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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저자는 교도가 아니면서도 맑은 영혼의 소유자답게 원불교의 창시자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를 성자로 알아보고 그의 평전 집필에 발심하였다. 뒤이어 수많은 자료를 섭렵하고 현지답사를 수행하며 자신의 독서와 성찰을 거듭하였다. 여기에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전기 작가의 재능을 아낌없이 쏟아부었으니 김형수의 문학세계에도 우뚝한 봉우리 하나가 솟은 느낌이다. 하지만 이 책은 결코 소설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정직한 평전으로 교단 안팎에서 두루 읽힐 역작이다. _백낙청(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그간에는 내 몸이 어떤 영원성의 일부였다. 그런데 5월이 가고 난 뒤에는 세계가 영영 파괴되고 말았다. 잿더미의 삶을 경험한 것이다. ‘평범한 성자’를 그때 알았으면 참 좋았을 것을. 그러나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우주에 갇혀 숱한 날을, 납득도 할 수 없고 해명도 불가능한 현실과 씨름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세월호’처럼 가라앉아가는 세계에 대한 아득한 불안, 그 속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눈빛들, 그것을 등진 채 고통스런 연민을 감내해야 하는 대다수의 영혼들. 더이상 팔 것이 없어서 신체의 일부를 팔아야 하는 황폐한 사회를 정치적 수사와 미학적 왜곡으로 뒤덮는 현실이 내게는 끊임없이 두 세기를 하나의 시간으로 연결시키는 역할을 했다. 나는 결코 21세기로 건너갈 수 없었던 것이다.
작가는 모든 글을 오늘의 자리에서 쓴다. 내가 이 평전을 쓰게 된 건 순전히 거리에 가득찬 ‘숱한 오늘들’ 때문이었다. 아직도 종료되지 않는 5·18에 대한 감정이 내 해석의 중심축에 있었다. _김형수, ‘에필로그’에서
한국 토착사상사의 굳건한 축, 원불교의 교조敎祖 소태산
치열한 정신의 탐험자요 사상가였던 성자의 족적을 따라 걷다
한국의 4대 종교 중 하나인 원불교는 물질문명의 급격한 발전을 정신문명이 따르지 못할 것을 미리 깨달은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에 의해, 인류의 정신문명을 이끌어나갈 새 시대 새 종교로서 시작되었다. 우리 민족이 배출한 걸출한 사상가로부터 탄생한 자생 종교라는 점에서도 그 존재 의의가 큰데, 그런 원불교가 세상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한 지 벌써 백 년이 되었다. 이를 기념하여 교조 소태산의 일대기를 한 권의 평전으로 봉전한다.
집필은 일찍이 『문익환 평전』을 펴내며 역사적 사실에 엄정히 입각하되, 소설적 상상력이 가미된 서술로 인물의 족적을 곁에서 따라 걷듯 섬세하게 기록한 바 있는 작가 김형수가 맡았다. 그리고 그의 평전 집필 방식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소태산이 숨쉬었던 일 분 일 초의 순간들을 생생하게 재현해냈다. 김형수는 특유의 꼼꼼한 성미로 치밀한 자료 조사와 현장답사를 거듭했으며, 교단의 감수를 거침으로써 이 책을 더욱 사실적이고 정확한 평전으로 완성시키고자 하였다. 교도가 아닌 저자에게 기나긴 고행의 여정이었을 이번 집필에 발심하게 된 계기는 필시 소태산이 손수 말하고 행하며 보여준 그의 사상적 깊이에 경도된 경험일 것이다.
소태산 박중빈은 전남 영광 백수면 길룡리 사람이다. 구한말, 민중의 삶이 점점 비참해져가는 가운데 의지할 곳 없던 전남의 민초들은 증산교 치성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다 지도자 강증산이 사망하고, 신도들은 크게 방황하며 증산의 재림만을 간절히 기원했다. 때마침 박중빈이 대각大覺하여 새로운 사상적 지도자로 우뚝 서자, 그를 증산과 동일시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그러나 박중빈은 그의 사상과 증산교의 교리를 확실히 구분했다. 증산교의 신비주의에서 탈피하고 생활 속에서 깨닫는 도를 설파하고자 했던 것이다. ‘증산’이라는 호를 한글로 풀어 쓰면 ‘시루산’이 되는데, 박중빈은 스스로를 ‘시루가 아니라 솥단지에서 살았던 사람’이라 하여 ‘솥에 산’을 한자로 음사音寫한 ‘소태산’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시루는 솥에 잠시 거는 것이고, 솥은 밥을 짓기 위해 매일 써야 하는 것이다. 시루로 찌는 떡은 잔치를, 솥으로 짓는 밥은 일상을 의미한다. 소태산이 자신의 정체성을 이 ‘솥’으로 표상했다는 것은 당대 그 누구보다 진리에 통달해 있었음에도, ‘일상생활 속에서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깨우침’의 추구를 가장 중요한 단초로 삼았던 그의 사상을 압축하여 보여준다. 그는 제자들에게 어떠한 기행과 이적도 기록으로 남기지 말 것을 당부함으로써, 한사코 신격화되고 숭앙되는 존재가 되지 않으려 했다. 그런 소태산을 ‘솥에서 난 성자’라 명명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보편성의 힘이 이렇듯 원불교를 세기를 넘어, 세계로 뻗어나가는 ‘산 종교’가 되도록 이끌어준 것이 아닐까.
소태산이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따라 읽는 것은, 온몸으로 가시덤불을 헤쳐나가는 한 인간의 너덜너덜해진 살갗을 지켜보는 일과 같다. 어려서부터 사고의 폭과 깊이가 남달랐던 그는 일곱 살 무렵 이성이나 감각으로 감지되지 않는 세계의 실체를 알고 싶다는 마음을 굳게 먹고 구도의 여정을 시작했다. 직접 산신을 만나려고 기도도 드려보고, 자신을 이끌어줄 스승과 만나고자 각처를 헤매기도 했지만, 청년기에 접어들면서 결국 직접 입정삼매에 들어 스스로 깨쳐야만 한다고 느끼게 된다.
김형수는 그후 소태산이 겪는 고행을 읽는 이가 피부로 느낄 수 있게끔 묘사한다. 소태산은 수행에 들자 혼몽과 망각을 반복하고 헛말을 하기도 하며, 장에 가는 길에 명상을 시작해 한나절을 길에 우뚝 선 채 보내기도 한다. 정신의 고투가 육신을 파괴하여 병색이 완연한 폐인처럼 보였다. 그러다 1916년 음력 3월 26일, 더이상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 “완전한 긍정적 상태”에서 소태산은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이는 경험을 한다. 아주 먼 곳에서 구해야 한다고 여겼던 깨달음이 사실은 일체만물에, 자신의 주변에, 그리고 자기 안에 이미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무엇의 영향도 받지 않고 홀로 진리를 깨친 뒤 여러 경전을 구해 읽어보니 그 결이 『금강경』과 같기에, 소태산은 석가모니를 자신의 종교적 연원으로 정하게 되었다.
대각 이후 종교적 지도자로서 소태산의 행보는 사뭇 독특하다. 제자들을 모아서는 수련을 하는 게 아니라 간척사업을 시작하더니, 그렇게 얻은 곡식으로 정신 수양보다 굶주림을 먼저 해결했다. 그는 이렇게 민중의 ‘존재의 건강성’부터 회복시킴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얻었다. 일제의 압박이 극심해지던 시기에는 ‘조선의 간디’로 불리며 민족의 정신적 뿌리 역할을 하던 자신으로 인해 교단 전체가 수모를 당하리라 예견했다. 소태산은 결국 일제에 저항하는 대신 병을 얻어 열반함으로써 일본을 안심시키고 원불교를 ‘황도불교화’의 위험에서 구해냈다.
허위와 허식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그가 얻은 진리로써 온 세상을 구제하려는 일념으로 살다 간 소태산.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세계의 본질을 놓치지 않으려 했던 듯하다. 중요한 것은 진리를 담는 그릇의 외관이 아니라 그 뜻을 상대방이 가장 잘 깨달을 수 있는 방식으로 전하는 것이며, 조선과 일본의 갈등처럼 보이는 충돌 양상도 크게 바라보면 관계에 해害를 끼치는 자와 이利를 더하는 자가 있을 뿐이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불변하는 세상의 이치를 그는 한눈에 꿰고 있었다. 열반의 순간에도, 그에겐 생과 사 또한 ‘상태의 변화’일 뿐 서로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였으리라. 소태산의 육신이 소멸함으로써 『소태산 평전』도 끝을 맺게 되지만, 이 거대한 사상가는 세계의 일부로서 여전히 이곳에 존재하고 있을 것만 같다.
그간에는 내 몸이 어떤 영원성의 일부였다. 그런데 5월이 가고 난 뒤에는 세계가 영영 파괴되고 말았다. 잿더미의 삶을 경험한 것이다. ‘평범한 성자’를 그때 알았으면 참 좋았을 것을. 그러나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우주에 갇혀 숱한 날을, 납득도 할 수 없고 해명도 불가능한 현실과 씨름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세월호’처럼 가라앉아가는 세계에 대한 아득한 불안, 그 속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눈빛들, 그것을 등진 채 고통스런 연민을 감내해야 하는 대다수의 영혼들. 더이상 팔 것이 없어서 신체의 일부를 팔아야 하는 황폐한 사회를 정치적 수사와 미학적 왜곡으로 뒤덮는 현실이 내게는 끊임없이 두 세기를 하나의 시간으로 연결시키는 역할을 했다. 나는 결코 21세기로 건너갈 수 없었던 것이다.
작가는 모든 글을 오늘의 자리에서 쓴다. 내가 이 평전을 쓰게 된 건 순전히 거리에 가득찬 ‘숱한 오늘들’ 때문이었다. 아직도 종료되지 않는 5·18에 대한 감정이 내 해석의 중심축에 있었다. _김형수, ‘에필로그’에서
한국 토착사상사의 굳건한 축, 원불교의 교조敎祖 소태산
치열한 정신의 탐험자요 사상가였던 성자의 족적을 따라 걷다
한국의 4대 종교 중 하나인 원불교는 물질문명의 급격한 발전을 정신문명이 따르지 못할 것을 미리 깨달은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에 의해, 인류의 정신문명을 이끌어나갈 새 시대 새 종교로서 시작되었다. 우리 민족이 배출한 걸출한 사상가로부터 탄생한 자생 종교라는 점에서도 그 존재 의의가 큰데, 그런 원불교가 세상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한 지 벌써 백 년이 되었다. 이를 기념하여 교조 소태산의 일대기를 한 권의 평전으로 봉전한다.
집필은 일찍이 『문익환 평전』을 펴내며 역사적 사실에 엄정히 입각하되, 소설적 상상력이 가미된 서술로 인물의 족적을 곁에서 따라 걷듯 섬세하게 기록한 바 있는 작가 김형수가 맡았다. 그리고 그의 평전 집필 방식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소태산이 숨쉬었던 일 분 일 초의 순간들을 생생하게 재현해냈다. 김형수는 특유의 꼼꼼한 성미로 치밀한 자료 조사와 현장답사를 거듭했으며, 교단의 감수를 거침으로써 이 책을 더욱 사실적이고 정확한 평전으로 완성시키고자 하였다. 교도가 아닌 저자에게 기나긴 고행의 여정이었을 이번 집필에 발심하게 된 계기는 필시 소태산이 손수 말하고 행하며 보여준 그의 사상적 깊이에 경도된 경험일 것이다.
소태산 박중빈은 전남 영광 백수면 길룡리 사람이다. 구한말, 민중의 삶이 점점 비참해져가는 가운데 의지할 곳 없던 전남의 민초들은 증산교 치성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다 지도자 강증산이 사망하고, 신도들은 크게 방황하며 증산의 재림만을 간절히 기원했다. 때마침 박중빈이 대각大覺하여 새로운 사상적 지도자로 우뚝 서자, 그를 증산과 동일시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그러나 박중빈은 그의 사상과 증산교의 교리를 확실히 구분했다. 증산교의 신비주의에서 탈피하고 생활 속에서 깨닫는 도를 설파하고자 했던 것이다. ‘증산’이라는 호를 한글로 풀어 쓰면 ‘시루산’이 되는데, 박중빈은 스스로를 ‘시루가 아니라 솥단지에서 살았던 사람’이라 하여 ‘솥에 산’을 한자로 음사音寫한 ‘소태산’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시루는 솥에 잠시 거는 것이고, 솥은 밥을 짓기 위해 매일 써야 하는 것이다. 시루로 찌는 떡은 잔치를, 솥으로 짓는 밥은 일상을 의미한다. 소태산이 자신의 정체성을 이 ‘솥’으로 표상했다는 것은 당대 그 누구보다 진리에 통달해 있었음에도, ‘일상생활 속에서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깨우침’의 추구를 가장 중요한 단초로 삼았던 그의 사상을 압축하여 보여준다. 그는 제자들에게 어떠한 기행과 이적도 기록으로 남기지 말 것을 당부함으로써, 한사코 신격화되고 숭앙되는 존재가 되지 않으려 했다. 그런 소태산을 ‘솥에서 난 성자’라 명명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보편성의 힘이 이렇듯 원불교를 세기를 넘어, 세계로 뻗어나가는 ‘산 종교’가 되도록 이끌어준 것이 아닐까.
소태산이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따라 읽는 것은, 온몸으로 가시덤불을 헤쳐나가는 한 인간의 너덜너덜해진 살갗을 지켜보는 일과 같다. 어려서부터 사고의 폭과 깊이가 남달랐던 그는 일곱 살 무렵 이성이나 감각으로 감지되지 않는 세계의 실체를 알고 싶다는 마음을 굳게 먹고 구도의 여정을 시작했다. 직접 산신을 만나려고 기도도 드려보고, 자신을 이끌어줄 스승과 만나고자 각처를 헤매기도 했지만, 청년기에 접어들면서 결국 직접 입정삼매에 들어 스스로 깨쳐야만 한다고 느끼게 된다.
김형수는 그후 소태산이 겪는 고행을 읽는 이가 피부로 느낄 수 있게끔 묘사한다. 소태산은 수행에 들자 혼몽과 망각을 반복하고 헛말을 하기도 하며, 장에 가는 길에 명상을 시작해 한나절을 길에 우뚝 선 채 보내기도 한다. 정신의 고투가 육신을 파괴하여 병색이 완연한 폐인처럼 보였다. 그러다 1916년 음력 3월 26일, 더이상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 “완전한 긍정적 상태”에서 소태산은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이는 경험을 한다. 아주 먼 곳에서 구해야 한다고 여겼던 깨달음이 사실은 일체만물에, 자신의 주변에, 그리고 자기 안에 이미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무엇의 영향도 받지 않고 홀로 진리를 깨친 뒤 여러 경전을 구해 읽어보니 그 결이 『금강경』과 같기에, 소태산은 석가모니를 자신의 종교적 연원으로 정하게 되었다.
대각 이후 종교적 지도자로서 소태산의 행보는 사뭇 독특하다. 제자들을 모아서는 수련을 하는 게 아니라 간척사업을 시작하더니, 그렇게 얻은 곡식으로 정신 수양보다 굶주림을 먼저 해결했다. 그는 이렇게 민중의 ‘존재의 건강성’부터 회복시킴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얻었다. 일제의 압박이 극심해지던 시기에는 ‘조선의 간디’로 불리며 민족의 정신적 뿌리 역할을 하던 자신으로 인해 교단 전체가 수모를 당하리라 예견했다. 소태산은 결국 일제에 저항하는 대신 병을 얻어 열반함으로써 일본을 안심시키고 원불교를 ‘황도불교화’의 위험에서 구해냈다.
허위와 허식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그가 얻은 진리로써 온 세상을 구제하려는 일념으로 살다 간 소태산.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세계의 본질을 놓치지 않으려 했던 듯하다. 중요한 것은 진리를 담는 그릇의 외관이 아니라 그 뜻을 상대방이 가장 잘 깨달을 수 있는 방식으로 전하는 것이며, 조선과 일본의 갈등처럼 보이는 충돌 양상도 크게 바라보면 관계에 해害를 끼치는 자와 이利를 더하는 자가 있을 뿐이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불변하는 세상의 이치를 그는 한눈에 꿰고 있었다. 열반의 순간에도, 그에겐 생과 사 또한 ‘상태의 변화’일 뿐 서로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였으리라. 소태산의 육신이 소멸함으로써 『소태산 평전』도 끝을 맺게 되지만, 이 거대한 사상가는 세계의 일부로서 여전히 이곳에 존재하고 있을 것만 같다.
목차
프롤로그 발견자 _007
1장 궁궁을을弓弓乙乙 _055
2장 눈보라 사이 별빛같이 _085
3장 소를 찾아 나서다 _117
4장 고행苦行 _157
5장 옛사람이 먼저 보았네 _195
6장 버려진 땅은 없어 _227
7장 떡이 아니라 밥이여 _261
8장 돌이 서서 물소리를 듣는다 _301
9장 미륵의 눈빛이 떨어진 자리 _341
10장 우주 속으로 돌아가다 _375
에필로그 인류세人類世 _419
집필과정 및 자료 해제 _437
작가의 말 _453
인명 색인 _4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