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자료인민 3부작 3
문화 대혁명: 중국 인민의 역사 1962~1976
- 저자/역자
- 프랑크 디쾨터 지음 / 고기탁 옮김
- 펴낸곳
- 열린책들
- 발행년도
- 2017
- 형태사항
- 593p.: 24cm
- 총서사항
- 인민 3부작; 3
- 원서명
- People's trilogy
- ISBN
- 9788932918433
- 분류기호
- 한국십진분류법->912.08
소장정보
위치 | 등록번호 | 청구기호 / 출력 | 상태 | 반납예정일 |
---|---|---|---|---|
이용 가능 (1) | ||||
북카페 | JG0000005284 | - |
이용 가능 (1)
- 등록번호
- JG0000005284
- 상태/반납예정일
- -
- 위치/청구기호(출력)
- 북카페
책 소개
기록 연구의 정점에서 마주하는 마오쩌둥 정권과 중국 인민들의 삶
2011년 새뮤얼 존슨상 수상자 프랑크 디쾨터의 <인민 3부작>
전작 <해방의 비극>과 <마오의 대기근>에 이은 마지막 이야기 <문화 대혁명> 출간
문화 대혁명
<인민 3부작>은 중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마오쩌둥 시대에 대한 새로운 분석을 시도하는 연작 기획이다. <해방의 비극>, <마오의 대기근>에 이어 출간된 문화 대혁명은 대약진 운동 직후인 1962년부터 마오쩌둥이 사망한 1976년까지의 시기를 집중적으로 재조명한다. 저자 프랑크 디쾨터는 이 책에서 스스로를 혁명과 동일시했던 마오쩌둥의 말년과 그를 중심으로 움직인 격동의 중국 사회를 교차함으로써 중국사에서 가장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 문화 대혁명의 민낯을 공개한다.
디쾨터는 이 책에서 마오쩌둥 시대의 그 어느 시기보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정치적 이해관계와 권력 암투의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이를 뒷받침하는 수백 건의 문서 자료들은 대부분 세상에 처음 공개되는 것으로써, 홍위병의 행태와 그로 인한 세부적인 피해 양상, 정치적 숙청을 둘러싼 통계, 농촌의 실태 연구, 공장이나 작업장에 관한 조사, 경찰의 암시장 관련 보고서, 그리고 농민들이 쓴 탄원서까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이를 통해 디쾨터가 주목하는 것은 권력의 회랑에서 멀찍이 벗어나 있는 보통 사람들의 삶이다. 끝없는 상호 비난, 허위 자백, 투쟁 대회, 박해 운동 등으로 요약되는 당시 중국 인민의 파괴된 일상을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이 책의 부제 <중국 인민의 역사>는 그 의미가 명확해진다.
프롤레타리아 혁명
디쾨터는 문화 대혁명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공산주의 이론에서 찾는다. 생산 수단의 소유 문제와 관련한 사회주의식 개혁이 마무리되면 그다음은 개인주의적 사고, 민간 시장 등 부르주아 문화의 모든 흔적을 영원히 제거할 새로운 혁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문화 대혁명은 기본적으로 과거의 흔적을 전부 지우고자 하는 시도였다고 전제된다. 스스로를 혁명과 동일시했던 마오쩌둥은 사회주의 진영의 역사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붉은 별이 되고자 했다. 하지만 문화 대혁명 이후 남은 것은 인민의 황폐한 삶과 문화적 유린의 흔적뿐이었다.
디쾨터가 문화 대혁명과 관련해 주목하는 또 다른 지점은 마오쩌둥이 <말년에 이르러 개인적인 원한을 해결하려> 했다는 그 목정성에 있다. 당시 상황은 이러했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마오쩌둥에 대한 지지는 사상 최저 수준에 있었다. 측근이자 동시에 정적인 당 고위 간부들의 비난이 거세지자 마오쩌둥은 대기근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적 사명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쉽게 원한을 품고 분노했던 마오쩌둥이 자신의 권위에 대한 공격을 프롤레타리아 정권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으로 간주했다는 것이 디쾨터의 설명이다.
디쾨터는 이렇게 시작된 문화 대혁명이 자생력을 가지며 전혀 예상치 못한 의외의 결과를 불러왔음을 밝힌다. <계급의 적>, <주자파>, <수정주의자> 등의 낙인을 무기로 당내 고위 권력자들을 제거하려 했던 마오쩌둥은 당 외부의 급진적 학생들에게 눈을 돌렸다. 타인으로부터 쉽게 영향을 받았고, 조종하기 쉬웠으며, 싸우고 싶어 하는 그들의 특징을 이용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능동적인 역할을 열망했다. <저항은 정당한 행위다>라는 마오쩌둥의 말에서 당위성을 찾은 홍위병은 기록 자료 속에서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다. 홍위병은 먼저 학교에서 교사와 관리자들을 향해 죄를 뒤집어씌웠다. 그들의 머리에 불을 질렀고, 잉크를 마시게 하거나 바보 모자를 씌워 조리돌렸으며, 폭행과 고문 끝에 죽도록 방치하는 경우도 있었다. 홍위병의 표적이 된 교사들은 시신에 매질을 하고, 억지로 배설물을 삼켰고, 서로의 따귀를 때려야 했다. 홍위병의 폭력은 출신 성분이 불량한 다른 학생들, 부르주아 지식인들에게 옮겨 갔다. 보통 인민들도 공공연한 박해를 받았다. 아이들이 거꾸로 매달려 채찍질을 당했다. 여덟 살짜리 한 소녀는 할머니와 함께 생매장을 당했다. 복수를 우려해 아예 일가족을 몰살하기도 했다.
과거의 유물도 파괴의 대상이었다. 전족을 한 노부인은 매춘부로, 거리에서 물건을 판매하는 행상은 자본주의자로 비난받았다. 사원과 교회, 골동품 상점, 역사적 기념물, 문화재 등 눈에 띄는 모든 옛날 것들은 파괴되었다. 이발사, 사진사, 책을 판매하는 행상 등이 부르주아 계급에 봉사한다는 이유로 청산의 대상이 되었다. 하이힐, 화려한 헤어스타일, 짧은 치마, 청바지, 불온서적이 즉시 사라져야 했다. 꽃 가게, 화훼 농업마저 부르주아의 낙인이 찍혔고, 타락한 부르주아의 상징이라는 이유로 고양이들이 대량 학살을 당했다. 홍위병은 당과 군의 지지를 바탕으로 과거를 상기시키는 모든 것을 부르주아적 대상으로 간주하는 무소불위의 폭력을 휘둘렀다.
홍위병들 사이에서 순수성과 적합성의 문제를 놓고 파벌이 생기기 시작했다. 끝없는 세력 싸움의 악순환 속에서 어린 학생들이 길을 잃어가고 있을 무렵 혁명이 전국적으로 승리했음이 선언되었다. 홍위병의 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린다. 이 시기에 대한 다양한 사료를 분석한 후 디쾨터가 내린 결론은 그 당시 용인된 프롤레타리아 문화라는 것은 사실상 마오쩌둥에 대한 숭배가 유일했다는 것이다.
숙청의 역사
홍위병 시대가 막을 내린 후 내려진 새로운 과제는 대오 정화 운동이라는 이름 아래 스파이, 반역자, 변절자 들을 색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계급의 적을 식별하는 기준이라는 것이 모호하기 짝이 없었다. 혁명 위원회는 상상으로 지어낸 죄를 뒤집어씌우고,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희생양을 만들어 냈으며, 해묵은 원한을 해소하기 위해 대오 정화 운동을 핑계 삼기도 했다. 군이 장악한 혁명 위원회가 이를 주도했다. 중국은 군인들이 학교와 공장, 정부 기관을 감시하는 군사 국가로 탈바꿈했다. 디쾨터는 이 시기 인민 공화국은 부쩍 군사 독재 정권을 닮아 있다고 진단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학생들이 농촌으로 보내졌다. 두 손이 있으니 도시에서 나태하게 있지 말고 혁명의 근원인 농촌으로 내려가 재교육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일단 한번 농촌으로 보내지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었다. 도시 거주가 법적으로 불가능해졌다. 가족, 친구들과 이별해야 했고 도시에 거주하며 누리던 혜택과 특권을 상실했다. 대약진 운동을 겪은 농촌의 현실은 참혹했다. 땔감이 없어 추위에 떨어야 했고,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기 일쑤였다. 들판은 황폐했고 나무들은 껍질이 벗겨져 있었다. 길에서 시체가 발견되기도 했다. 질병이 만연했고 수많은 폭행과 자살 사례가 보고되었다.
수백만 명의 피난민과 제대 군인, 매춘부, 극빈자, 소매치기 등 불순분자들도 농촌으로 보내져 재교육을 받았다. 본격적인 숙청의 시작이었다. 일반인, 왕년의 지도자 들이 적과의 연결 고리가 의심된다는 이유로 핍박받았다. 대중을 겁박해 순종적인 인민을 만들 목적으로 부패 척결 운동이 뒤따랐다. 거의 모든 행동과 발언이 잠재적인 범죄 행위로 간주되었다. 일반적으로 하향된 일반인의 숫자가 학생들의 두 배에 이르렀다. 열에 아홉은 기아의 경계에 있었다. 도정도 되지 않은 곡물 12킬로그램으로 한 달을 버텨야 했다.
디쾨터가 확인한 희생자들의 절대 다수는 고위 관료들이 아닌 보통의 인민들이었다. 과거 외국인과 연루된 적이 있는 사람은 무조건적인 의심을 받았다. 1949년 이전 상하이는 뉴욕을 제외하고 세계 어떤 도시보다 외국인 인구가 많았을 뿐 아니라 영국이나 파리보다 외국인의 투자가 많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서른 살 이상은 전부 용의자였던 셈이라는 것이 디쾨터의 설명이다.
대오를 정화하고 적과 아군을 가려낸다는 명분 아래 간부 학교라는 이름의 노동 훈련소에 교사, 당 간부, 학생 들을 몰아넣었다. 그들은 기숙사에 들어가 단체 생활을 하면서 끊임없이 서로를 감시해야 했다. 심한 압박감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베이징 대학교에서는 스물세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살충제를 마시거나 창문에서 뛰어내렸고 대부분은 스스로 목을 맸다.
디쾨터는 이러한 사료들이 보여 주는 참혹한 당시 중국 사회를 근거로 공산주의 역사는 끊임없는 숙청의 역사라고 일갈한다.
조용한 혁명
디쾨터는 문화 대혁명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조차 일당 독재 국가를 경계하는 수많은 일반인은 속마음과 개인 감정을 숨긴 채 표면상으로만 복종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강조한다. 당시는 마오쩌둥 집권 말기였고, 문화 대혁명은 당에 심각한 타격을 입힌 것이 분명해 보였다. 파벌 사이의 상호 견제가 일어나는 틈을 타서 인민들은 조용히 각자 도생의 길을 걸었다. 디쾨터가 확인한 당시 농촌 사회에서는 대약진 운동을 통해 떨어진 당에 대한 신뢰가 이제는 완전히 붕괴된 상태였다. 수백만의 농민들이 암시장을 열고 공동 재산을 나누고 토지를 분배하고 몰래 공장을 운영하는 등 조용한 혁명을 통해서 은밀하게 전통적인 관습을 되살렸다. 농촌에서는 이미 계획 경제를 포기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계획 경제의 점진적 붕괴가 나타났다.
디쾨터는 마오쩌둥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주석의 사망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충격을 받은 듯했지만 슬퍼하는 기색은 없었다>. 인민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며, 단지 안도감만이 존재했다>. 이는 9개월 전 저우언라이 총리가 사망했을 때 인민들이 보여 줬던 슬픔과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마오쩌둥의 사망 즈음에는 농민들은 이미 보다 많은 경제적 기회를 요구하고 나선 터였다. 그리고 마침내 수십 년에 걸친 마오쩌둥주의라는 이념의 굴레에서 이제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지도자부터 빈곤에 허덕이던 농민들까지, 마오쩌둥 시대의 중국 인민들이 보여 준 각각의 선택은 마오쩌둥이 의도한 것과는 정 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부르주아 문화의 잔재와 싸우기보다는 계획 경제를 뒤엎고 공산당의 이념을 도려냈다. 마오쩌둥주의를 묻어 버렸다.
마오쩌둥 이후
중국은 우리에게 일상적 관심의 대상이자 정치적 이해와 전략이 필수인 대상이다. 이 거대한 대륙 국가의 부상과 그 원동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국 공산당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민 3부작>이 펼쳐 보이는 30여 년 마오쩌둥 시대는 현재의 중국을 이해하기 가장 좋은 시작점이라 할 수 있다.
그 첫 번째 작품인 <해방의 비극>은 국공 내전에서의 공산당 승리와 중화 인민 공화국 선언이 당시 인민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분석한다. 디쾨터는 인민들이 마주한 해방은 계급 분류, 고문, 학대, 처형에 내몰린 삶이었음을 확인한다. 당시 인구 5억 5000만이었던 중국에서 해방 초기 10년간 민간인 사망자 수가 500만 명을 넘어섰을 것이라 추산함으로써 해방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 되묻는다.
두 번째 작품 <마오의 대기근>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재앙이라 평가받는 대약진 운동 시기를 다룬다. 지도자의 독단과 현실에 대한 무지가 어떤 참상의 결과로 이어졌는지 보여 준다. 디쾨터는 이 기간 동안 최소 4500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추산하는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체 희생자 수에 맞먹는 수치다. 무엇보다 대약진 운동이 체계적인 폭력에 의한 인재라는 점, 그리고 그 중심에 마오쩌둥이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세 번째 작품 <문화 대혁명>을 끝으로 <인민 3부작>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마오쩌둥 시대의 마지막을 목도하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마오쩌둥은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마오쩌둥과 어떻게 다른가? 그와 함께 현재 중국의 모습을 만든 인민들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인민들을 단순히 피해자나 가해자, 가담자나 변절자로 나눌 것인가? 아니면 마오쩌둥 시대 30여 년을 온몸으로 살아 낸 저력을 그들 안에서 찾을 것인가? 이 시기의 진정한 주인공은 누구인가?
탁월한 기록 연구물인 <인민 3부작>을 마무리하면서 디쾨터는 다음의 메시지로 결론을 대신한다. <일당 국가의 독재에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 우리는 이 메시지를 거역한 결과 중국 인민들이 어떤 참혹한 삶을 경험하게 됐는지 목격했다. 동시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메시지를 거역한 인민들이 있었기에 마오쩌둥 이후 중국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11년 새뮤얼 존슨상 수상자 프랑크 디쾨터의 <인민 3부작>
전작 <해방의 비극>과 <마오의 대기근>에 이은 마지막 이야기 <문화 대혁명> 출간
문화 대혁명
<인민 3부작>은 중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마오쩌둥 시대에 대한 새로운 분석을 시도하는 연작 기획이다. <해방의 비극>, <마오의 대기근>에 이어 출간된 문화 대혁명은 대약진 운동 직후인 1962년부터 마오쩌둥이 사망한 1976년까지의 시기를 집중적으로 재조명한다. 저자 프랑크 디쾨터는 이 책에서 스스로를 혁명과 동일시했던 마오쩌둥의 말년과 그를 중심으로 움직인 격동의 중국 사회를 교차함으로써 중국사에서 가장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 문화 대혁명의 민낯을 공개한다.
디쾨터는 이 책에서 마오쩌둥 시대의 그 어느 시기보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정치적 이해관계와 권력 암투의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이를 뒷받침하는 수백 건의 문서 자료들은 대부분 세상에 처음 공개되는 것으로써, 홍위병의 행태와 그로 인한 세부적인 피해 양상, 정치적 숙청을 둘러싼 통계, 농촌의 실태 연구, 공장이나 작업장에 관한 조사, 경찰의 암시장 관련 보고서, 그리고 농민들이 쓴 탄원서까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이를 통해 디쾨터가 주목하는 것은 권력의 회랑에서 멀찍이 벗어나 있는 보통 사람들의 삶이다. 끝없는 상호 비난, 허위 자백, 투쟁 대회, 박해 운동 등으로 요약되는 당시 중국 인민의 파괴된 일상을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이 책의 부제 <중국 인민의 역사>는 그 의미가 명확해진다.
프롤레타리아 혁명
디쾨터는 문화 대혁명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공산주의 이론에서 찾는다. 생산 수단의 소유 문제와 관련한 사회주의식 개혁이 마무리되면 그다음은 개인주의적 사고, 민간 시장 등 부르주아 문화의 모든 흔적을 영원히 제거할 새로운 혁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문화 대혁명은 기본적으로 과거의 흔적을 전부 지우고자 하는 시도였다고 전제된다. 스스로를 혁명과 동일시했던 마오쩌둥은 사회주의 진영의 역사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붉은 별이 되고자 했다. 하지만 문화 대혁명 이후 남은 것은 인민의 황폐한 삶과 문화적 유린의 흔적뿐이었다.
디쾨터가 문화 대혁명과 관련해 주목하는 또 다른 지점은 마오쩌둥이 <말년에 이르러 개인적인 원한을 해결하려> 했다는 그 목정성에 있다. 당시 상황은 이러했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마오쩌둥에 대한 지지는 사상 최저 수준에 있었다. 측근이자 동시에 정적인 당 고위 간부들의 비난이 거세지자 마오쩌둥은 대기근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적 사명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쉽게 원한을 품고 분노했던 마오쩌둥이 자신의 권위에 대한 공격을 프롤레타리아 정권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으로 간주했다는 것이 디쾨터의 설명이다.
디쾨터는 이렇게 시작된 문화 대혁명이 자생력을 가지며 전혀 예상치 못한 의외의 결과를 불러왔음을 밝힌다. <계급의 적>, <주자파>, <수정주의자> 등의 낙인을 무기로 당내 고위 권력자들을 제거하려 했던 마오쩌둥은 당 외부의 급진적 학생들에게 눈을 돌렸다. 타인으로부터 쉽게 영향을 받았고, 조종하기 쉬웠으며, 싸우고 싶어 하는 그들의 특징을 이용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능동적인 역할을 열망했다. <저항은 정당한 행위다>라는 마오쩌둥의 말에서 당위성을 찾은 홍위병은 기록 자료 속에서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다. 홍위병은 먼저 학교에서 교사와 관리자들을 향해 죄를 뒤집어씌웠다. 그들의 머리에 불을 질렀고, 잉크를 마시게 하거나 바보 모자를 씌워 조리돌렸으며, 폭행과 고문 끝에 죽도록 방치하는 경우도 있었다. 홍위병의 표적이 된 교사들은 시신에 매질을 하고, 억지로 배설물을 삼켰고, 서로의 따귀를 때려야 했다. 홍위병의 폭력은 출신 성분이 불량한 다른 학생들, 부르주아 지식인들에게 옮겨 갔다. 보통 인민들도 공공연한 박해를 받았다. 아이들이 거꾸로 매달려 채찍질을 당했다. 여덟 살짜리 한 소녀는 할머니와 함께 생매장을 당했다. 복수를 우려해 아예 일가족을 몰살하기도 했다.
과거의 유물도 파괴의 대상이었다. 전족을 한 노부인은 매춘부로, 거리에서 물건을 판매하는 행상은 자본주의자로 비난받았다. 사원과 교회, 골동품 상점, 역사적 기념물, 문화재 등 눈에 띄는 모든 옛날 것들은 파괴되었다. 이발사, 사진사, 책을 판매하는 행상 등이 부르주아 계급에 봉사한다는 이유로 청산의 대상이 되었다. 하이힐, 화려한 헤어스타일, 짧은 치마, 청바지, 불온서적이 즉시 사라져야 했다. 꽃 가게, 화훼 농업마저 부르주아의 낙인이 찍혔고, 타락한 부르주아의 상징이라는 이유로 고양이들이 대량 학살을 당했다. 홍위병은 당과 군의 지지를 바탕으로 과거를 상기시키는 모든 것을 부르주아적 대상으로 간주하는 무소불위의 폭력을 휘둘렀다.
홍위병들 사이에서 순수성과 적합성의 문제를 놓고 파벌이 생기기 시작했다. 끝없는 세력 싸움의 악순환 속에서 어린 학생들이 길을 잃어가고 있을 무렵 혁명이 전국적으로 승리했음이 선언되었다. 홍위병의 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린다. 이 시기에 대한 다양한 사료를 분석한 후 디쾨터가 내린 결론은 그 당시 용인된 프롤레타리아 문화라는 것은 사실상 마오쩌둥에 대한 숭배가 유일했다는 것이다.
숙청의 역사
홍위병 시대가 막을 내린 후 내려진 새로운 과제는 대오 정화 운동이라는 이름 아래 스파이, 반역자, 변절자 들을 색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계급의 적을 식별하는 기준이라는 것이 모호하기 짝이 없었다. 혁명 위원회는 상상으로 지어낸 죄를 뒤집어씌우고,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희생양을 만들어 냈으며, 해묵은 원한을 해소하기 위해 대오 정화 운동을 핑계 삼기도 했다. 군이 장악한 혁명 위원회가 이를 주도했다. 중국은 군인들이 학교와 공장, 정부 기관을 감시하는 군사 국가로 탈바꿈했다. 디쾨터는 이 시기 인민 공화국은 부쩍 군사 독재 정권을 닮아 있다고 진단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학생들이 농촌으로 보내졌다. 두 손이 있으니 도시에서 나태하게 있지 말고 혁명의 근원인 농촌으로 내려가 재교육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일단 한번 농촌으로 보내지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었다. 도시 거주가 법적으로 불가능해졌다. 가족, 친구들과 이별해야 했고 도시에 거주하며 누리던 혜택과 특권을 상실했다. 대약진 운동을 겪은 농촌의 현실은 참혹했다. 땔감이 없어 추위에 떨어야 했고,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기 일쑤였다. 들판은 황폐했고 나무들은 껍질이 벗겨져 있었다. 길에서 시체가 발견되기도 했다. 질병이 만연했고 수많은 폭행과 자살 사례가 보고되었다.
수백만 명의 피난민과 제대 군인, 매춘부, 극빈자, 소매치기 등 불순분자들도 농촌으로 보내져 재교육을 받았다. 본격적인 숙청의 시작이었다. 일반인, 왕년의 지도자 들이 적과의 연결 고리가 의심된다는 이유로 핍박받았다. 대중을 겁박해 순종적인 인민을 만들 목적으로 부패 척결 운동이 뒤따랐다. 거의 모든 행동과 발언이 잠재적인 범죄 행위로 간주되었다. 일반적으로 하향된 일반인의 숫자가 학생들의 두 배에 이르렀다. 열에 아홉은 기아의 경계에 있었다. 도정도 되지 않은 곡물 12킬로그램으로 한 달을 버텨야 했다.
디쾨터가 확인한 희생자들의 절대 다수는 고위 관료들이 아닌 보통의 인민들이었다. 과거 외국인과 연루된 적이 있는 사람은 무조건적인 의심을 받았다. 1949년 이전 상하이는 뉴욕을 제외하고 세계 어떤 도시보다 외국인 인구가 많았을 뿐 아니라 영국이나 파리보다 외국인의 투자가 많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서른 살 이상은 전부 용의자였던 셈이라는 것이 디쾨터의 설명이다.
대오를 정화하고 적과 아군을 가려낸다는 명분 아래 간부 학교라는 이름의 노동 훈련소에 교사, 당 간부, 학생 들을 몰아넣었다. 그들은 기숙사에 들어가 단체 생활을 하면서 끊임없이 서로를 감시해야 했다. 심한 압박감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베이징 대학교에서는 스물세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살충제를 마시거나 창문에서 뛰어내렸고 대부분은 스스로 목을 맸다.
디쾨터는 이러한 사료들이 보여 주는 참혹한 당시 중국 사회를 근거로 공산주의 역사는 끊임없는 숙청의 역사라고 일갈한다.
조용한 혁명
디쾨터는 문화 대혁명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조차 일당 독재 국가를 경계하는 수많은 일반인은 속마음과 개인 감정을 숨긴 채 표면상으로만 복종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강조한다. 당시는 마오쩌둥 집권 말기였고, 문화 대혁명은 당에 심각한 타격을 입힌 것이 분명해 보였다. 파벌 사이의 상호 견제가 일어나는 틈을 타서 인민들은 조용히 각자 도생의 길을 걸었다. 디쾨터가 확인한 당시 농촌 사회에서는 대약진 운동을 통해 떨어진 당에 대한 신뢰가 이제는 완전히 붕괴된 상태였다. 수백만의 농민들이 암시장을 열고 공동 재산을 나누고 토지를 분배하고 몰래 공장을 운영하는 등 조용한 혁명을 통해서 은밀하게 전통적인 관습을 되살렸다. 농촌에서는 이미 계획 경제를 포기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계획 경제의 점진적 붕괴가 나타났다.
디쾨터는 마오쩌둥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주석의 사망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충격을 받은 듯했지만 슬퍼하는 기색은 없었다>. 인민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며, 단지 안도감만이 존재했다>. 이는 9개월 전 저우언라이 총리가 사망했을 때 인민들이 보여 줬던 슬픔과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마오쩌둥의 사망 즈음에는 농민들은 이미 보다 많은 경제적 기회를 요구하고 나선 터였다. 그리고 마침내 수십 년에 걸친 마오쩌둥주의라는 이념의 굴레에서 이제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지도자부터 빈곤에 허덕이던 농민들까지, 마오쩌둥 시대의 중국 인민들이 보여 준 각각의 선택은 마오쩌둥이 의도한 것과는 정 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부르주아 문화의 잔재와 싸우기보다는 계획 경제를 뒤엎고 공산당의 이념을 도려냈다. 마오쩌둥주의를 묻어 버렸다.
마오쩌둥 이후
중국은 우리에게 일상적 관심의 대상이자 정치적 이해와 전략이 필수인 대상이다. 이 거대한 대륙 국가의 부상과 그 원동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국 공산당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민 3부작>이 펼쳐 보이는 30여 년 마오쩌둥 시대는 현재의 중국을 이해하기 가장 좋은 시작점이라 할 수 있다.
그 첫 번째 작품인 <해방의 비극>은 국공 내전에서의 공산당 승리와 중화 인민 공화국 선언이 당시 인민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분석한다. 디쾨터는 인민들이 마주한 해방은 계급 분류, 고문, 학대, 처형에 내몰린 삶이었음을 확인한다. 당시 인구 5억 5000만이었던 중국에서 해방 초기 10년간 민간인 사망자 수가 500만 명을 넘어섰을 것이라 추산함으로써 해방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 되묻는다.
두 번째 작품 <마오의 대기근>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재앙이라 평가받는 대약진 운동 시기를 다룬다. 지도자의 독단과 현실에 대한 무지가 어떤 참상의 결과로 이어졌는지 보여 준다. 디쾨터는 이 기간 동안 최소 4500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추산하는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체 희생자 수에 맞먹는 수치다. 무엇보다 대약진 운동이 체계적인 폭력에 의한 인재라는 점, 그리고 그 중심에 마오쩌둥이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세 번째 작품 <문화 대혁명>을 끝으로 <인민 3부작>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마오쩌둥 시대의 마지막을 목도하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마오쩌둥은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마오쩌둥과 어떻게 다른가? 그와 함께 현재 중국의 모습을 만든 인민들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인민들을 단순히 피해자나 가해자, 가담자나 변절자로 나눌 것인가? 아니면 마오쩌둥 시대 30여 년을 온몸으로 살아 낸 저력을 그들 안에서 찾을 것인가? 이 시기의 진정한 주인공은 누구인가?
탁월한 기록 연구물인 <인민 3부작>을 마무리하면서 디쾨터는 다음의 메시지로 결론을 대신한다. <일당 국가의 독재에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 우리는 이 메시지를 거역한 결과 중국 인민들이 어떤 참혹한 삶을 경험하게 됐는지 목격했다. 동시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메시지를 거역한 인민들이 있었기에 마오쩌둥 이후 중국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목차
머리말
연대표
지도
1부 초기(1962~1966)
1장 두 명의 독재자
2장 계급 투쟁을 잊지 말라
3장 문화 전쟁
4장 4인의 공모자
2부 적색 시대(1966~1968)
5장 대자보 전쟁
6장 붉은 8월
7장 낡은 세상을 타파하다
8장 마오쩌둥의 숭배자들
9장 연합
10장 조반파와 보황파
11장 군대의 등장
12장 군비 경쟁
13장 진화
3부 암흑 시대(1968~1971)
14장 대오 정화 운동
15장 산상하향
16장 전쟁 준비
17장 다자이를 본받다
18장 계속된 숙청
19장 후계자의 추락
4부 잿빛 시대(1971~1976)
20장 회복
21장 조용한 혁명
22장 제2의 사회
23장 반전
24장 후유증
주
선별 참고 문헌
감사의 글
찾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