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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그때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바로 ‘흩어져 있는 것을 한데 모으기’,
즉 생각하기다.”
고요한 몰두를 통해 얻어낸 소설가 이승우의 생각들
작가 인생 43년, 소설쓰기로 인생에 복무하는 작가 이승우. 그의 작품세계를 대표하는 두 개의 기둥인 ‘종교적 실존’과 ‘문학적 실존’ 위에 지은 집 같은 산문집을 펴낸다. 『고요한 읽기』는 작가가 제안하는 하나의 읽기 방식이자, 그 방식이 불러일으킨 생각을 정리한 문학에세이, 그간의 소설 작업에 대해 스스로 붙인 “주관적 주해” 혹은 창작론, ‘쓰기-읽기-살기’가 빚은 한 작가의 초상이라 할 수 있는 책이다. 왜 쓰는가, 어떻게 문학을 할 것인가에 대해 구도자처럼 몰두해온 그가 선택했던 이 방식은, 다만 문학작품에 국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없이 낯설게 느껴지는 ‘나-타인-세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인 행위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고요히’ 읽는다는 것은 어떤 걸까. 그저 조용한 데서 혼자 읽는다, 가 아니라 부러 조용한 곳에서 혼자이기를 자처하여 몰두해들어가는 읽기를 말하는 것이다. 깊이 가라앉아 자기 안의 빛과 어둠을 탐색해가는 읽기. ‘감추어진 동굴’(「서문」)에 파편으로 흩어져 숨은 생각들을 길어올리는 읽기. 그것이 작가 이승우가 말하는 ‘고요한 읽기’다.
요컨대 자기 안으로 침잠하는 구심력과 나를 구성하는 타자/세계를 사유하는 원심력이 동시에 작용하는 것. 작가의 ‘고요한 읽기’의 오랜 동반자 보르헤스, 밀란 쿤데라, 카프카, 마르케스, 헤르만 헤세, 이청준부터 레비나스, 사르트르, 벤야민, 시몬 베유, 그리고 탈무드와 성경까지 문학과 철학, 종교를 넘나드는 ‘고요한 읽기의 목록’은 그저 머무는 존재가 아닌, 추구하는 존재로서 살고자 해온 작가의 오랜 물음들에 공명하게 한다.
책을 통해 ‘나’를 읽을 때, 나는 ‘나’를 통해 타인과 세상을 같이 읽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타인과 세상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통해 읽는 사람과 세상만이 진실합니다. ‘나’를 배제한 어떤 사람과 세상에 대한 이해도 진짜가 아닙니다. 자기에 대한 의심과 돌아봄이 없는 이해만큼 위험한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읽기가 중요합니다. _「서문-감추어진 동굴」에서
나는 나에게서 가장 멀리 있다. 나는 나의 ‘세상의 끝’이다.
작가는 긴 호흡의 산문 열두 편 가운데 첫번째 글에서 ‘끝’을 먼저 짚는다. “세상과 상관없이. 말하자면 실존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끝. 바로 ‘나’ 자신. “나는 나의 ‘세상의 끝’이다. 나는 나에게서 가장 멀고, 내가 가장 잘 모르고, 내가 가장 만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이다. 나는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다.”(「세상의 끝」) 작가는 2019년 출간작 『캉탕』의 세 인물을 예로 든다. ‘세상의 끝’에 이르러 “모든 것을 드러내놓기를 요구받는” 인물들. ‘나’로부터 온, 회피할 수 없는 요구들. 작가는 그들로 하여금 회고록이나 일기의 형태로 고백하게 하였다. “모든 글은 일종의 고백이고, 모든 고백은 누군가에게 하는 것이고, 그 누군가는 시간/신, 즉 ‘나’이다.” 함께 언급되는 『데미안』의 싱클레어와 보르헤르트의 432번 죄수(「민들레」), 오이디푸스라고 상황이 다르지 않다.
이렇듯 문학작품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추구와 좌절, 참회와 구원의 문제를 이승우 작가는 파스칼의 말을 빌려 인간이 위대함을 획득하는 과정이라 말한다. “인간은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그는 비참하다, 실제로 그렇기 때문에. 그러나 그는 진정 위대하다,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팡세』) ‘세상의 끝’에서 이루어지는 고백. 끝 다음의 시작은 작품 속 인물은 물론 그것을 쓴 작가와 읽는 사람 모두를 ‘개종한 사람’과 같게 만들 수 있다. 그것이 가능함을 알게 되는 일, 기도와도 같은 고백을 읽는 일은 ‘작가-작품(속 인물)–독자’의 내면에 영향을 미친다. “출발하기 위해 도착해야 하고 도착하기 위해 출발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므로 다시 출발할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일 때만, 다른 사람으로서만 새로 출발할 수 있다.” 문학이 그것을 돕는다.
영감은 작품을 시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게 하는 것이다.
스물둘에 등단해 40여 년간 30여 권의 소설을 묵묵히 펴낸 작가. 독자에게 ‘믿고 읽는 작가’가 된 그에게 작가는 어디에서 태어나는지 묻는다면, 창작의 비결이나 영감의 원천을 묻는다면 무어라 대답할까. 우선은 흔히 생각하는 ‘영감’의 방향을 뒤집는 답이 돌아올 것이다. 영감이란 위에서 아래로, 마치 계시처럼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내면에서, 노력과 인내를 동력삼아 불러일으켜지는 것이라고.
영감에 대한 미신에서 벗어날 것. 영감을 부정하지도 말고 숭배하지도 말 것. 왜곡이나 악용은 더욱 삼갈 것. 모독하지 말 것. 다만 필사적으로 ‘꿈꿀’ 것. 영감 같은 것은 있지 않다는 듯, 그러니 바라지 않는다는 듯 필사적으로 애쓰고, 애쓰면서 기다릴 것. 기다리면서 초대할 것. 애씀이 초대의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 것. 그조차 알지 말 것. 행여라도 영감이 자신의 노력에 대한 당연한 보상이라고 생각하지 말 것. 은총일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것.
(…)
위대한 작가들의 이름은 그 작가들의 책을 읽은 사람들, 읽고 쓴 사람들, 즉 그 작가들의 꿈에서 태어난 사람들에 의해 유전된다. 사라지지 않는다. 불멸한다. _「작가라는 환영」에서
창작의 ‘실마리’가 아닌 ‘매듭’으로서의 영감.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하나의 삶의 태도로서 쓰는 이는 물론 읽는 이 또한 각성하게 한다. 특별한 문학적 재능이 작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강렬하고 위대한 독서 경험의 영향 아래서 힘들게 빚어져 작가가 되는 것”이라는 성찰적 조언도 마찬가지다. ‘위대한 책’, “보르헤스의 정의를 따라 말하자면 성령이 쓴 책”은 “신의 입김 없이 완성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신은 작가의 열정과 노고가 없는 곳에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의심 속에서도 믿는 일
부끄러움 속에서도 쓰는 일
그의 모든 건 고요한 읽기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번 책에서 작가 이승우를 사로잡는 근원적 질문 혹은 그의 글쓰기를 추동하는 문제의식을 충분히 음미할 수 있는 것은 독자로서 무척 반가운 일이다. 향수(鄕愁)와 추구, 무지와 미지, 영원에 속한 것과 속하지 않은 것, 꿈, 말할 수 없고 말해서도 안 되는 것, 비범함에 대한 유혹 등 수록된 편편의 제목만 훑어도 짐작이 갈 것이다. 그 밖에도 사랑과 믿음, 삶과 죽음, 작품과 독자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오랜 생각들. “향수는 있었으나 있지 않은 것을 그리워하지만 추구는 있어본 적이 없는 것을 그리워한다.” “죽음은 게으르고, 동시에 즉흥적이다. 요컨대 종잡을 수 없다. 죽음은 올 때까지 오지 않는다.” “부재는 획득 실패로 인한 것이 아니라 획득한 것의 상실로 인해 생긴다.” “맹신은 믿음의 최상급이 아니라 믿음의 반대말이다.” “독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있는 이야기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다시 짓는 것이다. 잠든 이야기를 깨우고 끝난 이야기를 살리는 것이다” 등등 이승우 작가 특유의 밀도 높고 깊은 사유가 배어든 문장들이 그가 사랑하는 책들 사이사이 수놓여 있다. ‘무엇을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 고민하는 작가 이승우를 읽어내는, 겹겹의 읽기 경험이 가능하다.
한편 “인생의 고비에서 누군가를, 어떤 일이나 기회, 책, 문장을 만나지 않았다면 삶이 얼마나 더 엉망이 되었을까”라는 물음은 작가만의 것이 아니리라. 유한한 존재로서 삶이라는 이름의 변덕스러운 시간 위에 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고요한 읽기’라는, 이제는 점점 더 희귀해지는 그 행위가 그리워지고 절박해진다.
인간은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고,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질문하고 추구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 눈에는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아직 어떤 사람들 눈에 보이는 문학의 광채는 거기서 말미암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_「작가라는 환영」에서
즉 생각하기다.”
고요한 몰두를 통해 얻어낸 소설가 이승우의 생각들
작가 인생 43년, 소설쓰기로 인생에 복무하는 작가 이승우. 그의 작품세계를 대표하는 두 개의 기둥인 ‘종교적 실존’과 ‘문학적 실존’ 위에 지은 집 같은 산문집을 펴낸다. 『고요한 읽기』는 작가가 제안하는 하나의 읽기 방식이자, 그 방식이 불러일으킨 생각을 정리한 문학에세이, 그간의 소설 작업에 대해 스스로 붙인 “주관적 주해” 혹은 창작론, ‘쓰기-읽기-살기’가 빚은 한 작가의 초상이라 할 수 있는 책이다. 왜 쓰는가, 어떻게 문학을 할 것인가에 대해 구도자처럼 몰두해온 그가 선택했던 이 방식은, 다만 문학작품에 국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없이 낯설게 느껴지는 ‘나-타인-세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인 행위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고요히’ 읽는다는 것은 어떤 걸까. 그저 조용한 데서 혼자 읽는다, 가 아니라 부러 조용한 곳에서 혼자이기를 자처하여 몰두해들어가는 읽기를 말하는 것이다. 깊이 가라앉아 자기 안의 빛과 어둠을 탐색해가는 읽기. ‘감추어진 동굴’(「서문」)에 파편으로 흩어져 숨은 생각들을 길어올리는 읽기. 그것이 작가 이승우가 말하는 ‘고요한 읽기’다.
요컨대 자기 안으로 침잠하는 구심력과 나를 구성하는 타자/세계를 사유하는 원심력이 동시에 작용하는 것. 작가의 ‘고요한 읽기’의 오랜 동반자 보르헤스, 밀란 쿤데라, 카프카, 마르케스, 헤르만 헤세, 이청준부터 레비나스, 사르트르, 벤야민, 시몬 베유, 그리고 탈무드와 성경까지 문학과 철학, 종교를 넘나드는 ‘고요한 읽기의 목록’은 그저 머무는 존재가 아닌, 추구하는 존재로서 살고자 해온 작가의 오랜 물음들에 공명하게 한다.
책을 통해 ‘나’를 읽을 때, 나는 ‘나’를 통해 타인과 세상을 같이 읽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타인과 세상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통해 읽는 사람과 세상만이 진실합니다. ‘나’를 배제한 어떤 사람과 세상에 대한 이해도 진짜가 아닙니다. 자기에 대한 의심과 돌아봄이 없는 이해만큼 위험한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읽기가 중요합니다. _「서문-감추어진 동굴」에서
나는 나에게서 가장 멀리 있다. 나는 나의 ‘세상의 끝’이다.
작가는 긴 호흡의 산문 열두 편 가운데 첫번째 글에서 ‘끝’을 먼저 짚는다. “세상과 상관없이. 말하자면 실존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끝. 바로 ‘나’ 자신. “나는 나의 ‘세상의 끝’이다. 나는 나에게서 가장 멀고, 내가 가장 잘 모르고, 내가 가장 만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이다. 나는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다.”(「세상의 끝」) 작가는 2019년 출간작 『캉탕』의 세 인물을 예로 든다. ‘세상의 끝’에 이르러 “모든 것을 드러내놓기를 요구받는” 인물들. ‘나’로부터 온, 회피할 수 없는 요구들. 작가는 그들로 하여금 회고록이나 일기의 형태로 고백하게 하였다. “모든 글은 일종의 고백이고, 모든 고백은 누군가에게 하는 것이고, 그 누군가는 시간/신, 즉 ‘나’이다.” 함께 언급되는 『데미안』의 싱클레어와 보르헤르트의 432번 죄수(「민들레」), 오이디푸스라고 상황이 다르지 않다.
이렇듯 문학작품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추구와 좌절, 참회와 구원의 문제를 이승우 작가는 파스칼의 말을 빌려 인간이 위대함을 획득하는 과정이라 말한다. “인간은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그는 비참하다, 실제로 그렇기 때문에. 그러나 그는 진정 위대하다,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팡세』) ‘세상의 끝’에서 이루어지는 고백. 끝 다음의 시작은 작품 속 인물은 물론 그것을 쓴 작가와 읽는 사람 모두를 ‘개종한 사람’과 같게 만들 수 있다. 그것이 가능함을 알게 되는 일, 기도와도 같은 고백을 읽는 일은 ‘작가-작품(속 인물)–독자’의 내면에 영향을 미친다. “출발하기 위해 도착해야 하고 도착하기 위해 출발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므로 다시 출발할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일 때만, 다른 사람으로서만 새로 출발할 수 있다.” 문학이 그것을 돕는다.
영감은 작품을 시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게 하는 것이다.
스물둘에 등단해 40여 년간 30여 권의 소설을 묵묵히 펴낸 작가. 독자에게 ‘믿고 읽는 작가’가 된 그에게 작가는 어디에서 태어나는지 묻는다면, 창작의 비결이나 영감의 원천을 묻는다면 무어라 대답할까. 우선은 흔히 생각하는 ‘영감’의 방향을 뒤집는 답이 돌아올 것이다. 영감이란 위에서 아래로, 마치 계시처럼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내면에서, 노력과 인내를 동력삼아 불러일으켜지는 것이라고.
영감에 대한 미신에서 벗어날 것. 영감을 부정하지도 말고 숭배하지도 말 것. 왜곡이나 악용은 더욱 삼갈 것. 모독하지 말 것. 다만 필사적으로 ‘꿈꿀’ 것. 영감 같은 것은 있지 않다는 듯, 그러니 바라지 않는다는 듯 필사적으로 애쓰고, 애쓰면서 기다릴 것. 기다리면서 초대할 것. 애씀이 초대의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 것. 그조차 알지 말 것. 행여라도 영감이 자신의 노력에 대한 당연한 보상이라고 생각하지 말 것. 은총일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것.
(…)
위대한 작가들의 이름은 그 작가들의 책을 읽은 사람들, 읽고 쓴 사람들, 즉 그 작가들의 꿈에서 태어난 사람들에 의해 유전된다. 사라지지 않는다. 불멸한다. _「작가라는 환영」에서
창작의 ‘실마리’가 아닌 ‘매듭’으로서의 영감.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하나의 삶의 태도로서 쓰는 이는 물론 읽는 이 또한 각성하게 한다. 특별한 문학적 재능이 작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강렬하고 위대한 독서 경험의 영향 아래서 힘들게 빚어져 작가가 되는 것”이라는 성찰적 조언도 마찬가지다. ‘위대한 책’, “보르헤스의 정의를 따라 말하자면 성령이 쓴 책”은 “신의 입김 없이 완성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신은 작가의 열정과 노고가 없는 곳에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의심 속에서도 믿는 일
부끄러움 속에서도 쓰는 일
그의 모든 건 고요한 읽기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번 책에서 작가 이승우를 사로잡는 근원적 질문 혹은 그의 글쓰기를 추동하는 문제의식을 충분히 음미할 수 있는 것은 독자로서 무척 반가운 일이다. 향수(鄕愁)와 추구, 무지와 미지, 영원에 속한 것과 속하지 않은 것, 꿈, 말할 수 없고 말해서도 안 되는 것, 비범함에 대한 유혹 등 수록된 편편의 제목만 훑어도 짐작이 갈 것이다. 그 밖에도 사랑과 믿음, 삶과 죽음, 작품과 독자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오랜 생각들. “향수는 있었으나 있지 않은 것을 그리워하지만 추구는 있어본 적이 없는 것을 그리워한다.” “죽음은 게으르고, 동시에 즉흥적이다. 요컨대 종잡을 수 없다. 죽음은 올 때까지 오지 않는다.” “부재는 획득 실패로 인한 것이 아니라 획득한 것의 상실로 인해 생긴다.” “맹신은 믿음의 최상급이 아니라 믿음의 반대말이다.” “독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있는 이야기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다시 짓는 것이다. 잠든 이야기를 깨우고 끝난 이야기를 살리는 것이다” 등등 이승우 작가 특유의 밀도 높고 깊은 사유가 배어든 문장들이 그가 사랑하는 책들 사이사이 수놓여 있다. ‘무엇을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 고민하는 작가 이승우를 읽어내는, 겹겹의 읽기 경험이 가능하다.
한편 “인생의 고비에서 누군가를, 어떤 일이나 기회, 책, 문장을 만나지 않았다면 삶이 얼마나 더 엉망이 되었을까”라는 물음은 작가만의 것이 아니리라. 유한한 존재로서 삶이라는 이름의 변덕스러운 시간 위에 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고요한 읽기’라는, 이제는 점점 더 희귀해지는 그 행위가 그리워지고 절박해진다.
인간은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고,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질문하고 추구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 눈에는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아직 어떤 사람들 눈에 보이는 문학의 광채는 거기서 말미암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_「작가라는 환영」에서
목차
서문│감추어진 동굴
세상의 끝
작가라는 환영
향수와 추구, 혹은 무지와 미지
영원에 속하지 않은 것
말과 번역
환한 어둠
꿈과 해석
말할 수 없고 말해서도 안 되는
전체의 일부로 흡수될 때
이야기를 어디서 어떻게 끝낼까
비범함에 대한 유혹
대기만성
고요한 읽기의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