타나 “마리아야”라며 이름을 불렀다. 마리아가 “선생님!”이라 하며 다가가자 예수는 “나를 만지지 말라. 나는 아직 내 아버지 곁으로 가지 못하였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다. 이 ‘놀리 메 탄게레’는 서양 회화에서 되풀이되며 나타나는 주제다.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이 역에서 만났던, 거스름돈을 챙기려던 노파가 내게 “어디로 가느냐”라고 물었던 일도 떠올랐다. ‘쿠오바디스’였던 걸까……. 이 유서 깊은 거리에서 교회를 몇 군데 돌면서 온통 종교화만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치 중독이라도 된 듯 소매치기와 사기꾼들까지 기독교 이야기 속 인물처럼 보이기 시작했다.(67)
스칼라 극장까지는 지하철을 타면 금방이다. 그런데 포르타 베네치아 역에 갔더니 입구의 철문이 모두 닫혀 있었다. 역무원에게 묻자 쌀쌀맞게 “큐조!chiuso!(닫혔음)”라고만 말하고는 휙 가버린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퇴근길 러시아워에 이유도 알리지 않은 채 지하철이 멈추다니. 트램을 타고 가기로 황급히 계획을 바꿨다. 전차를 기다리는 중년 부부에게 “지하철이 멈췄는데 왜 그렇죠?”라고 물어도 “이탈리아니까……”라며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몇 분 늦게 스칼라 극장에 도착했다. 이미 공연이 시작되어 원래 예약해둔 자리에 앉지 못했다. 그러나 안내원이 막간 휴식 때 발코니 좌석으로 안내해주었다. 나름대로 흥미롭고 쾌적했다. 이런 식의 융통성도 이탈리아니까 가능한 것이 아닐까?(201)
목차
프롤로그
1장 로마 1
2장 로마 2
3장 페라라
4장 볼로냐·밀라노
5장 토리노 1
6장 토리노 2
7장 밀라노
에필로그
옮긴이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