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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누추했던 사랑, 마침내 환히 빛나다!
타인에게 건네는 천국의 열쇠 같은 이야기
이효석문학상·올해의 소설상·한무숙문학상 수상작가 정지아 신작 소설집
1990년 대학 재학시절에 빨치산 부모님의 이야기를 쓴 《빨치산의 딸》(전3권)로 문단 안팎을 충격에 빠드린 후, 오랜 침묵기를 깨고 2004년 소설집 《행복》, 2008년 소설집 《봄빛》을 출간. 발표하는 작품마다 깊이 있는 문학성을 성취하며 문단의 주목과 기대를 받아온 작가 정지아의 신작 소설집 《숲의 대화》가 출간되었다.
이번 작품집은 작가가 5년 만에 펴내는 세 번째 소설집으로, 이상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봄날 오후, 과부 셋>과 <목욕 가는 날>, 일본에 번역된 <핏줄>을 비롯하여 평단의 호평을 받았던 단편 11편이 실려 있다.
《빨치산의 딸》에서 보여준 역사적 모순에서 비롯된 개인적 삶의 희생과 질곡이라는 무거운 주제의식에서 나아가, 《행복》 《봄빛》 두 권의 소설집을 통해 “웅숭깊은 세계를 지향하며 화해와 승화의 길”(이효석문학상 심사평)을 그려온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 더욱 넓고 깊어진 품으로 주변부 인생들이 만들어내는 작은 우주들을 끌어안고 있다.
오랜 누이처럼 이름 없는 것들, 버려지고 상처 입은 것들을 보듬어 고통조차도 따스한 유머로 감싸 안으며, 서로 다르지만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연대와 공감의 공동체를 그려낸다. 하루하루 간신히 살아가는 인간들이 견디고, 받아들이고, 끝내 살아내는 오늘 또 하루가 뼛속 저릿한 감동을 선사한다.
“너는 대체 무슨 맛으로 살았니?”
어떤 생이든 한 우주만큼의 무게가 있다!
소설가 정지아의 붓끝은 쇠락과 소멸 사이에서 흔들리는 존재들, ‘겨우 살아가는 삶’조차 눈물겹게 소중한 존재들을 향한다. 그러나 지식인의 위치에서 낮은 곳을 향하는 연민의 시선에 머물지 않고, 그들이 사는 지상으로 내려가 반푼이 자식을 세상에서 제일 귀애하는 에미가 되고, 노모와 함께 늙어가는 중년의 딸이 되고, 팔순 노인네들과 아웅다웅 티격태격하는 친구가 된다. 그러면서 호들갑스럽지 않고 오그라들지 않는 균형 잡힌 시각으로 묻는다. “너는 대체 무슨 맛으로 살았니?”(<봄날 오후, 과부 셋> 중에서) 하고.
이 소설집은 바로 그처럼 비루하고 누추해 보이는 인생들이 말하는 ‘인생의 맛’에 대한 이야기랄 수 있다. 작가는 밑바닥 인생, 치매 노인, 중증장애인처럼 더 이상 떨어질 것 없는 나락의 인생들에서 사라지지 않는 기억의 온기를 통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건져 올리며, 끝나지 않는 희망의 불씨를 발견해 낸다. 그러함으로써 하나의 인간은 하나의 우주이며, 어떤 생이든 한 우주만큼의 무게가 있음을 증명한다. 그래서 정지아의 소설은 늙은 것, 사라져가는 것, 겨우 견디며 존재하는 것들의 이야기를 쓰면서도 삶에 찌들거나 음울하지 않으며 오히려 존재의 고귀함을 역설하며 삶의 의미를 복원시킨다.
“너는 대체 무슨 맛으로 살았니?”
돈도 없고 남편도 보잘 것 없고 직업도 없고 있는 거라곤 딸랑 아들 하나뿐인 사다꼬가 평생 누구에게도 기죽지 않고 당당한 이유를 그녀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에이꼬야 자식 때문에 살았을 거고, 하루꼬는 남편 때문에 살았을 거고, 글쎄, 나는 뭣 땜에 살았나…….”
―<봄날 오후, 과부 셋> 중에서
욕망도 없이 살아 견디는 인간들
그들이 만들어내는 뼛속 저릿한 아름다움
《숲의 대화》는 다 늙은 영감 운학이 아내가 묻힌 잣나무숲에서 60년 전에 죽은 동갑내기 도련님을 만나는 이야기다. 자신의 아이를 뱃속에 품은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보내고, 빨치산의 행렬에 다시 가담하려던 도련님은 매복에 걸려 죽음을 맞이했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한 운학은 평생 아내를 줄기차게 짝사랑하며 살아왔다. 젊은 도련님과 늙은 운학의 마치 몽유록 같은 대화를 통해 작가는 서로의 다름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완전히 ‘존중’할 수는 있음을, 실은 세 사람이 생사의 갈림길을 뛰어넘어 ‘함께’ 살아왔음을 일깨운다. 육신은 죽었지만 기억만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산 자의 마음속에 평생 함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사랑의 집착이 아니라 끊어낼 수 없는 운명의 긍정이고, 지나가 버렸지만 결코 지울 수 없는 역사의 흔적이기도 했다. 또 한 편의 아름다운 ‘지리산 타령’(문학평론가 김윤식이 <세월>을 두고 한 말)이다.
고달픈 시상 품을라 말고 버리면 되는디, 니는 끝내 버리질… 못했니라.
버리다니 무엇을? 종의 신분 물려준 부모를? 종놈에게 천형처럼 따라붙은 가난을? 그는 무엇 하나 버릴 생각 하지 못하고, 그것 품고 갈 생각만 했다. 도련님 아이 품은 여자도, 도련님 마음에 품은 여자도, 도련님과 여자의 아이도, 그는 품고 갈 생각, 그것 외엔 하지 않았다.
버릴 것이 나는… 한나도 없었어라.
― 《숲의 대화》 중에서
성격은 서로 달라도 평생 친자매나 다름없이 의지하고 지내온 세 과부 할머니 에이꼬, 하루꼬, 사다꼬의 봄날 나들이 이야기 <봄날 오후, 과부 셋>. 80이 넘고 치매에 걸렸어도 질투하고 사랑하는 것은 소녀 적이랑 똑같다. “나 없을 때 또 비밀 이야기 하면 죽어!” 아직도 털어놓지 못한 수많은 비밀들이 인생의 황혼을 바라보는 그녀들을 신비롭고 매혹적인 존재로 만들어준다. 정지아의 소설은 이렇듯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보여주느라 독자의 가슴을 여미게 하다가도, 불현듯 따스한 유머를 잃지 않고 고난 속에서도 더 크게 웃을 줄 아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이는 고통을 반드시 극복해야만 할 장애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나 죽음조차 삶의 어엿한 일부로 끌어안는 작가의 따스한 시선에서 비롯한다. 2009 이상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영어권과 이태리어어로 번역되었다.
<천국의 열쇠>는 중증장애인인 ‘그’가 혼자만의 천국인 헛개나무 과수원에 가련한 베트남 여인 호아를 숨겨주는 이야기다. 사지육신 어느 하나 원하는 방향으로 가누지 못하지만, 그에게는 평생 온몸을 바쳐 일궈낸 3000평짜리 헛개나무 과수원이 있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지옥 같은 환경 속에 살아가면서도 그는 자기 힘으로 ‘천국의 열쇠’를 창조해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름다움은 ‘나만의 천국’이었던 이 헛개나무숲의 철조망 문 열쇠를, 남편에게 언제나처럼 혹독하게 구타당하고 또다시 아기에게 젖을 물리기 위해 집이라 불리는 지옥 속으로 돌아가야 하는 ‘호아’에게 건네주는 장면에서 완성된다. ‘나만의 천국’을 배타적으로 소유하지 않고, 백척간두에 서 있는 또 다른 타인과 함께 나눔으로써 ‘우리들의 천국’을 공유하는 것이다.
“가시내야, 니는 엄마가 죽었능가 살았능가 궁금하도 않냐?” 생색내기 좋아하는 언니의 전화 한 통에 불려와 중년이 된 ‘나’가 엄마와 언니와 함께 목욕 가는 이야기 <목욕 가는 날>. 엄마와 언니가 마음에 없는 악다구니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헤아리는 모습을 보면서, 말없이 엄마 마음을 헤아려 왔다고 생각했던 나는 두 사람이 야속하기도 하고 스스로 한심하기도 하다. 귀에 착착 감기는 전라도 말로 잔잔한 일상을 정감 넘치게 묘사한 이 작품은 평범한 하루를 빛나는 순간으로 바꾸어놓는 정지아식 리얼리티의 진경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2011 이상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브라보, 럭키 라이프>는 천금 같은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되자 무려 23년간 변함없는 사랑으로 아들의 재활을 위해 삶을 바치는 노부부의 이야기다. 의사도 포기한 ‘경우’는 15년 전 기적처럼 눈을 떴고, 23년 만에 한쪽 팔을 움직였다. 이미 재산이 바닥난 지는 오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아직 죽지 않은 아들’에 대한 사랑은 눈물겹다. 정지아의 시선은 이렇듯 겨우 존재하는 사람들의 소박하고도 절박한 희망을 향해 빛나고 있다. 그 작고 여린 구원의 빛을 따라가는 과정이 바로 정지아가 떠나는 이야기의 여정이고, 작가로서 피할 수 없는 구도(求道)의 행군이다.
한산 이씨 27대 종손을 외국인 여자와 결혼시킨 집안의 이야기 <핏줄>. 마흔 너머까지 장가를 못 가는 아들을 조선족, 태국, 필리핀 여자와 차례로 결혼을 시켰지만 돈만 밝히거나 멍청하거나 인물값을 하거나 해서 다 돈을 쥐어주고 쫒아냈다. 결국 김센이 아예 베트남까지 가서 직접 고른 며느리 쑤언. 아니나 다를까 야무지고 살림 잘해 나무랄 데 없지만 까무잡잡한 얼굴을 보고 있자면 울화통이 터지는 김센이다. 에미를 쏙 빼닮아 새까맣고 오종종한 갓난아이를 받아든 김센의 표정이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엉거주춤하다. 오늘날의 농촌 현실을 희화적으로 묘사한 이 작품은 어쩔 수 없이 다문화사회가 되어가는 난감한 현실을 피부에 와 닿게 그려냈다. 일본에 번역되었다.
<혜화동 로터리>는 내일을 기약하기 힘든 세 노인의 반세기 우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만석꾼의 자식으로 빨치산이 된 ‘최’, 미군 켈로(Korea Liaison Office) 부대원 ‘박’, 프랑스 유학파 지식인이지만 반세기 넘게 박과 최의 술시중을 들며 그들의 온갖 넋두리와 회한을 받아주며 사는 ‘김’. 삼류 빨치산이니, 삼류 켈로니 하며 여성스럽고 얌체 같은 서울말로 만담처럼 콩닥콩닥 주고받는 최와 박의 대화는 단순한 언어유희가 아니라 지나온 모든 세월의 뜨거운 증명이다. 그들의 가족은 대를 이어 서로를 보살피는 인연이었고,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서로의 존재는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역사의 아픔을, 잊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한 채 묵묵히 끌어안고 살아가는 세 노인의 우정을 통해, 계급적 연대와 역사적 연대를 동시에 보여주는 작품이다.
“왜 이래? 토벌대 벌벌 떨던 남도부 부대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몸이야.”
“흥, 그러니 삼류지. 오죽 못났으면 살아남았겠니? 좌나 우나 잘난 놈들은 다 먼저 갔어. 몰라 물어?”
“그러는 너는 잘나 살아남았니?”
“누가 뭐래니? 나도 삼류지. 같은 삼류니까 평생 어울려 놀았지.”
―<혜화동 로터리> 중에서
<절정>은 갑자기 사라진 한 노숙자의 이야기를 통해 끝없이 포기하고, 절망하고, 추락한 사람들이 느끼는 ‘희망에 대한 공포’를 노래한다. 간암이라며 안녕을 고한 김씨의 편지를 받고 알코올 중독에서 간신히 회복되어 ‘좀 더 나은 삶’을 향해 발버둥 쳐온 ‘그’는 충격으로 할 말을 잃고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그때 들려오는 고시원 옆방의 숨죽인 정사 소리는 힘겨운 노숙생활 동안 ‘잃어버린 무언가’를 깨닫게 해준다. 삶의 ‘나락’에서 삶의 ‘절정’을 꿈꾸는 이들의 고통스러운 희망은 ‘공포’이기 전에 인간이 인간으로서 잃지 말아야 할 ‘존엄’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정지아의 소설 속 인물들은 이렇듯 절망 속에서도 뜻밖에 간절한 소통의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끝없이 땅속 깊은 곳에 묻힌 암반을 캐는 남자의 이야기 <인생 한 줌>은 한평생 몸 바친 일이 허망한 일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그 인생조차 가치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글을 쓰기 위해 시골로 내려간 전직 기자의 전원생활을 그린 이야기 <즐거운 나의 집>은 귀농을 결심한 도시인이 농촌 사회에 적응하려는 과정에서 지역 주민들의 이해관계와 사사건건 부딪히는 이야기를 감칠맛 나게 그려냈다.
전직 고위층 간부의 아내 김 여사가 입주 가정부와 벌이는 팽팽한 자존심의 대결을 그린 <나의 아름다운 날들>은 정지아의 작품 중에 예외적으로 풍자적인 작품으로, 정지아 소설의 소재와 스타일이 점점 다양해지고 확장되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지아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1%의 삶만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99%의 삶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그게 문학이 아닐까요?” 이 소설집은 99%의 삶을 비추는 스포트라이트다. 99%의 사람들은 신분이나 계급에 상관없이, 견딜 수 없는 아픔을 천형인 양, 운명인 양, 차라리 습관인 양 견디고 살아간다. 그 ‘평범한 비범함’이야말로 이 참혹한 세상을 끝내 포기하지 않고 건너가게 만드는, 우리가 매일매일 마주치면서도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일상의 기적이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힘없고 빽 없는 사람들이 미운 구석, 다른 구석 티격태격 보듬고 살아가며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을 넘어선 ‘연대의 진풍경’이야말로 정지아의 문학이 가슴 먹먹한 울림과 묵직한 감동을 주는 이유다.
타인에게 건네는 천국의 열쇠 같은 이야기
이효석문학상·올해의 소설상·한무숙문학상 수상작가 정지아 신작 소설집
1990년 대학 재학시절에 빨치산 부모님의 이야기를 쓴 《빨치산의 딸》(전3권)로 문단 안팎을 충격에 빠드린 후, 오랜 침묵기를 깨고 2004년 소설집 《행복》, 2008년 소설집 《봄빛》을 출간. 발표하는 작품마다 깊이 있는 문학성을 성취하며 문단의 주목과 기대를 받아온 작가 정지아의 신작 소설집 《숲의 대화》가 출간되었다.
이번 작품집은 작가가 5년 만에 펴내는 세 번째 소설집으로, 이상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봄날 오후, 과부 셋>과 <목욕 가는 날>, 일본에 번역된 <핏줄>을 비롯하여 평단의 호평을 받았던 단편 11편이 실려 있다.
《빨치산의 딸》에서 보여준 역사적 모순에서 비롯된 개인적 삶의 희생과 질곡이라는 무거운 주제의식에서 나아가, 《행복》 《봄빛》 두 권의 소설집을 통해 “웅숭깊은 세계를 지향하며 화해와 승화의 길”(이효석문학상 심사평)을 그려온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 더욱 넓고 깊어진 품으로 주변부 인생들이 만들어내는 작은 우주들을 끌어안고 있다.
오랜 누이처럼 이름 없는 것들, 버려지고 상처 입은 것들을 보듬어 고통조차도 따스한 유머로 감싸 안으며, 서로 다르지만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연대와 공감의 공동체를 그려낸다. 하루하루 간신히 살아가는 인간들이 견디고, 받아들이고, 끝내 살아내는 오늘 또 하루가 뼛속 저릿한 감동을 선사한다.
“너는 대체 무슨 맛으로 살았니?”
어떤 생이든 한 우주만큼의 무게가 있다!
소설가 정지아의 붓끝은 쇠락과 소멸 사이에서 흔들리는 존재들, ‘겨우 살아가는 삶’조차 눈물겹게 소중한 존재들을 향한다. 그러나 지식인의 위치에서 낮은 곳을 향하는 연민의 시선에 머물지 않고, 그들이 사는 지상으로 내려가 반푼이 자식을 세상에서 제일 귀애하는 에미가 되고, 노모와 함께 늙어가는 중년의 딸이 되고, 팔순 노인네들과 아웅다웅 티격태격하는 친구가 된다. 그러면서 호들갑스럽지 않고 오그라들지 않는 균형 잡힌 시각으로 묻는다. “너는 대체 무슨 맛으로 살았니?”(<봄날 오후, 과부 셋> 중에서) 하고.
이 소설집은 바로 그처럼 비루하고 누추해 보이는 인생들이 말하는 ‘인생의 맛’에 대한 이야기랄 수 있다. 작가는 밑바닥 인생, 치매 노인, 중증장애인처럼 더 이상 떨어질 것 없는 나락의 인생들에서 사라지지 않는 기억의 온기를 통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건져 올리며, 끝나지 않는 희망의 불씨를 발견해 낸다. 그러함으로써 하나의 인간은 하나의 우주이며, 어떤 생이든 한 우주만큼의 무게가 있음을 증명한다. 그래서 정지아의 소설은 늙은 것, 사라져가는 것, 겨우 견디며 존재하는 것들의 이야기를 쓰면서도 삶에 찌들거나 음울하지 않으며 오히려 존재의 고귀함을 역설하며 삶의 의미를 복원시킨다.
“너는 대체 무슨 맛으로 살았니?”
돈도 없고 남편도 보잘 것 없고 직업도 없고 있는 거라곤 딸랑 아들 하나뿐인 사다꼬가 평생 누구에게도 기죽지 않고 당당한 이유를 그녀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에이꼬야 자식 때문에 살았을 거고, 하루꼬는 남편 때문에 살았을 거고, 글쎄, 나는 뭣 땜에 살았나…….”
―<봄날 오후, 과부 셋> 중에서
욕망도 없이 살아 견디는 인간들
그들이 만들어내는 뼛속 저릿한 아름다움
《숲의 대화》는 다 늙은 영감 운학이 아내가 묻힌 잣나무숲에서 60년 전에 죽은 동갑내기 도련님을 만나는 이야기다. 자신의 아이를 뱃속에 품은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보내고, 빨치산의 행렬에 다시 가담하려던 도련님은 매복에 걸려 죽음을 맞이했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한 운학은 평생 아내를 줄기차게 짝사랑하며 살아왔다. 젊은 도련님과 늙은 운학의 마치 몽유록 같은 대화를 통해 작가는 서로의 다름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완전히 ‘존중’할 수는 있음을, 실은 세 사람이 생사의 갈림길을 뛰어넘어 ‘함께’ 살아왔음을 일깨운다. 육신은 죽었지만 기억만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산 자의 마음속에 평생 함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사랑의 집착이 아니라 끊어낼 수 없는 운명의 긍정이고, 지나가 버렸지만 결코 지울 수 없는 역사의 흔적이기도 했다. 또 한 편의 아름다운 ‘지리산 타령’(문학평론가 김윤식이 <세월>을 두고 한 말)이다.
고달픈 시상 품을라 말고 버리면 되는디, 니는 끝내 버리질… 못했니라.
버리다니 무엇을? 종의 신분 물려준 부모를? 종놈에게 천형처럼 따라붙은 가난을? 그는 무엇 하나 버릴 생각 하지 못하고, 그것 품고 갈 생각만 했다. 도련님 아이 품은 여자도, 도련님 마음에 품은 여자도, 도련님과 여자의 아이도, 그는 품고 갈 생각, 그것 외엔 하지 않았다.
버릴 것이 나는… 한나도 없었어라.
― 《숲의 대화》 중에서
성격은 서로 달라도 평생 친자매나 다름없이 의지하고 지내온 세 과부 할머니 에이꼬, 하루꼬, 사다꼬의 봄날 나들이 이야기 <봄날 오후, 과부 셋>. 80이 넘고 치매에 걸렸어도 질투하고 사랑하는 것은 소녀 적이랑 똑같다. “나 없을 때 또 비밀 이야기 하면 죽어!” 아직도 털어놓지 못한 수많은 비밀들이 인생의 황혼을 바라보는 그녀들을 신비롭고 매혹적인 존재로 만들어준다. 정지아의 소설은 이렇듯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보여주느라 독자의 가슴을 여미게 하다가도, 불현듯 따스한 유머를 잃지 않고 고난 속에서도 더 크게 웃을 줄 아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이는 고통을 반드시 극복해야만 할 장애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나 죽음조차 삶의 어엿한 일부로 끌어안는 작가의 따스한 시선에서 비롯한다. 2009 이상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영어권과 이태리어어로 번역되었다.
<천국의 열쇠>는 중증장애인인 ‘그’가 혼자만의 천국인 헛개나무 과수원에 가련한 베트남 여인 호아를 숨겨주는 이야기다. 사지육신 어느 하나 원하는 방향으로 가누지 못하지만, 그에게는 평생 온몸을 바쳐 일궈낸 3000평짜리 헛개나무 과수원이 있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지옥 같은 환경 속에 살아가면서도 그는 자기 힘으로 ‘천국의 열쇠’를 창조해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름다움은 ‘나만의 천국’이었던 이 헛개나무숲의 철조망 문 열쇠를, 남편에게 언제나처럼 혹독하게 구타당하고 또다시 아기에게 젖을 물리기 위해 집이라 불리는 지옥 속으로 돌아가야 하는 ‘호아’에게 건네주는 장면에서 완성된다. ‘나만의 천국’을 배타적으로 소유하지 않고, 백척간두에 서 있는 또 다른 타인과 함께 나눔으로써 ‘우리들의 천국’을 공유하는 것이다.
“가시내야, 니는 엄마가 죽었능가 살았능가 궁금하도 않냐?” 생색내기 좋아하는 언니의 전화 한 통에 불려와 중년이 된 ‘나’가 엄마와 언니와 함께 목욕 가는 이야기 <목욕 가는 날>. 엄마와 언니가 마음에 없는 악다구니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헤아리는 모습을 보면서, 말없이 엄마 마음을 헤아려 왔다고 생각했던 나는 두 사람이 야속하기도 하고 스스로 한심하기도 하다. 귀에 착착 감기는 전라도 말로 잔잔한 일상을 정감 넘치게 묘사한 이 작품은 평범한 하루를 빛나는 순간으로 바꾸어놓는 정지아식 리얼리티의 진경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2011 이상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브라보, 럭키 라이프>는 천금 같은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되자 무려 23년간 변함없는 사랑으로 아들의 재활을 위해 삶을 바치는 노부부의 이야기다. 의사도 포기한 ‘경우’는 15년 전 기적처럼 눈을 떴고, 23년 만에 한쪽 팔을 움직였다. 이미 재산이 바닥난 지는 오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아직 죽지 않은 아들’에 대한 사랑은 눈물겹다. 정지아의 시선은 이렇듯 겨우 존재하는 사람들의 소박하고도 절박한 희망을 향해 빛나고 있다. 그 작고 여린 구원의 빛을 따라가는 과정이 바로 정지아가 떠나는 이야기의 여정이고, 작가로서 피할 수 없는 구도(求道)의 행군이다.
한산 이씨 27대 종손을 외국인 여자와 결혼시킨 집안의 이야기 <핏줄>. 마흔 너머까지 장가를 못 가는 아들을 조선족, 태국, 필리핀 여자와 차례로 결혼을 시켰지만 돈만 밝히거나 멍청하거나 인물값을 하거나 해서 다 돈을 쥐어주고 쫒아냈다. 결국 김센이 아예 베트남까지 가서 직접 고른 며느리 쑤언. 아니나 다를까 야무지고 살림 잘해 나무랄 데 없지만 까무잡잡한 얼굴을 보고 있자면 울화통이 터지는 김센이다. 에미를 쏙 빼닮아 새까맣고 오종종한 갓난아이를 받아든 김센의 표정이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엉거주춤하다. 오늘날의 농촌 현실을 희화적으로 묘사한 이 작품은 어쩔 수 없이 다문화사회가 되어가는 난감한 현실을 피부에 와 닿게 그려냈다. 일본에 번역되었다.
<혜화동 로터리>는 내일을 기약하기 힘든 세 노인의 반세기 우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만석꾼의 자식으로 빨치산이 된 ‘최’, 미군 켈로(Korea Liaison Office) 부대원 ‘박’, 프랑스 유학파 지식인이지만 반세기 넘게 박과 최의 술시중을 들며 그들의 온갖 넋두리와 회한을 받아주며 사는 ‘김’. 삼류 빨치산이니, 삼류 켈로니 하며 여성스럽고 얌체 같은 서울말로 만담처럼 콩닥콩닥 주고받는 최와 박의 대화는 단순한 언어유희가 아니라 지나온 모든 세월의 뜨거운 증명이다. 그들의 가족은 대를 이어 서로를 보살피는 인연이었고,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서로의 존재는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역사의 아픔을, 잊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한 채 묵묵히 끌어안고 살아가는 세 노인의 우정을 통해, 계급적 연대와 역사적 연대를 동시에 보여주는 작품이다.
“왜 이래? 토벌대 벌벌 떨던 남도부 부대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몸이야.”
“흥, 그러니 삼류지. 오죽 못났으면 살아남았겠니? 좌나 우나 잘난 놈들은 다 먼저 갔어. 몰라 물어?”
“그러는 너는 잘나 살아남았니?”
“누가 뭐래니? 나도 삼류지. 같은 삼류니까 평생 어울려 놀았지.”
―<혜화동 로터리> 중에서
<절정>은 갑자기 사라진 한 노숙자의 이야기를 통해 끝없이 포기하고, 절망하고, 추락한 사람들이 느끼는 ‘희망에 대한 공포’를 노래한다. 간암이라며 안녕을 고한 김씨의 편지를 받고 알코올 중독에서 간신히 회복되어 ‘좀 더 나은 삶’을 향해 발버둥 쳐온 ‘그’는 충격으로 할 말을 잃고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그때 들려오는 고시원 옆방의 숨죽인 정사 소리는 힘겨운 노숙생활 동안 ‘잃어버린 무언가’를 깨닫게 해준다. 삶의 ‘나락’에서 삶의 ‘절정’을 꿈꾸는 이들의 고통스러운 희망은 ‘공포’이기 전에 인간이 인간으로서 잃지 말아야 할 ‘존엄’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정지아의 소설 속 인물들은 이렇듯 절망 속에서도 뜻밖에 간절한 소통의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끝없이 땅속 깊은 곳에 묻힌 암반을 캐는 남자의 이야기 <인생 한 줌>은 한평생 몸 바친 일이 허망한 일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그 인생조차 가치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글을 쓰기 위해 시골로 내려간 전직 기자의 전원생활을 그린 이야기 <즐거운 나의 집>은 귀농을 결심한 도시인이 농촌 사회에 적응하려는 과정에서 지역 주민들의 이해관계와 사사건건 부딪히는 이야기를 감칠맛 나게 그려냈다.
전직 고위층 간부의 아내 김 여사가 입주 가정부와 벌이는 팽팽한 자존심의 대결을 그린 <나의 아름다운 날들>은 정지아의 작품 중에 예외적으로 풍자적인 작품으로, 정지아 소설의 소재와 스타일이 점점 다양해지고 확장되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지아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1%의 삶만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99%의 삶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그게 문학이 아닐까요?” 이 소설집은 99%의 삶을 비추는 스포트라이트다. 99%의 사람들은 신분이나 계급에 상관없이, 견딜 수 없는 아픔을 천형인 양, 운명인 양, 차라리 습관인 양 견디고 살아간다. 그 ‘평범한 비범함’이야말로 이 참혹한 세상을 끝내 포기하지 않고 건너가게 만드는, 우리가 매일매일 마주치면서도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일상의 기적이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힘없고 빽 없는 사람들이 미운 구석, 다른 구석 티격태격 보듬고 살아가며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을 넘어선 ‘연대의 진풍경’이야말로 정지아의 문학이 가슴 먹먹한 울림과 묵직한 감동을 주는 이유다.
목차
숲의 대화 | 봄날 오후, 과부 셋 | 천국의 열쇠 | 목욕 가는 날 | 브라보, 럭키 라이프 | 핏줄 | 혜화동 로터리 | 인생 한 줌 | 즐거운 나의 집 | 나의 아름다운 날들 | 절정 | 작품해설 |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