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자료철학이 있는 삶 004
투사들을 위한 철학: 정치와 철학의 관계
- 저자/역자
- 알랭 바디우 지음 / 서용순 옮김
- 펴낸곳
- 오월의봄
- 발행년도
- 2013
- 형태사항
- 114p.; 21cm
- 총서사항
- 철학이 있는 삶; 004
- 원서명
- Philosophy for Militants
- ISBN
- 9788997889273
- 분류기호
- 한국십진분류법->166.8
소장정보
위치 | 등록번호 | 청구기호 / 출력 | 상태 | 반납예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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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카페 | JG0000002549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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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번호
- JG0000002549
- 상태/반납예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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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치/청구기호(출력)
- 북카페
책 소개
철학은 다른 가능성, 다른 세상을 모색하는 것
끊임없이 생각하는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라.
진리를 확신하는 주체의 삶, 이념을 지닌 삶을 살아라.
현대 철학의 가장 중요한 사상가 중 한 명
2013년 9월 24일부터 10월 2일까지 펼쳐지는 ‘멈춰라, 생각하라!(The Zizek/Badiou Event of Philosophy -The Idea of Communism 2013)’ 컨퍼런스에 참여하는 현대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신간 《투사를 위한 철학》이 출간되었다. 이 행사는 공산주의, 글로벌 자본주의의 대안 등에 대해 논의하는 국제학술대회. 알랭 바디우는 이 행사에서 ‘긍정의 변증법’ 등을 주제로 발표를 하게 된다.
슬라보예 지젝이 “나는 바디우가 필요하다”라고 말할 정도로 동시대 사상가들 중 가장 중요한 사람 중 한 명인 알랭 바디우의 신간 《투사를 위한 철학》의 원제는 《철학과 정치의 수수께끼 같은 관계(La relation ?nigmatique entre la philosophie et la politique)》이다. 이 책이 영어로 번역되면서 《투사를 위한 철학(Philosophy for Militants)》이라는 제목이 붙었고, 독자들이 한국어로 대하게 될 이 번역본은 영어 번역본의 제목을 따른 것이다. ‘militant’는 정당이나 조합 조직의 열성적인 활동가 내지는 투사를 말한다. 그보다 더 심층적으로 이 말은 무엇인가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지는 동시에 그 확신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주저함이 없는 사람을 지칭한다. 그런 점에서 ‘militant’는 고전적인 ‘혁명 투사’의 모습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바디우는 이 말을 상당히 즐겨 쓴다. 그것은 이 단어가 강한 확신과 함께 그 확신에 대한 실천을 과감하게 밀고 나가는 진리의 주체,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믿음을 끝까지 견지하는 주체의 모습을 그대로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어 제목이 이 책의 특징을 더 잘 드러낸다고 생각하여, 《투사를 위한 철학》으로 제목을 짓게 되었다.
이 책을 번역한 서용순 영남대 학술연구교수는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바디우의 지도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곧 바디우의 제자가 이 책을 직접 번역하게 된 것이다. 이 책에는 <정치와 철학의 수수께끼 같은 관계>, <병사의 형상>, <정치: 비표현적인 변증법>을 제목으로 한 세 강연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강연 원고들은 비교적 최근에 개진된 정치에 관한 바디우의 입론들이며, 바디우의 고유한 이론적 정향을 보여준다. 물론 이 세 가지 글은 모두 독립적이면서도 상호 보완적이다. 그렇기에 독자들은 그의 논의를 따라가면서 정치에 대한, 좀 더 정확히 말해 정치적 진리에 대한 바디우의 가장 구체적인 생각들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텍스트를 열어젖혔을 때, 독자들은 명쾌하게 전개되는 구체적인 논의와 만나게 된다. 군데군데 난해한 구절들도 눈에 띄지만, 기본적인 내용들은 대단히 명쾌하다. 바디우의 책은 어렵기로 소문이 나 있지만, 이 책은 그간 번역된 책들 중에서 가장 쉬운 편에 속한다. 곧 이 책이 독자들에게 ‘바디우는 어렵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하 글은 서용순의 ‘해제를 겸한 옮긴이의 말’을 정리한 것이다.)
바디우의 철학은 무엇인가
많은 ‘철학자’들이 그런 것처럼, 바디우의 글쓰기는 압축적이다. 중요한 문구 하나하나는 다른 문제들을 담고 있고, 그것을 통해 다른 지평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하다. 말하자면, 문구 하나하나가 모두 긴 글의 주제가 될 수 있을 정도로 바디우의 글쓰기는 여러 가지 문제를 아우르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바디우의 주장을 통해 다른 지평으로 가닿을 수 있고, 또 다른 종류의 이론적 접근을 시도할 수 있다. 그렇게 바디우의 책은 언제나 많은 영감을 준다. 이 철학은 단순히 ‘써먹기 좋은’ 철학이 아니라, 이전과는 다른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훌륭한 지렛대이다. 잠재해 있는 논점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다른 사유의 장으로 나아가는 것은 철저하게 독자의 몫이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독자들은 바디우의 사유와 맞닥뜨리면서 실제적인 삶을 위한 다른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그동안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가치들에 의문을 제기하고, 우리에게 당연한 것으로 주어진 이 질서를 문제 삼는 데까지 나아간다면 그것은 최상의 결과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은 반드시 있다. 왜 그래야 하는가? 철학이 왜 각자의 삶에 개입해야 하는가? 철학책을 읽으며 그저 자그마한 삶의 위안을 얻으면 되는 것 아닌가? 아마 바디우의 철학에 대한 많은 반감들은 이러한 것들이라 여겨진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바디우의 철학을 접하면서 무언가 강요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폭력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다. 사실이다. 바디우는 강하게 단언하고, 확신에 차 선언한다. 이 철학자는 그저 충격을 준다. 그의 철학에서 우리는 2013년이라는 현 시점을 지배하는 ‘힐링’도 찾을 수 없고, 모두가 희생자라는 그럴듯한 위무도 발견할 수 없다. 바디우는 사태를 냉정하게 분석하고, 그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희망에 찬(?)’ 개혁주의자에게 찬물을 끼얹고, ‘양심적인(?)’ 민주주의자의 비겁함을 드러낸다. 그는 편하지 않다. 그의 책을 읽는 것이 힘든 진짜 이유는 그 사유의 난해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유의 불편함에 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실제 아주 간단하다.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반복적인 자동성에 맡김으로써 스스로를 방치하지 말고, 진리를 확신하는 주체의 삶, 이념을 지닌 삶을 살아나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대단히 피곤한 삶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피곤하고 머리 아프다. 그런데 그 피곤함을 감내하고, 끊임없이 생각하라고 말한다. 그것만이 인간이 인간으로 남는 길이란다.
철학과 정치의 관계, 민주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
철학과 정치의 관계를 논하면서 민주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첫 번째 강연 <정치와 철학의 수수께끼 같은 관계>는 철학에서 출발하여 공산주의에 도달하는 빠른 흐름을 보여준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철학에 대한 바디우의 독특한 관점이다. 바디우는 철학을 실천적 행위로 규정한다. 철학은 언제나 분리의 몸짓 안에 있다. 그것은 어떤 반복적인 행위, 분리의 형식 안에 있는 반복적 행위이다. 철학은 항상 참과 거짓을 분리하고, 선과 악을 분리하고,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들을 분리한다. 그러한 분리를 통해 기존의 규범과 낡은 질서를 지적인 수준에서 전복시키는 것이 철학이다. 결국 철학은 본질적으로 실천의 층위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새로운 철학은 항상 새로운 실천의 문제를 제기하고, 삶의 조직을 변경시킨다. 철학사 전체는 이러한 과정의 반복이며, 그 속에서 철학은 불변적이다. 그러한 분리 속에서 철학은 지배적 질서와는 다른 질서를 제시하면서 새로운 규범을 창조한다. 그리고 이 모든 새로움의 근원은 진리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철학은 새로운 질서의 창조를 위해 진리를 사유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해 철학이 제시하는 새로운 질서, 새로운 위계는 새로운 진리의 출현에서 비롯되는데, 이는 어느 시대의 철학에서나 공통적이다. 진리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새로운 철학은 항상 새로운 규범의 창조를 선언하는 것으로 귀착되곤 했다. 모든 전회―플라톤의 수학적 전회,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적 전회, 레비나스의 윤리적 전회 등등―는 항상 새로운 규범으로 연결되고, 세계를 파악하는 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그것은 새로운 사건의 결과를 수용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사유의 전회일 따름이다. 새로운 방식의 분리와 그것을 통한 규범의 전복은 진리에 대한 사유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바디우는 이를 통해 철학을 행위의 질서에 속한 것으로 규정한다. 철학적 행위란 질서를 변경하려는 모험적 행위이고, 그것은 기존 질서의 완강한 저항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철학은 ‘고급 교양’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것은 위험한 실천이다. 모든 비난과 조롱, 왜곡과 탄압에 정면으로 맞서는 위태로운 실천이 바로 철학인 것이다.
이러한 바디우의 테제들은 오늘날 우리의 상황, 철학이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우리의 상황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흔히 철학은 소비된다. 때로는 교양으로서, 때로는 지식으로서 철학은 소화되고 소비된다. 그리고 그뿐이다. ‘CEO를 위한 인문학’과 같이, 오늘날 이 사회에서 정형화되고 있는 그런 소비 행태는 그저 철학을 조잡한 액세서리로 만들 뿐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철학을 그저 자신의 교양 수준을 과시하는 수단으로만 생각한다. 확실히 그것은 액세서리다. 비실용적인 학문이라는 이유로 아카데미에서 추방당하거나 철저히 주변화되는 철학의 현실이 그것을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아카데미에서 철학을 전공하는 이들은 그러한 행태에 탄식하면서, 그저 어쩔 수 없다고, 오늘날 철학이 생존하는 길은 그 교양의 요구에 굴복하는 것뿐이라고 무력하게 수긍하곤 한다. 현실을 개탄하며 깊을 한숨을 토하는 것으로 자신의 할 바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지우기 힘들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현실을 앞에 두고 무력감에 빠지거나, 아카데미에서의 철학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그 현실과 영합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철학이 정체되고 있다면, 그것을 넘어 철학이 고사하고 있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는 일이다. 그 가능성을 멀리서 찾을 필요는 없다. 바로 바디우가 적시하는 철학의 가능성, 다시 말해 주체적 행위로서의 철학이야말로 철학이 늘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장 망각하기 쉬운 가능성이다. 철학은 늘 지배적인 질서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 새로운 규범의 창조를 통한 질서의 역전 가능성을 제기하는 개입의 장이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 철학자들에게 필수적인 것은 바로 그러한 실천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것’, 다시 말해 젊은이들로 하여금 지배 질서와는 다른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게 하는 것, 기존 질서와는 다른 새로운 규범적 질서의 창조야말로 그 임무라고 말하는 바디우는 우리로 하여금 “실천적 사유”를 지켜나갈 것을 요구한다. 혹자는 모든 것이 무너졌고, 사유는 패배했다고 말하겠지만, 사유가 그리 쉽게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철학을 제자리로 가져가는 일이다. 물론 아카데미에서의 철학의 기능 역시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아카데미에 안주하는 것만을 철학의 유일한 가능성으로 간주한다면, 철학은 아카데미에서조차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철학이 어디에 있건, 철학에게 주어진 운명은 바로 그러한 실천의 운명이다.
20세기를 관통하는 혁명적 시퀀스의 영웅적 형상
두 번째 강연인 <병사의 형상>은 영웅의 형상에 대한 검토이다. 여기서 바디우는 오늘날 영웅의 형상이 소멸했다는 선언도, 종교적 희생이라는 낡은 형상의 복귀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는 모든 창조적 차원이 붕괴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바디우는 새로운 영웅적 형상을 창안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을 위해 바디우는 20세기를 관통하는 혁명적 시퀀스의 영웅적 형상인 병사의 형상을 홉킨스와 스티븐스의 전쟁시를 통해 검토한다. 병사라는 형상은 전쟁으로부터 나온 형상이고, 그 전쟁은 모든 참혹함을 끝장내기 위한 혁명의 경로이다. 바디우가 《세기(Le Siecle)》에서 자세히 논구하는 것처럼, 지난 20세기는 전쟁의 세기, 모든 전쟁을 끝장내기 위한 ‘최후의 전쟁’이 벌어졌던 세기였다. 결국 그 전쟁에서의 영웅은 병사다. 바디우에게 병사란 진리에 포획된 인간을 그대로 보여주는 은유라고 할 수 있다. 그 주체는 모두를 위한 예이며, 새로운 가능성의 창조이고, 내재적 불멸성의 예증인 것이다. 모두를 위한 것, 새로운 가능성, 내재적 불멸성 등이 모두 진리를 가리키는 기표라고 할 때, 병사란 20세기를 특징짓는 혁명적 시퀸스가 보여주는 인간을 넘어선 인간, 비인간적인 것이 갖는 위험/풍요 안에서 창조된 인간성의 상징적 재현으로서의 영웅적 형상인 것이다. 바디우는 이 병사의 형상 속에서 한계를 넘어 무언가를 창조하는 현대적인 상징을 발견한다. 그러나 결론은 신중하다. 전사의 형상이 과거의 것인 것처럼 병사의 형상 역시 지나간 시대에 속한다. 스티븐스는 ‘최후의 전쟁’을 수행하는 병사의 상처와 죽음을 통해 여름과 태양의 존속을 노래하지만, 전쟁은 어두운 살육일 수 있고, 홉킨스가 병사에게 부여했던 기독교적인 이미지(죽음과 부활의 행위를 반복하는 병사) 역시 신이 죽어버린 오늘날(확실히 신은 죽었다. 그러므로 어떤 역할도 할 수 없다. 자신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지 못한 신은 그저 애처로운 꼭두각시일 뿐이다) 무용한 상징일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는 병사라는 영웅의 형상을 뒤로하고, 새로운 상징적 형식들을 창조해야 한다고 바디우는 말하고 있다.
바디우는 과거의 전사, 고유명을 갖는 고귀한 존재로서의 전사와는 전혀 다른 현대적 형상, 무명용사로서의 병사의 형상에 주목한다. 어쩌면 바디우의 주체를 가장 잘 표현해주는 것이 바로 무명용사로서의 병사, 고유명 없는 주체로서의 병사일 수 있다. 그러나 이 형상은 과거에 속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 형상을 벗어나는 새로운 상징이 필요하다. 바디우는 전쟁 속에서 등장할 수밖에 없는 병사의 형상 그 자체의 외부에서 진리에 포획된 인간의 상징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리라. 그 상징, 말하자면 인간성의 새로운 형상은 진리 안에 있는 인간의 형상임에 틀림없다. 그가 이 강연의 서두에서 말하는 것처럼, 삶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한계를 뛰어넘는 가능성이 주어지는 것은 진리를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그 상징을 구하는 일은 진리를 옹호하고, 새로운 정신적 배경을 찾는 과정이다. 어쩌면 그것은 새로운 희망의 자리를 마련하는 노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확하게 우리에게 없는 것이 바로 그 희망이다. 그러나 희망은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사도 바울》에서 잘 드러나듯이, 바디우에게 희망이란 진리에의 인내를 통해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지속을 통해 새롭게 얻게 될 희망은 결코 우리에게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믿음을 통해 힘겹게 얻어질 것이다. 절망으로 점철된 것 같은 오늘의 세계에서, 이 희망을 찾는 일은 무척 힘들고 요원하다. 그러나 또한 이 일은 포기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오늘날 많은 주체들에게 ‘주어진 길’이란 없다. 그 길은 만들어져야 하는 길, 아무도 가본 적인 없는 미증유의 길이다. 새로운 상징을 찾는 것은 바로 그 길을 포기하지 않는 데서 출발한다.
어두운 시대와 맞서는 투사의 진정한 미덕
바디우의 세 번째 강연은 재현의 논리에서 벗어난 정치에서의 비표현적 변증법의 문제를 다룬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이름으로 행해졌던 혁명적 정치는 그 자체로 표현적이다. 바디우가 인용하는 레닌의 문구가 그것을 아주 잘 말해주고 있다. 우선 계급으로 분할된 대중이 있다. 이 계급을 대표하는 것이 당이고, 당은 지도자에 의해 대표된다. 계급의 표현은 당이고, 당의 표현은 지도자다. 이 혁명적 사유의 논리는 철저한 표현의 논리였다. 역사적 행동에서 지도자의 고유명으로 나아가도록 조직된 사유가 바로 마르크스-레닌주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정치적 과정은 어떤 고유명을 통해 상징화된다. 바디우는 정확하게 이 고리를 끊으려 한다. 대중의 행동이 고유명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단절을 가하는 것은 표현적인 방법과는 다른 방법으로 정치적 변증법을 구성할 것을 요구하고, 그것은 집단적 행동을 새로운 방법으로 사유하는 길을 열어낸다. 결국 바디우의 시도가 가리키는 방향은 정치의 과정을 표현의 과정이 아닌 분리의 과정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바로 비-실존에 대한 욕망을 긍정하는 것이다. 법과 욕망의 대립 너머에서 정치적 진리를 발견하고자 하는 바디우는 법의 입장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들에 대한 욕망을 통해 법 너머를 탐색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욕망은 법의 이름 바깥에 있는, 존재하지 않는 괴물에 대한 욕망이라 할 수 있다. 우선 법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욕망은 불법적인 것에 대한 욕망이다.
그러나 그것을 단순히 ‘불법’으로만 환원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욕망은 새로운 질서에 대한 욕망이다. 정치적 보편성이 겨누고 있는 사회적 현실의 새로운 결합은 분명 기존 질서에서 벗어나 있는 새로운 질서를 창안함으로써 가능하다. 그러하기에 이 욕망은 전대미문의 것, 법의 질서에서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없고, 지식을 통해 규정될 수 없는 유적인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이다. 결국 혁명적 정치란 식별할 수 없고, 분류할 수 없는 유적인 것의 국지적 창조인 것이다.
<병사의 형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역시 바디우는 어떤 당위만을 제시한다. 새로운 상징을 찾는 것과 똑같이 이 지점에서 필요한 것은 어떤 허구, 고유명이 없는 허구이다. 대중과 계급, 정당 사이의 배치를 변경함으로써 정치적 영역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은 어떤 허구로부터 출발한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규정된 가능성의 영역을 벗어나는 새로운 허구이다. 법이 할당하고 제한하는 가능성에 맞서, 불가능한 것으로서의 허구를 창조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궁극적인 믿음, 다시 말해 진리에 대한 믿음을 허락할 것이라고 바디우는 역설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결여된 것은 바로 그 허구이고, 그것은 ‘꿈’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우리의 시대가 꿈이 사라진 시대라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젊은이들은 꿈을 박탈당하고,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남기 위해 애쓰며 살고 있다. 잔혹한 경쟁과 생존의 법칙만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을 뿐, 꿈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한 상태에 맞서 꿈과 꿈에 대한 믿음, 그 꿈을 현실 속에서 현실로 재구성해내는 노력이야말로 오늘날의 지상과제라고 바디우는 힘주어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객관적인 강령이나 정책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강령과 그에 따라오는 정책은 철저하게 법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가능성(또는 불가능성)은 철저히 배제된다. 오늘날의 시스템과 법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항상 ‘대안의 부재’로 요약된다. 우리에게는 다른 가능성이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실제로 가능한 것만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시스템은 항상 불가능한 것을 금지하며, 가능한 것과 허락된 것만을 추구하라고 가르친다. 바디우는 그러한 ‘가능의 체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구라고 부른다. 허구란 법의 입장에서 규정된 불가능성에 다름 아니고, 바로 거기서 모든 새로운 가능성이 도래한다. 바디우가 원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새로운 가능성으로서의 허구와 그 허구에 대한 확신. 이것은 확실히 바디우의 관점에서 정치적인 문제이다. 바디우에게 허구를 찾는 것은 정의와 희망에, 허구의 가능성은 용기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이 주체적인 범주들은 왜곡되거나 잊힌 것들이다. 압도적인 시스템의 힘은 이 강력한 범주들을 공허하고 의미 없는 것으로 낙인찍었다. 오늘날의 지배적 의견에 따르면, 용기는 그저 무모한 것이고, 정의는 추상적이다. 희망이란 그저 오지 않는 것, 일어나지 않는 것에 대한 병적인 집착일 뿐이다. 그 모든 것을 위해 필요한 인내는 어리석은 자학에 불과하다. 바디우는 이러한 지배적 의견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어두운 시대와 맞서는 투사의 진정한 미덕일 것이다.
다른 정치는 가능한가
이 텍스트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확실히 정치라고 할 수 있지만, 텍스트 자체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시(詩)다. 스티븐스는 모든 강연에서 등장하고, <병사의 형상>에는 홉킨스가 더해진다. 아이스킬로스의 서사시는 철학을 특징짓는 ‘밤의 사유’를 드러내기 위해 등장한다. 바디우의 이 텍스트가 정말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정치에 대한 바디우의 사유 안에 시가 개입한다. 그 시들은 하나같이 직접적으로 정치적이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안에서 정치적 사유의 요체를 발견할 수 있다. 물론 그 시들은 난해하다. 그러나 바디우는 그 난해함을 명쾌한 어조로 풀어낸다. 예를 들어 스티븐스의 허구에 대한 믿음,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에 대한 단언을 통해 진리의 실재적 가능성으로 나아가는 바디우의 단언적 설명과 그 명쾌함은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불어넣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단순히 텍스트의 다채로움을 위한 장식이거나, 정치를 위해 시를 이용하는 발상은 아니다.
바디우는 세 번째 강연의 말미에서 “내가 순수한 가능성의 영역에 처해 있을 때 자주 그런 것처럼 나의 결론은 시적(詩的)”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시적인 것과 순수 가능성의 문제에 천착해야 한다. 확실히 최근 바디우의 고민은 새로운 정치적 이념을 수립하는 데 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위해 가진 것이라고는 온갖 부정성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의 실패(결국 그것은 그 실천의 총체적 실패이다)를 통해 얻어진 이 부정성들은 우리에게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지만, 그저 그뿐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최근 바디우 철학이 모색하는 가능성이 갖는 최대의 난점이다. 자원이 없다는 것, 우리는 어쩌면 무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속에서 어떤 (불)가능에 대한 사유의 길을 찾으려 할 때,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정치 그 자체가 아닐 수 있다. 그것은 시다. 항상 시간을 선취하는 시는 우리에게 다른 길로 나아가는 좁은 통로를 가리킨다. 굳이 그리스 서사시와 르네상스 문학, 낭만주의 시가 모두 그런 역할을 했다고 강조할 필요도 없다. 시 그리고 넓게는 문학과 예술이 떠맡는 역할은 항상 시간을 앞질러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다. 모든 모더니티는 사실상 시적(문학적)인 것 또는 예술적인 것에서 출발한다. 새로운 낮을 알리는 희망의 미광이란 사실 시를 비롯한 예술이 당긴 잉걸불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시적인 것은 법이 제한하는 가능성의 영역 밖에서 불가능한 것을 길어옴으로써 새로운 괴물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들뢰즈와 데리다, 낭시와 랑시에르 등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적 사유의 전통에 충실한 바디우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예술의 위대함은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사유의 단초를 제공하는 것이 시를 비롯한 예술이다. 때로는 모호하고, 때로는 허무주의적이지만, 시와 예술을 통해 우리는 순수한 가능성의 영역을 탐험할 수 있다. 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사유를 위한 과감한 실험들이 어느 정도 시와 예술에 빚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수학과 사랑 역시 그러한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언어적인 수준에서 (불)가능성을 탐색하는 시야말로 그러한 탐험에 직접적으로 연루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바디우가 그리도 강조하는 주체의 후사건적 실천이란 다름 아닌 언어의 투쟁이 아닌가?
그런 가능성을 시와 예술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 집합이론이 보여주는 수학에서의 혁신, 사랑의 진리가 드러내는 삶의 새로운 형태들 역시 앞으로의 정치적 가능성을 가늠하는 척도로 기능할 수 있다. 바디우는 이 모든 것을 통해 새로운 정치의 이념, 공산주의의 이념을 구축하려고 애쓴다. 비록 그것이 단기간에 성과를 보기는 힘들겠지만, 그런 노력이 바디우 이후에도 이어질 것은 확실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러한 노력에 합류하는 것이다. 좀 더 다른 이야기, 과거의 경험을 출발점으로 삼아 재구성될 수 있는 정치적인 전망들, 어떤 지역성으로부터 출발하여 보편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노력들, 이 모든 것은 가까운 미래를 향하는 현재의 몸짓들이다. 그 가운데, 우리는 새로운 희망의 미광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생각하는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라.
진리를 확신하는 주체의 삶, 이념을 지닌 삶을 살아라.
현대 철학의 가장 중요한 사상가 중 한 명
2013년 9월 24일부터 10월 2일까지 펼쳐지는 ‘멈춰라, 생각하라!(The Zizek/Badiou Event of Philosophy -The Idea of Communism 2013)’ 컨퍼런스에 참여하는 현대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신간 《투사를 위한 철학》이 출간되었다. 이 행사는 공산주의, 글로벌 자본주의의 대안 등에 대해 논의하는 국제학술대회. 알랭 바디우는 이 행사에서 ‘긍정의 변증법’ 등을 주제로 발표를 하게 된다.
슬라보예 지젝이 “나는 바디우가 필요하다”라고 말할 정도로 동시대 사상가들 중 가장 중요한 사람 중 한 명인 알랭 바디우의 신간 《투사를 위한 철학》의 원제는 《철학과 정치의 수수께끼 같은 관계(La relation ?nigmatique entre la philosophie et la politique)》이다. 이 책이 영어로 번역되면서 《투사를 위한 철학(Philosophy for Militants)》이라는 제목이 붙었고, 독자들이 한국어로 대하게 될 이 번역본은 영어 번역본의 제목을 따른 것이다. ‘militant’는 정당이나 조합 조직의 열성적인 활동가 내지는 투사를 말한다. 그보다 더 심층적으로 이 말은 무엇인가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지는 동시에 그 확신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주저함이 없는 사람을 지칭한다. 그런 점에서 ‘militant’는 고전적인 ‘혁명 투사’의 모습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바디우는 이 말을 상당히 즐겨 쓴다. 그것은 이 단어가 강한 확신과 함께 그 확신에 대한 실천을 과감하게 밀고 나가는 진리의 주체,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믿음을 끝까지 견지하는 주체의 모습을 그대로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어 제목이 이 책의 특징을 더 잘 드러낸다고 생각하여, 《투사를 위한 철학》으로 제목을 짓게 되었다.
이 책을 번역한 서용순 영남대 학술연구교수는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바디우의 지도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곧 바디우의 제자가 이 책을 직접 번역하게 된 것이다. 이 책에는 <정치와 철학의 수수께끼 같은 관계>, <병사의 형상>, <정치: 비표현적인 변증법>을 제목으로 한 세 강연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강연 원고들은 비교적 최근에 개진된 정치에 관한 바디우의 입론들이며, 바디우의 고유한 이론적 정향을 보여준다. 물론 이 세 가지 글은 모두 독립적이면서도 상호 보완적이다. 그렇기에 독자들은 그의 논의를 따라가면서 정치에 대한, 좀 더 정확히 말해 정치적 진리에 대한 바디우의 가장 구체적인 생각들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텍스트를 열어젖혔을 때, 독자들은 명쾌하게 전개되는 구체적인 논의와 만나게 된다. 군데군데 난해한 구절들도 눈에 띄지만, 기본적인 내용들은 대단히 명쾌하다. 바디우의 책은 어렵기로 소문이 나 있지만, 이 책은 그간 번역된 책들 중에서 가장 쉬운 편에 속한다. 곧 이 책이 독자들에게 ‘바디우는 어렵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하 글은 서용순의 ‘해제를 겸한 옮긴이의 말’을 정리한 것이다.)
바디우의 철학은 무엇인가
많은 ‘철학자’들이 그런 것처럼, 바디우의 글쓰기는 압축적이다. 중요한 문구 하나하나는 다른 문제들을 담고 있고, 그것을 통해 다른 지평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하다. 말하자면, 문구 하나하나가 모두 긴 글의 주제가 될 수 있을 정도로 바디우의 글쓰기는 여러 가지 문제를 아우르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바디우의 주장을 통해 다른 지평으로 가닿을 수 있고, 또 다른 종류의 이론적 접근을 시도할 수 있다. 그렇게 바디우의 책은 언제나 많은 영감을 준다. 이 철학은 단순히 ‘써먹기 좋은’ 철학이 아니라, 이전과는 다른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훌륭한 지렛대이다. 잠재해 있는 논점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다른 사유의 장으로 나아가는 것은 철저하게 독자의 몫이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독자들은 바디우의 사유와 맞닥뜨리면서 실제적인 삶을 위한 다른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그동안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가치들에 의문을 제기하고, 우리에게 당연한 것으로 주어진 이 질서를 문제 삼는 데까지 나아간다면 그것은 최상의 결과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은 반드시 있다. 왜 그래야 하는가? 철학이 왜 각자의 삶에 개입해야 하는가? 철학책을 읽으며 그저 자그마한 삶의 위안을 얻으면 되는 것 아닌가? 아마 바디우의 철학에 대한 많은 반감들은 이러한 것들이라 여겨진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바디우의 철학을 접하면서 무언가 강요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폭력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다. 사실이다. 바디우는 강하게 단언하고, 확신에 차 선언한다. 이 철학자는 그저 충격을 준다. 그의 철학에서 우리는 2013년이라는 현 시점을 지배하는 ‘힐링’도 찾을 수 없고, 모두가 희생자라는 그럴듯한 위무도 발견할 수 없다. 바디우는 사태를 냉정하게 분석하고, 그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희망에 찬(?)’ 개혁주의자에게 찬물을 끼얹고, ‘양심적인(?)’ 민주주의자의 비겁함을 드러낸다. 그는 편하지 않다. 그의 책을 읽는 것이 힘든 진짜 이유는 그 사유의 난해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유의 불편함에 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실제 아주 간단하다.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반복적인 자동성에 맡김으로써 스스로를 방치하지 말고, 진리를 확신하는 주체의 삶, 이념을 지닌 삶을 살아나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대단히 피곤한 삶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피곤하고 머리 아프다. 그런데 그 피곤함을 감내하고, 끊임없이 생각하라고 말한다. 그것만이 인간이 인간으로 남는 길이란다.
철학과 정치의 관계, 민주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
철학과 정치의 관계를 논하면서 민주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첫 번째 강연 <정치와 철학의 수수께끼 같은 관계>는 철학에서 출발하여 공산주의에 도달하는 빠른 흐름을 보여준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철학에 대한 바디우의 독특한 관점이다. 바디우는 철학을 실천적 행위로 규정한다. 철학은 언제나 분리의 몸짓 안에 있다. 그것은 어떤 반복적인 행위, 분리의 형식 안에 있는 반복적 행위이다. 철학은 항상 참과 거짓을 분리하고, 선과 악을 분리하고,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들을 분리한다. 그러한 분리를 통해 기존의 규범과 낡은 질서를 지적인 수준에서 전복시키는 것이 철학이다. 결국 철학은 본질적으로 실천의 층위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새로운 철학은 항상 새로운 실천의 문제를 제기하고, 삶의 조직을 변경시킨다. 철학사 전체는 이러한 과정의 반복이며, 그 속에서 철학은 불변적이다. 그러한 분리 속에서 철학은 지배적 질서와는 다른 질서를 제시하면서 새로운 규범을 창조한다. 그리고 이 모든 새로움의 근원은 진리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철학은 새로운 질서의 창조를 위해 진리를 사유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해 철학이 제시하는 새로운 질서, 새로운 위계는 새로운 진리의 출현에서 비롯되는데, 이는 어느 시대의 철학에서나 공통적이다. 진리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새로운 철학은 항상 새로운 규범의 창조를 선언하는 것으로 귀착되곤 했다. 모든 전회―플라톤의 수학적 전회,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적 전회, 레비나스의 윤리적 전회 등등―는 항상 새로운 규범으로 연결되고, 세계를 파악하는 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그것은 새로운 사건의 결과를 수용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사유의 전회일 따름이다. 새로운 방식의 분리와 그것을 통한 규범의 전복은 진리에 대한 사유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바디우는 이를 통해 철학을 행위의 질서에 속한 것으로 규정한다. 철학적 행위란 질서를 변경하려는 모험적 행위이고, 그것은 기존 질서의 완강한 저항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철학은 ‘고급 교양’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것은 위험한 실천이다. 모든 비난과 조롱, 왜곡과 탄압에 정면으로 맞서는 위태로운 실천이 바로 철학인 것이다.
이러한 바디우의 테제들은 오늘날 우리의 상황, 철학이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우리의 상황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흔히 철학은 소비된다. 때로는 교양으로서, 때로는 지식으로서 철학은 소화되고 소비된다. 그리고 그뿐이다. ‘CEO를 위한 인문학’과 같이, 오늘날 이 사회에서 정형화되고 있는 그런 소비 행태는 그저 철학을 조잡한 액세서리로 만들 뿐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철학을 그저 자신의 교양 수준을 과시하는 수단으로만 생각한다. 확실히 그것은 액세서리다. 비실용적인 학문이라는 이유로 아카데미에서 추방당하거나 철저히 주변화되는 철학의 현실이 그것을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아카데미에서 철학을 전공하는 이들은 그러한 행태에 탄식하면서, 그저 어쩔 수 없다고, 오늘날 철학이 생존하는 길은 그 교양의 요구에 굴복하는 것뿐이라고 무력하게 수긍하곤 한다. 현실을 개탄하며 깊을 한숨을 토하는 것으로 자신의 할 바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지우기 힘들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현실을 앞에 두고 무력감에 빠지거나, 아카데미에서의 철학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그 현실과 영합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철학이 정체되고 있다면, 그것을 넘어 철학이 고사하고 있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는 일이다. 그 가능성을 멀리서 찾을 필요는 없다. 바로 바디우가 적시하는 철학의 가능성, 다시 말해 주체적 행위로서의 철학이야말로 철학이 늘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장 망각하기 쉬운 가능성이다. 철학은 늘 지배적인 질서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 새로운 규범의 창조를 통한 질서의 역전 가능성을 제기하는 개입의 장이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 철학자들에게 필수적인 것은 바로 그러한 실천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것’, 다시 말해 젊은이들로 하여금 지배 질서와는 다른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게 하는 것, 기존 질서와는 다른 새로운 규범적 질서의 창조야말로 그 임무라고 말하는 바디우는 우리로 하여금 “실천적 사유”를 지켜나갈 것을 요구한다. 혹자는 모든 것이 무너졌고, 사유는 패배했다고 말하겠지만, 사유가 그리 쉽게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철학을 제자리로 가져가는 일이다. 물론 아카데미에서의 철학의 기능 역시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아카데미에 안주하는 것만을 철학의 유일한 가능성으로 간주한다면, 철학은 아카데미에서조차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철학이 어디에 있건, 철학에게 주어진 운명은 바로 그러한 실천의 운명이다.
20세기를 관통하는 혁명적 시퀀스의 영웅적 형상
두 번째 강연인 <병사의 형상>은 영웅의 형상에 대한 검토이다. 여기서 바디우는 오늘날 영웅의 형상이 소멸했다는 선언도, 종교적 희생이라는 낡은 형상의 복귀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는 모든 창조적 차원이 붕괴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바디우는 새로운 영웅적 형상을 창안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을 위해 바디우는 20세기를 관통하는 혁명적 시퀀스의 영웅적 형상인 병사의 형상을 홉킨스와 스티븐스의 전쟁시를 통해 검토한다. 병사라는 형상은 전쟁으로부터 나온 형상이고, 그 전쟁은 모든 참혹함을 끝장내기 위한 혁명의 경로이다. 바디우가 《세기(Le Siecle)》에서 자세히 논구하는 것처럼, 지난 20세기는 전쟁의 세기, 모든 전쟁을 끝장내기 위한 ‘최후의 전쟁’이 벌어졌던 세기였다. 결국 그 전쟁에서의 영웅은 병사다. 바디우에게 병사란 진리에 포획된 인간을 그대로 보여주는 은유라고 할 수 있다. 그 주체는 모두를 위한 예이며, 새로운 가능성의 창조이고, 내재적 불멸성의 예증인 것이다. 모두를 위한 것, 새로운 가능성, 내재적 불멸성 등이 모두 진리를 가리키는 기표라고 할 때, 병사란 20세기를 특징짓는 혁명적 시퀸스가 보여주는 인간을 넘어선 인간, 비인간적인 것이 갖는 위험/풍요 안에서 창조된 인간성의 상징적 재현으로서의 영웅적 형상인 것이다. 바디우는 이 병사의 형상 속에서 한계를 넘어 무언가를 창조하는 현대적인 상징을 발견한다. 그러나 결론은 신중하다. 전사의 형상이 과거의 것인 것처럼 병사의 형상 역시 지나간 시대에 속한다. 스티븐스는 ‘최후의 전쟁’을 수행하는 병사의 상처와 죽음을 통해 여름과 태양의 존속을 노래하지만, 전쟁은 어두운 살육일 수 있고, 홉킨스가 병사에게 부여했던 기독교적인 이미지(죽음과 부활의 행위를 반복하는 병사) 역시 신이 죽어버린 오늘날(확실히 신은 죽었다. 그러므로 어떤 역할도 할 수 없다. 자신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지 못한 신은 그저 애처로운 꼭두각시일 뿐이다) 무용한 상징일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는 병사라는 영웅의 형상을 뒤로하고, 새로운 상징적 형식들을 창조해야 한다고 바디우는 말하고 있다.
바디우는 과거의 전사, 고유명을 갖는 고귀한 존재로서의 전사와는 전혀 다른 현대적 형상, 무명용사로서의 병사의 형상에 주목한다. 어쩌면 바디우의 주체를 가장 잘 표현해주는 것이 바로 무명용사로서의 병사, 고유명 없는 주체로서의 병사일 수 있다. 그러나 이 형상은 과거에 속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 형상을 벗어나는 새로운 상징이 필요하다. 바디우는 전쟁 속에서 등장할 수밖에 없는 병사의 형상 그 자체의 외부에서 진리에 포획된 인간의 상징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리라. 그 상징, 말하자면 인간성의 새로운 형상은 진리 안에 있는 인간의 형상임에 틀림없다. 그가 이 강연의 서두에서 말하는 것처럼, 삶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한계를 뛰어넘는 가능성이 주어지는 것은 진리를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그 상징을 구하는 일은 진리를 옹호하고, 새로운 정신적 배경을 찾는 과정이다. 어쩌면 그것은 새로운 희망의 자리를 마련하는 노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확하게 우리에게 없는 것이 바로 그 희망이다. 그러나 희망은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사도 바울》에서 잘 드러나듯이, 바디우에게 희망이란 진리에의 인내를 통해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지속을 통해 새롭게 얻게 될 희망은 결코 우리에게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믿음을 통해 힘겹게 얻어질 것이다. 절망으로 점철된 것 같은 오늘의 세계에서, 이 희망을 찾는 일은 무척 힘들고 요원하다. 그러나 또한 이 일은 포기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오늘날 많은 주체들에게 ‘주어진 길’이란 없다. 그 길은 만들어져야 하는 길, 아무도 가본 적인 없는 미증유의 길이다. 새로운 상징을 찾는 것은 바로 그 길을 포기하지 않는 데서 출발한다.
어두운 시대와 맞서는 투사의 진정한 미덕
바디우의 세 번째 강연은 재현의 논리에서 벗어난 정치에서의 비표현적 변증법의 문제를 다룬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이름으로 행해졌던 혁명적 정치는 그 자체로 표현적이다. 바디우가 인용하는 레닌의 문구가 그것을 아주 잘 말해주고 있다. 우선 계급으로 분할된 대중이 있다. 이 계급을 대표하는 것이 당이고, 당은 지도자에 의해 대표된다. 계급의 표현은 당이고, 당의 표현은 지도자다. 이 혁명적 사유의 논리는 철저한 표현의 논리였다. 역사적 행동에서 지도자의 고유명으로 나아가도록 조직된 사유가 바로 마르크스-레닌주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정치적 과정은 어떤 고유명을 통해 상징화된다. 바디우는 정확하게 이 고리를 끊으려 한다. 대중의 행동이 고유명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단절을 가하는 것은 표현적인 방법과는 다른 방법으로 정치적 변증법을 구성할 것을 요구하고, 그것은 집단적 행동을 새로운 방법으로 사유하는 길을 열어낸다. 결국 바디우의 시도가 가리키는 방향은 정치의 과정을 표현의 과정이 아닌 분리의 과정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바로 비-실존에 대한 욕망을 긍정하는 것이다. 법과 욕망의 대립 너머에서 정치적 진리를 발견하고자 하는 바디우는 법의 입장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들에 대한 욕망을 통해 법 너머를 탐색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욕망은 법의 이름 바깥에 있는, 존재하지 않는 괴물에 대한 욕망이라 할 수 있다. 우선 법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욕망은 불법적인 것에 대한 욕망이다.
그러나 그것을 단순히 ‘불법’으로만 환원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욕망은 새로운 질서에 대한 욕망이다. 정치적 보편성이 겨누고 있는 사회적 현실의 새로운 결합은 분명 기존 질서에서 벗어나 있는 새로운 질서를 창안함으로써 가능하다. 그러하기에 이 욕망은 전대미문의 것, 법의 질서에서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없고, 지식을 통해 규정될 수 없는 유적인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이다. 결국 혁명적 정치란 식별할 수 없고, 분류할 수 없는 유적인 것의 국지적 창조인 것이다.
<병사의 형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역시 바디우는 어떤 당위만을 제시한다. 새로운 상징을 찾는 것과 똑같이 이 지점에서 필요한 것은 어떤 허구, 고유명이 없는 허구이다. 대중과 계급, 정당 사이의 배치를 변경함으로써 정치적 영역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은 어떤 허구로부터 출발한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규정된 가능성의 영역을 벗어나는 새로운 허구이다. 법이 할당하고 제한하는 가능성에 맞서, 불가능한 것으로서의 허구를 창조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궁극적인 믿음, 다시 말해 진리에 대한 믿음을 허락할 것이라고 바디우는 역설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결여된 것은 바로 그 허구이고, 그것은 ‘꿈’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우리의 시대가 꿈이 사라진 시대라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젊은이들은 꿈을 박탈당하고,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남기 위해 애쓰며 살고 있다. 잔혹한 경쟁과 생존의 법칙만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을 뿐, 꿈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한 상태에 맞서 꿈과 꿈에 대한 믿음, 그 꿈을 현실 속에서 현실로 재구성해내는 노력이야말로 오늘날의 지상과제라고 바디우는 힘주어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객관적인 강령이나 정책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강령과 그에 따라오는 정책은 철저하게 법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가능성(또는 불가능성)은 철저히 배제된다. 오늘날의 시스템과 법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항상 ‘대안의 부재’로 요약된다. 우리에게는 다른 가능성이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실제로 가능한 것만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시스템은 항상 불가능한 것을 금지하며, 가능한 것과 허락된 것만을 추구하라고 가르친다. 바디우는 그러한 ‘가능의 체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구라고 부른다. 허구란 법의 입장에서 규정된 불가능성에 다름 아니고, 바로 거기서 모든 새로운 가능성이 도래한다. 바디우가 원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새로운 가능성으로서의 허구와 그 허구에 대한 확신. 이것은 확실히 바디우의 관점에서 정치적인 문제이다. 바디우에게 허구를 찾는 것은 정의와 희망에, 허구의 가능성은 용기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이 주체적인 범주들은 왜곡되거나 잊힌 것들이다. 압도적인 시스템의 힘은 이 강력한 범주들을 공허하고 의미 없는 것으로 낙인찍었다. 오늘날의 지배적 의견에 따르면, 용기는 그저 무모한 것이고, 정의는 추상적이다. 희망이란 그저 오지 않는 것, 일어나지 않는 것에 대한 병적인 집착일 뿐이다. 그 모든 것을 위해 필요한 인내는 어리석은 자학에 불과하다. 바디우는 이러한 지배적 의견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어두운 시대와 맞서는 투사의 진정한 미덕일 것이다.
다른 정치는 가능한가
이 텍스트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확실히 정치라고 할 수 있지만, 텍스트 자체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시(詩)다. 스티븐스는 모든 강연에서 등장하고, <병사의 형상>에는 홉킨스가 더해진다. 아이스킬로스의 서사시는 철학을 특징짓는 ‘밤의 사유’를 드러내기 위해 등장한다. 바디우의 이 텍스트가 정말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정치에 대한 바디우의 사유 안에 시가 개입한다. 그 시들은 하나같이 직접적으로 정치적이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안에서 정치적 사유의 요체를 발견할 수 있다. 물론 그 시들은 난해하다. 그러나 바디우는 그 난해함을 명쾌한 어조로 풀어낸다. 예를 들어 스티븐스의 허구에 대한 믿음,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에 대한 단언을 통해 진리의 실재적 가능성으로 나아가는 바디우의 단언적 설명과 그 명쾌함은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불어넣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단순히 텍스트의 다채로움을 위한 장식이거나, 정치를 위해 시를 이용하는 발상은 아니다.
바디우는 세 번째 강연의 말미에서 “내가 순수한 가능성의 영역에 처해 있을 때 자주 그런 것처럼 나의 결론은 시적(詩的)”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시적인 것과 순수 가능성의 문제에 천착해야 한다. 확실히 최근 바디우의 고민은 새로운 정치적 이념을 수립하는 데 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위해 가진 것이라고는 온갖 부정성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의 실패(결국 그것은 그 실천의 총체적 실패이다)를 통해 얻어진 이 부정성들은 우리에게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지만, 그저 그뿐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최근 바디우 철학이 모색하는 가능성이 갖는 최대의 난점이다. 자원이 없다는 것, 우리는 어쩌면 무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속에서 어떤 (불)가능에 대한 사유의 길을 찾으려 할 때,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정치 그 자체가 아닐 수 있다. 그것은 시다. 항상 시간을 선취하는 시는 우리에게 다른 길로 나아가는 좁은 통로를 가리킨다. 굳이 그리스 서사시와 르네상스 문학, 낭만주의 시가 모두 그런 역할을 했다고 강조할 필요도 없다. 시 그리고 넓게는 문학과 예술이 떠맡는 역할은 항상 시간을 앞질러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다. 모든 모더니티는 사실상 시적(문학적)인 것 또는 예술적인 것에서 출발한다. 새로운 낮을 알리는 희망의 미광이란 사실 시를 비롯한 예술이 당긴 잉걸불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시적인 것은 법이 제한하는 가능성의 영역 밖에서 불가능한 것을 길어옴으로써 새로운 괴물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들뢰즈와 데리다, 낭시와 랑시에르 등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적 사유의 전통에 충실한 바디우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예술의 위대함은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사유의 단초를 제공하는 것이 시를 비롯한 예술이다. 때로는 모호하고, 때로는 허무주의적이지만, 시와 예술을 통해 우리는 순수한 가능성의 영역을 탐험할 수 있다. 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사유를 위한 과감한 실험들이 어느 정도 시와 예술에 빚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수학과 사랑 역시 그러한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언어적인 수준에서 (불)가능성을 탐색하는 시야말로 그러한 탐험에 직접적으로 연루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바디우가 그리도 강조하는 주체의 후사건적 실천이란 다름 아닌 언어의 투쟁이 아닌가?
그런 가능성을 시와 예술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 집합이론이 보여주는 수학에서의 혁신, 사랑의 진리가 드러내는 삶의 새로운 형태들 역시 앞으로의 정치적 가능성을 가늠하는 척도로 기능할 수 있다. 바디우는 이 모든 것을 통해 새로운 정치의 이념, 공산주의의 이념을 구축하려고 애쓴다. 비록 그것이 단기간에 성과를 보기는 힘들겠지만, 그런 노력이 바디우 이후에도 이어질 것은 확실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러한 노력에 합류하는 것이다. 좀 더 다른 이야기, 과거의 경험을 출발점으로 삼아 재구성될 수 있는 정치적인 전망들, 어떤 지역성으로부터 출발하여 보편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노력들, 이 모든 것은 가까운 미래를 향하는 현재의 몸짓들이다. 그 가운데, 우리는 새로운 희망의 미광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해제를 겸한 옮긴이의 말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는 철학적 사유
1. 철학과 정치의 수수께끼 같은 관계
2. 병사의 형상
3. 정치: 비표현적인 변증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