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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키 바트만

Saartjie Baartman

저자/역자
레이철 홈스 지음 / 이석호 옮김
펴낸곳
문학동네
발행년도
2011
형태사항
295p.: 23cm
원서명
19세기 인종주의가 발명한 신화 born 1789 - buried 2002 (The) hottentot Venus: the life and death of Saartjie Baartman
ISBN
9788954616249
소장정보
위치등록번호청구기호 / 출력상태반납예정일
이용 가능 (1)
북카페JG0000000912-
이용 가능 (1)
  • 등록번호
    JG0000000912
    상태/반납예정일
    -
    위치/청구기호(출력)
    북카페
책 소개
“유럽의 인종주의는 그녀를 프랑켄슈타인 같은 괴물로 만들었다!”

제국주의 시대 인종주의 이데올로기가 극성을 부리던 19세기 초,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을 떠난 스무 살 흑인여성 사르키 바트만은 ‘호덴토트의 비너스’라는 이름으로 런던 거리에 전시된다. 그리고 죽어서는 뇌와 생식기가 유리병에 담기고 전신이 박제된 채 프랑스 파리 자연사박물관에 진열된다. 그녀는 각고의 노력 끝에 200년이 다 되어서야 밀랍이 되어 귀향할 수 있었다. 그녀는 1789년에 태어나 2002년 감투스 강가 한적한 고향 산에 매장되었다.

가슴 아픈 이야기, 그러나 아주 중요한 이야기!
- 『타임 아웃』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하는 사건들, 치밀한 자료조사가 돋보인다.
- 『스펙테이터』

올해 읽은 것 중 가장 충격적인 책이다.
지은이는 과감성과 섬세함으로 그 비극적인 삶을 완벽히 재구성해냈다.
- 『더 타임스』

사르키의 삶뿐 아니라 인종전시가 창궐하던 런던의 풍경, 그 당시 정치상황,
유전학이란 이름으로 자행되던 사이비 과학까지 그 배경을 아주 자세히 파헤쳤다.
- 『아이리시 타임스』


“사르키는 1815년에 사망하여 2002년에 매장되었다. 그녀의 유골에는 먼지가 쌓인 적이 없었다. 200여 년간 호텐토트의 비너스는 유럽의 과학, 예술, 문학, 철학, 대중문화에 등장해 인종적이고 성적인 편견에 찬 ‘죽음의 무도the macabre dance’를 추도록 강요받았다. 유럽의 인종주의는 사르키를 프랑켄슈타인 같은 괴물로 만들었다. 훼절과 해부를 겪은 사르키의 유해는 사후 보복을 감행하는 유령이 되었다. 사르키의 유해를 통해 서양 제국주의의 비인간적 측면이 만천하에 드러날 수 있었다.”

살아서는 런던 거리에서 희귀 인종으로 전시되고, 죽어서는 박제가 되어 파리 자연사박물관에 표본으로 전시됐던 아프리카 여자의 일대기 『사르키 바트만』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그녀의 비극적인 생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국내에선 MBC와 EBS TV에서 소개된 바 있고, 유럽에선 지난 2010년 모로코의 감독 압델라티프 케시시가 <블랙 비너스>라는 제목으로 영화화하여 베니스영화제에 공식 초청되기도 했다. 그녀는 흔히 ‘사라 바트만’으로 불려 왔다. 하지만 레이철 홈스는 영국에서 뜻하지 않게 얻은 세례명 ‘사라 바트만’ 대신 ‘사르키 바트만’으로 호명함으로써 그녀의 정체성을 환기시킨다. ‘작다’와 ‘사랑스럽고 정겹다’는 뜻을 동시에 지닌 크리올어 접미사 ‘키’로, 사르키의 아프리카 정신을 살려내려는 것이다.

당시 유럽인들이 사르키 바트만에게 붙인 별명은 ‘호텐토트의 비너스’였다. 호텐토트는 남아프리카 ‘부시맨’을 가리키는 경멸적 표현으로 백인들의 인종적 오만과 편견의 극치를 보여주는 표현이다. 제국주의가 판치던 그 무렵 유럽인들은 식민지 침략의 정당성을 인종적 우월성에서 찾았다. 수많은 유럽인이 인류학자, 여행가의 이름으로 빈번히 남아프리카를 오갔다. 이들은 유목민이던 코이코이족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동물과 인간 사이에 있는 ‘진화상의 사라진 고리’라고 여기고 특히 이들의 생식기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이를 과장되게 묘사해 유럽에 퍼뜨려 성적 관심을 갖도록 부추겼다. 호텐토트 여자들은 기다란 음순이 있어 생식기를 덮고 있다는 ‘거짓 신화’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앞치마 살’이라 명명했다.

이 책은 그러한 말도 안 되는 신화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이성의 이름을 자행된 비이성적인 열정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보여준다. 더불어 계몽주의니 이성이니 과학이니 말만 앞세운 근대 유럽의 모순을 들추어볼 수 있게 해준다. 사르키는 런던에서 노예폐지론자들이 제기한 소송으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선택은 영국에 남는 것이었다. 왜 그랬을까? 일명 ‘호텐토트의 비너스 소송사건’은 그녀에게 자유가 있었는지, 짐승이 아닌 사람으로서 그녀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더 나아가 노예제폐지 이후의 인권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여러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사르키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는 많은 부분이 불확실하다. 하지만 지은이는 당시 식민 정부가 시행한 인구조사, 불임으로 아이를 입양해 키우면서 그 보모로 사르키를 고용했던 헨드릭 세자르 부부의 유언장, 남아공을 오간 유럽 탐험가와 박물학자들의 서간과 여행기, 유럽을 떠들썩하게 했던 호텐토트 관련 광고문구, 포스터, 신문기사 등 다양한 자료를 활용해 제국주의 시대의 풍경을 객관적으로 복원해낸다.

‘사르키 바트만’의 이야기를 접하면 무엇보다 먼저 호기심과 궁금증이 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곧 그녀가 겪은 비인간적인 사건들에서 저절로 분노하면서 자연스레 그녀를 가련한 피해자로 보게 된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러한 관점은 역사가 그녀의 목을 계속 밟도록 놔두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강조한다. 식민주의 시선을 벗어던지고 인간을 사유하는 것, 개인의 인간성을 가능한 한 온전히 살려내는 것, 그런 지향점으로 우리 인식의 틀을 전환하는 것이 아픈 과거로부터 진정한 활로를 되찾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사르키 바트만 또는 사라 바트만의 일대기

1789년 남아프리카의 코이족 일원으로 태어났다. 십대 후반 강투스 강가에서 약혼식 축제를 벌이던 날 밤, 백인 정찰대에게 납치되어 케이프타운으로 끌려갔다. 그녀는 그곳에서 노예와 같은 시종 노릇을 한다. 선술집에서 노래하여 술꾼들을 사로잡는가 하면, 어느 군악대원과 결혼해 아이도 낳고 가정을 꾸리기도 했다. 그 행복은 길지 않았다. 스무 살 즈음 아기가 죽고 군악대원은 어디론가 떠났다. 고용주 헨드릭 세자르는 상관 알렉산더 던롭의 계획대로 그녀를 꼬드겨 함께 유럽으로 밀항한다.

1810년 런던에서 그녀는 아프리카 희귀 인종 호텐토트의 비너스로 소개된다. 던롭 일당은 그녀의 큰 엉덩이를 강조하여 아프리카 모피 외투를 걸치게 하고 사르키를 무대에 세웠다. 그녀는 람키라는 현악기를 퉁기며 원시부족을 흉내내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경이의 시대가 가져다준 기이한 열정은 그녀를 점점 신화로 만들었다. 관객은 신화를 소비했다. 큰 엉덩이는 아프리카 인종이 ‘인간 원숭이’와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상징이었고 세간에 떠돌던 긴 음순에 관한 소문은 상상력을 자극했다.

사르키는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엄청난 인기를 누린다. 당시의 영국은 기이한 구경거리들에 열광하는 사회였다. 낯선 대륙의 동물이나 기형아들이 전시되었고, 파노라마 구경도 열풍을 이루었다. 오늘날 연예오락 산업의 뿌리가 그 시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르키는 유럽에 등장했던 수많은 ‘비너스’ 중에 하나였다. 영국 사회는 그들이 만든 제국주의와 인종주의 틀에 넣어 그녀를 희귀 인종으로 전시했지만, 사실 그녀가 인기를 얻게 된 것은 람키라는 남아프리카의 전통 악기를 켜면서 춤과 노래를 하는 뛰어난 공연 능력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때문에, 그녀는 20세기 초의 파리를 뒤흔들었던 미국 출신의 흑인 무용수 ‘조세핀 베이커’의 직계 선조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제국주의 시절 유럽에 등장했던 숱한 비너스들 중 단연 최고의 비너스로 꼽힌다. 실제로 조세핀 베이커는 파리 무대에 처음 등장할 때 손목과 발목, 어깨에 깃털을 달고 반라로 춤을 추었고, 이는 바로 100년 전 사르키가 런던 무대에서 대중들 앞에서 전시됐을 때 했던 퍼포먼스를 고스란히 계승한 것이었다.

1814년까지 영국 각지를 돌며 당시 유행하던 ‘이상한 쇼’(프릭쇼)들 중 단연 최고의 인기를 누린다. 그러나 명성이 커질수록 그녀는 피폐해졌다. 무대에서 활력을 잃자 관객은 떠나갔다. 설상가상 쇼의 주관자 던롭이 세상을 뜨자 세자르는 흔들렸다. 그는 사르키를 데리고 프랑스로 숨어든다. 그리고 사르키를 프랑스 자연사박물관과의 밀거래로 먹고살던 박제사이자 거간꾼 레오에게 팔아넘긴다.

1815년 파리에서 실물 모델이 되어 실험실에 선다. 옷을 벗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무너졌다. 그날의 모습은 보고서와 세밀화에 기록되어 오늘까지 전해진다. 이 관찰실험의 주동자 퀴비에는 그녀가 죽자 그 시신을 해부학 실험실로 가져온다. 더이상 저항할 수 없는 그녀는 뇌와 성기가 유리병에 담기고 박제가 된 채, 과학의 이름으로 1974년까지 100년 이상 박물관에서 계속 전시되었다. 1970년 후반, 뇌와 생식기가 담긴 유리병은 몰래 전시장에서 치워졌고 골격 뼈대와 전신 밀랍도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다 호텐토트의 비너스 표본이 공식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79년, 고생물학자 폴 브로카의 뇌 표본을 찾던 스티븐 제이 굴드가 우연히 그 표본들을 찾아내면서부터다. 이후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를 종식시키고 민주정부를 세운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는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에게 그녀의 뇌와 생식기를 포함한 유해 일체의 반환을 공식 제기했다. 반환 협상은 지루하게 10년을 끌었다. 협상 기간 중 프랑스는 유해가 망실됐다고 주장하면서도 슬쩍 재전시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남아공 정부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협상은 타결되었다.

2002년 그녀는 남아공의 국가적 환대를 받으며 고향으로 돌아온다. 아파르트헤이트를 종식시킨 넬슨 만델라 대통령과 그 뒤를 이은 음베키 대통령이 그녀의 유해 반환운동에 앞장서고 세계의 정치인과 지식인, 예술가과 사회운동가 등 수많은 인사들이 이 운동에 동참한 결과였다. 마침내 안식을 얻게 된 사르키는 과거 식민주의 시절의 수난을 상징하는 인물로 오늘날 다시 명성을 누리고 있다.
목차

옮긴이 서문 ― 사르키, 찢어진 내 자아의 다른 얼굴

00 ‘사르키 바트만’이라는 이름
01 경이로움
02 어머니의 나라
03 사라진 아이들의 도시
04 밀항
05 비너스의 출현
06 자유인이었을까, 노예였을까?
07 호텐토트 비너스 소송사건
08 은밀한 성
09 누드의 옷을 입다
10 비너스의 죽음
11 뼈를 묻다
12 사후의 일들

미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