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자료이반 일리치 전집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에너지와 공정성에 대하여
- 저자/역자
- 이반 일리치 지음 / 신수열 옮김
- 펴낸곳
- 사월의책
- 발행년도
- 2018
- 형태사항
- 144p.: 19cm
- 총서사항
- 이반 일리치 전집
- 원서명
- Energy and Equity
- ISBN
- 9788997186532 9788997186501(세트)
- 분류기호
- 한국십진분류법->326.3
소장정보
위치 | 등록번호 | 청구기호 / 출력 | 상태 | 반납예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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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카페 | JG0000004864 | 대출가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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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번호
- JG0000004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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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치/청구기호(출력)
- 북카페
책 소개
■ 행복한 사회는 오직 자전거의 속도로만 가능하다
- 인간을 노예화하는 에너지 소비와 속도에 대한 고발
에너지 과잉소비에 기초한 현대의 수송이 어떻게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하고 인간의 자율적 능력을 해치는지 고발한 책. 에너지는 인간이 만들어낸 도구를 노예처럼 쓸 수 있게 해주는 기본적 요소다. 그러나 에너지는 또한 인간을 도구들에 예속시키는 원인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동차 없이는 아예 이동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동력화된 수송의 노예가 되었으며,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는 생활은 단 하루도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자동차가 있어도 모든 사람이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릴 수는 없다. 지구에 사는 우리들은 이미 꽉 막힌 자동차들 때문에 안달하고 지겨워 죽을 지경이다. 값비싼 자동차들은 엄청난 화석연료를 써대면서도 결국은 자전거보다 못한 속도를 낸다. 도로 건설과 관리에 드는 비용, 자동차를 구입하고 유지하는 데 드는 모든 비용을 계산하면 자동차는 결코 자전거보다 빠르지도 않고 효율적이지도 않다. 이 책은 ‘에너지 위기’나 ‘생태 위기’와 같은 표면적 이유를 넘어 ‘자전거’로 상징되는 적정에너지, 적정기술이 어떻게 한 사회의 행복에 이바지하는지를 보여주는 역작이다.
■ 자전거는 공정하다
자전거가 자동차보다 훨씬 빠르다고 하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투르 드 프랑스에 출전한 프로선수들 이야기가 아니다.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네 바퀴로 가는 자전거” 하는 김광석 노랫말도 아니다. 우리가 매일처럼 타는 자동차는 실제로 자전거보다 매우 느린 교통수단이다. 물론 속도만을 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정체와 포화로 인해 차의 이동속도가 턱없이 느려진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만, 차를 구입 유지하는 비용과 연료비, 세금, 보험료, 통행료 등을 버는 데 바치는 시간까지 합치면 자동차는 자전거보다 훨씬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다. 우리는 차에 앉아 시속 80킬로미터의 속도를 만끽하며 달리지만, 사실은 시속 20킬로미터가 채 안 되는 자전거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셈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자동차를 움직이는 것은 에너지다. 휘발유를 쓰는 자동차건 요즘 각광받는 전기차건 상관없다. 교통 분야에 들어가는 에너지 사용량은 총에너지 사용량의 45퍼센트에 달한다고 한다.(미국 1970년 기준) 한 사회의 가용 에너지가 ‘속도’라는 이름 아래 교통에 독점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전거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달리기 위해 한정된 화석연료를 펑펑 쓰고 있는 셈이다.
더 큰 문제는 자동차가 제시하는 속도의 꿈이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자동차는 한 사회가 가진 가용에너지의 대부분을 독점할 뿐 아니라, 도로 건설비, 주차장 등의 공공시설 비용, 공해 비용 등을 유발함으로써 막대한 세금을 탕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자동차의 속도를 확보하는 데 투입되는 세금은 자동차 없는 사람들도 똑같이 부담한다.
누구나 자동차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세금은 당연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동차를 중심에 둔 교통시스템은 애초부터 차별에 근거한 것이다. 꽉 막힌 출퇴근 시간에 버스와 콩나물 지하철을 탈 수밖에 없는 사람은 한가한 시간대에 빠르고 편하게 이동할 수 있는 계층에 비해 운송시스템 자체에 의해 차별을 당한다. 시간은 돈으로 환산되고, 이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사람이 경쟁에서 앞선다. 물론 이 모든 불공정은 자동차를 가진 사람과 나아가 그 자동차를 생산하는 산업을 우선적으로 배려해 온 국가와 정부 탓이 크다. 개인이 아닌 사회가 제도적 불공정을 조장해온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집밖을 나서는 즉시 자동차를 타지 않고는 한 걸음도 이동할 수 없게 되었다. 겨우 몇 킬로미터를 가는 데도 차를 타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인간의 타고난 자력이동 능력을 퇴화하고, 인간의 노예인 줄 알았던 에너지와 자동차에 의해 거꾸로 노예가 되고 만 것이다.
이 책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의 원래 제목은 “에너지와 공평성”(Energy and Equity)이다. 공평성은 평등(equality)과 다르다. 평등이 ‘권리와 혜택의 고른 배분’이라는 산술적 의미에 치우쳐 있다면, 공평성은 정의(justice)와 관계된 것이고 주어진 사회적 차별을 보정한다는 적극적 의미를 가진다. 저자는 이 책에서 속도, 에너지, 자동차 등의 키워드를 통해 인간의 자유와 사회적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을 묻는다. 적정 에너지와 적정 기술을 넘는 순간, 사회는 공동체적 가치를 잃으며, 인간을 산업(수송산업)의 노예로 만든다는 것이다. 자전거는 인류가 도달한 최적의 기술, 최적의 에너지 효율을 가리키는 말에 다름이 아니다.
■ 속도에 마비된 상상력
에너지 소비와 수송산업의 발달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수송수단을 생산하고, 움직이게 하고, 주행과 주차 등의 편의를 도모하는 데 사회가 쓰는 총에너지의 45퍼센트가 들어간다. 사회적 가용에너지의 상당 부분이 사람들을 빠르게 이동시킨다는 명목 아래 쓰이고 있는 것이다. 1974년 기준으로 미국인 2억 9천만 명이 교통 분야에서 쓰는 에너지량이 13억의 중국인과 인도인이 모든 분야에서 쓰는 에너지를 훌쩍 뛰어넘는 현실이다. 이 에너지의 대부분이 ‘속도’를 높이는 마술에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속도가 아무리 증가하고 에너지를 많이 써도 우리는 도리어 시간이 부족하다며 안달한다. 우리는 하루 평균 32킬로미터를 이동하지만 사실상 반경 8킬로미터 내의 범위에서 맴맴 돌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발로 걸을 때보다 훨씬 좁은 반경 안에서 움직이면서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먼 곳까지 갈 수 있다고 착각한다. 더 큰 문제는 인간의 발이 수송수단에 의지하면서 대지와의 관계를 잃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발을 통해 시공간 속에 그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다. 발로 걷는 속도와 거리에 맞춰 그의 생활세계와 인간관계와 마을이 생기고 그에게 ‘의미’를 가진 세상이 구성되는 것이다. 우리는 빠른 속도로 달리는 차 안에서 창밖을 스쳐가는 풍경을 보며, 마치 자신의 활동범위가 넓어진 듯 착각하지만, 사실은 신기루에 불과한 세상만을 만나고 있는 셈이다. 스스로 발자취를 남기고, 의미와 기억을 심고, 주권을 주장할 수 있는 영토를 잃어버린 것이다.
■ 횡령당한 생활시간
사회가 속도를 우상화할수록 공평성은 저하한다. 왜냐하면 무제한의 속도를 누리는 데는 엄청난 비용이 들며,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이기 때문이다. 빠른 속도는 소수 인간의 시간을 고액의 가치로 자본화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대다수 사람들의 시간을 희생시킨 결과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쳇바퀴 돌 듯 출퇴근과 대중교통에 구속되어 있는 사이, 소수는 가장 교통이 편리한 곳에서 빠르게 이동하거나 비행기를 타기 때문이다. 1974년 미국 기준으로 해마다 전체 비행거리의 5분의 4를 1.5퍼센트의 인구가 독점하고 있다는 것만 봐도 그러하다. 돈이 있는 사람은 속도를 마음 놓고 구입할 수 있고, 그렇게 확보한 시간은 더 많은 자본을 확보하는 데 쓸 수 있다. 속도에 의해 생활시간을 횡령당하고 있는 현실을 좀 더 들여다보자.
표준적인 미국 남성은 1년에 1,600시간 이상을 차에 쓴다. 주행중이거나 정차해 있을 때만이 아니다. 그는 차를 사기 위해 계약금, 월부금을 벌어야 하고, 연료비, 보험료, 세금, 교통위반 시의 벌금을 내기 위해 노동시간의 상당 부분을 바쳐야 한다. 이 시간을 모두 합치면 하루에 깨어 있는 16시간 중 4시간에 달한다. 결국 표준적인 미국인은 1년에 1만 2,000킬로미터를 이동하는 데 1,600시간을 소비하고 있다. 이것은 시속으로 치면 7.5킬로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시속 7.5킬로미터면 수송산업이 발달하지 않는 나라의 사람들도 어디든 갈 수 있는 속도이다. 자동차 등록대수 2천만 대가 넘는 한국도 미국과 별반 다를 게 없다.
■ ‘자전거’는 왜 행복한가?
이반 일리치는 이 책에서 에너지 낭비와 속도의 무익함을 대신할 수 있는 이동수단으로 자전거를 든다. 자전거와 자동차는 모두 볼베어링 장치 때문에 가능했던 발명품이다. 왕복운동과 거기에 들어가는 에너지를 회전운동으로 바꾸어 속도를 높인 것은 인간 창의성의 빛나는 사례라 할 만하다. 하지만 볼베어링 기술에 엔진, 모터와 같은 동력원이 추가되면서 기술적 편의는 인간의 자율적 능력을 압도하여 오히려 부담을 가중시키게 되었다.
자전거는 보행속도인 시속 5~6킬로미터보다 3~4배 빠른 속도로 이동하면서 에너지는 보행의 5분의 1밖에 쓰지 않는 최고의 이동수단이다. 또한 자전거는 인간의 신진대사 에너지를 이동력의 한도에 정확하게 맞춘 이상적인 변환장치이다. 화석연료를 쓰는 모든 기계보다 열역학적 효율이 높을 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 모두의 능력보다 이동능력이 뛰어나다. 또한 자전거 주행에 필요한 공공시설의 건설비는 자동차보다 턱없이 적을 뿐 아니라, 자전거와 자동차 사이의 전체 가격차이보다도 적을 정도다.
또한 자전거는 공간의 활용도도 높다. 자동차 한 대가 주차하는 공간에 자전거는 18대를 세울 수 있고, 주행시 필요한 공간도 30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4만 명의 사람을 1시간 안에 다리를 건너게 하는 데 자동차는 12개, 버스는 4개가 필요하지만 자전거는 단 하나면 된다. 에너지 과잉 사용에 기초한 자동차의 저효율성과 사회적 불평등을 악화시키는 효과에 비해, 자전거는 적정 기술과 적정 에너지의 모범적 사례라 할 만하다.
■ 만들어진 ‘필요’와 ‘독점’에 기초한 사회
이 책에서 이반 일리치가 줄곧 주장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최적을 이루는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이 있다는 것이다. 최적 에너지가 있다면 최적 속도도 있을 텐데, 저자는 시속 25킬로미터가 넘는 순간 사회적 불공정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일리치가 이렇게 최적 에너지와 적정 기술을 강조하는 것은 필요와 소비에 기초한 산업사회의 논리 때문이다. 일리치는 말한다. “산업 생산물의 1인당 산출량이 일정 한계를 넘어서면, 그 생산물은 필요의 충족에 대하여 근본적인 독점을 행사한다.”
‘근본적 독점’(radical monopoly)이란 원래부터 인간에서 없었던 ‘필요’를 만들어내고는, 산업적 생산물이 아니면 그 필요를 충족시킬 수 없도록 만든 것을 말한다. 예컨대 인간의 타고난 이동능력을 수송산업이 장악하면, 그 생산물인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이동이 아예 불가능해지는 것과 같다. 근대경제학은 이러한 필요를 설득하기 위해 ‘희소성’(scarcity)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이반 일리치의 주장이다. 인간이란 자립적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 주어진 환경에서 자기 삶을 충분히 꾸려나갈 수 있는 존재임에도, 자본주의적 산업사회는 상품과 이윤을 위해 결핍(scarcity)을 과장하고 필요를 조작한다는 것이다. 동력에 사로잡힌 이동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 인간을 노예화하는 에너지 소비와 속도에 대한 고발
에너지 과잉소비에 기초한 현대의 수송이 어떻게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하고 인간의 자율적 능력을 해치는지 고발한 책. 에너지는 인간이 만들어낸 도구를 노예처럼 쓸 수 있게 해주는 기본적 요소다. 그러나 에너지는 또한 인간을 도구들에 예속시키는 원인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동차 없이는 아예 이동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동력화된 수송의 노예가 되었으며,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는 생활은 단 하루도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자동차가 있어도 모든 사람이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릴 수는 없다. 지구에 사는 우리들은 이미 꽉 막힌 자동차들 때문에 안달하고 지겨워 죽을 지경이다. 값비싼 자동차들은 엄청난 화석연료를 써대면서도 결국은 자전거보다 못한 속도를 낸다. 도로 건설과 관리에 드는 비용, 자동차를 구입하고 유지하는 데 드는 모든 비용을 계산하면 자동차는 결코 자전거보다 빠르지도 않고 효율적이지도 않다. 이 책은 ‘에너지 위기’나 ‘생태 위기’와 같은 표면적 이유를 넘어 ‘자전거’로 상징되는 적정에너지, 적정기술이 어떻게 한 사회의 행복에 이바지하는지를 보여주는 역작이다.
■ 자전거는 공정하다
자전거가 자동차보다 훨씬 빠르다고 하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투르 드 프랑스에 출전한 프로선수들 이야기가 아니다.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네 바퀴로 가는 자전거” 하는 김광석 노랫말도 아니다. 우리가 매일처럼 타는 자동차는 실제로 자전거보다 매우 느린 교통수단이다. 물론 속도만을 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정체와 포화로 인해 차의 이동속도가 턱없이 느려진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만, 차를 구입 유지하는 비용과 연료비, 세금, 보험료, 통행료 등을 버는 데 바치는 시간까지 합치면 자동차는 자전거보다 훨씬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다. 우리는 차에 앉아 시속 80킬로미터의 속도를 만끽하며 달리지만, 사실은 시속 20킬로미터가 채 안 되는 자전거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셈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자동차를 움직이는 것은 에너지다. 휘발유를 쓰는 자동차건 요즘 각광받는 전기차건 상관없다. 교통 분야에 들어가는 에너지 사용량은 총에너지 사용량의 45퍼센트에 달한다고 한다.(미국 1970년 기준) 한 사회의 가용 에너지가 ‘속도’라는 이름 아래 교통에 독점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전거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달리기 위해 한정된 화석연료를 펑펑 쓰고 있는 셈이다.
더 큰 문제는 자동차가 제시하는 속도의 꿈이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자동차는 한 사회가 가진 가용에너지의 대부분을 독점할 뿐 아니라, 도로 건설비, 주차장 등의 공공시설 비용, 공해 비용 등을 유발함으로써 막대한 세금을 탕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자동차의 속도를 확보하는 데 투입되는 세금은 자동차 없는 사람들도 똑같이 부담한다.
누구나 자동차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세금은 당연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동차를 중심에 둔 교통시스템은 애초부터 차별에 근거한 것이다. 꽉 막힌 출퇴근 시간에 버스와 콩나물 지하철을 탈 수밖에 없는 사람은 한가한 시간대에 빠르고 편하게 이동할 수 있는 계층에 비해 운송시스템 자체에 의해 차별을 당한다. 시간은 돈으로 환산되고, 이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사람이 경쟁에서 앞선다. 물론 이 모든 불공정은 자동차를 가진 사람과 나아가 그 자동차를 생산하는 산업을 우선적으로 배려해 온 국가와 정부 탓이 크다. 개인이 아닌 사회가 제도적 불공정을 조장해온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집밖을 나서는 즉시 자동차를 타지 않고는 한 걸음도 이동할 수 없게 되었다. 겨우 몇 킬로미터를 가는 데도 차를 타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인간의 타고난 자력이동 능력을 퇴화하고, 인간의 노예인 줄 알았던 에너지와 자동차에 의해 거꾸로 노예가 되고 만 것이다.
이 책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의 원래 제목은 “에너지와 공평성”(Energy and Equity)이다. 공평성은 평등(equality)과 다르다. 평등이 ‘권리와 혜택의 고른 배분’이라는 산술적 의미에 치우쳐 있다면, 공평성은 정의(justice)와 관계된 것이고 주어진 사회적 차별을 보정한다는 적극적 의미를 가진다. 저자는 이 책에서 속도, 에너지, 자동차 등의 키워드를 통해 인간의 자유와 사회적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을 묻는다. 적정 에너지와 적정 기술을 넘는 순간, 사회는 공동체적 가치를 잃으며, 인간을 산업(수송산업)의 노예로 만든다는 것이다. 자전거는 인류가 도달한 최적의 기술, 최적의 에너지 효율을 가리키는 말에 다름이 아니다.
■ 속도에 마비된 상상력
에너지 소비와 수송산업의 발달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수송수단을 생산하고, 움직이게 하고, 주행과 주차 등의 편의를 도모하는 데 사회가 쓰는 총에너지의 45퍼센트가 들어간다. 사회적 가용에너지의 상당 부분이 사람들을 빠르게 이동시킨다는 명목 아래 쓰이고 있는 것이다. 1974년 기준으로 미국인 2억 9천만 명이 교통 분야에서 쓰는 에너지량이 13억의 중국인과 인도인이 모든 분야에서 쓰는 에너지를 훌쩍 뛰어넘는 현실이다. 이 에너지의 대부분이 ‘속도’를 높이는 마술에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속도가 아무리 증가하고 에너지를 많이 써도 우리는 도리어 시간이 부족하다며 안달한다. 우리는 하루 평균 32킬로미터를 이동하지만 사실상 반경 8킬로미터 내의 범위에서 맴맴 돌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발로 걸을 때보다 훨씬 좁은 반경 안에서 움직이면서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먼 곳까지 갈 수 있다고 착각한다. 더 큰 문제는 인간의 발이 수송수단에 의지하면서 대지와의 관계를 잃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발을 통해 시공간 속에 그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다. 발로 걷는 속도와 거리에 맞춰 그의 생활세계와 인간관계와 마을이 생기고 그에게 ‘의미’를 가진 세상이 구성되는 것이다. 우리는 빠른 속도로 달리는 차 안에서 창밖을 스쳐가는 풍경을 보며, 마치 자신의 활동범위가 넓어진 듯 착각하지만, 사실은 신기루에 불과한 세상만을 만나고 있는 셈이다. 스스로 발자취를 남기고, 의미와 기억을 심고, 주권을 주장할 수 있는 영토를 잃어버린 것이다.
■ 횡령당한 생활시간
사회가 속도를 우상화할수록 공평성은 저하한다. 왜냐하면 무제한의 속도를 누리는 데는 엄청난 비용이 들며,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이기 때문이다. 빠른 속도는 소수 인간의 시간을 고액의 가치로 자본화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대다수 사람들의 시간을 희생시킨 결과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쳇바퀴 돌 듯 출퇴근과 대중교통에 구속되어 있는 사이, 소수는 가장 교통이 편리한 곳에서 빠르게 이동하거나 비행기를 타기 때문이다. 1974년 미국 기준으로 해마다 전체 비행거리의 5분의 4를 1.5퍼센트의 인구가 독점하고 있다는 것만 봐도 그러하다. 돈이 있는 사람은 속도를 마음 놓고 구입할 수 있고, 그렇게 확보한 시간은 더 많은 자본을 확보하는 데 쓸 수 있다. 속도에 의해 생활시간을 횡령당하고 있는 현실을 좀 더 들여다보자.
표준적인 미국 남성은 1년에 1,600시간 이상을 차에 쓴다. 주행중이거나 정차해 있을 때만이 아니다. 그는 차를 사기 위해 계약금, 월부금을 벌어야 하고, 연료비, 보험료, 세금, 교통위반 시의 벌금을 내기 위해 노동시간의 상당 부분을 바쳐야 한다. 이 시간을 모두 합치면 하루에 깨어 있는 16시간 중 4시간에 달한다. 결국 표준적인 미국인은 1년에 1만 2,000킬로미터를 이동하는 데 1,600시간을 소비하고 있다. 이것은 시속으로 치면 7.5킬로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시속 7.5킬로미터면 수송산업이 발달하지 않는 나라의 사람들도 어디든 갈 수 있는 속도이다. 자동차 등록대수 2천만 대가 넘는 한국도 미국과 별반 다를 게 없다.
■ ‘자전거’는 왜 행복한가?
이반 일리치는 이 책에서 에너지 낭비와 속도의 무익함을 대신할 수 있는 이동수단으로 자전거를 든다. 자전거와 자동차는 모두 볼베어링 장치 때문에 가능했던 발명품이다. 왕복운동과 거기에 들어가는 에너지를 회전운동으로 바꾸어 속도를 높인 것은 인간 창의성의 빛나는 사례라 할 만하다. 하지만 볼베어링 기술에 엔진, 모터와 같은 동력원이 추가되면서 기술적 편의는 인간의 자율적 능력을 압도하여 오히려 부담을 가중시키게 되었다.
자전거는 보행속도인 시속 5~6킬로미터보다 3~4배 빠른 속도로 이동하면서 에너지는 보행의 5분의 1밖에 쓰지 않는 최고의 이동수단이다. 또한 자전거는 인간의 신진대사 에너지를 이동력의 한도에 정확하게 맞춘 이상적인 변환장치이다. 화석연료를 쓰는 모든 기계보다 열역학적 효율이 높을 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 모두의 능력보다 이동능력이 뛰어나다. 또한 자전거 주행에 필요한 공공시설의 건설비는 자동차보다 턱없이 적을 뿐 아니라, 자전거와 자동차 사이의 전체 가격차이보다도 적을 정도다.
또한 자전거는 공간의 활용도도 높다. 자동차 한 대가 주차하는 공간에 자전거는 18대를 세울 수 있고, 주행시 필요한 공간도 30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4만 명의 사람을 1시간 안에 다리를 건너게 하는 데 자동차는 12개, 버스는 4개가 필요하지만 자전거는 단 하나면 된다. 에너지 과잉 사용에 기초한 자동차의 저효율성과 사회적 불평등을 악화시키는 효과에 비해, 자전거는 적정 기술과 적정 에너지의 모범적 사례라 할 만하다.
■ 만들어진 ‘필요’와 ‘독점’에 기초한 사회
이 책에서 이반 일리치가 줄곧 주장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최적을 이루는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이 있다는 것이다. 최적 에너지가 있다면 최적 속도도 있을 텐데, 저자는 시속 25킬로미터가 넘는 순간 사회적 불공정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일리치가 이렇게 최적 에너지와 적정 기술을 강조하는 것은 필요와 소비에 기초한 산업사회의 논리 때문이다. 일리치는 말한다. “산업 생산물의 1인당 산출량이 일정 한계를 넘어서면, 그 생산물은 필요의 충족에 대하여 근본적인 독점을 행사한다.”
‘근본적 독점’(radical monopoly)이란 원래부터 인간에서 없었던 ‘필요’를 만들어내고는, 산업적 생산물이 아니면 그 필요를 충족시킬 수 없도록 만든 것을 말한다. 예컨대 인간의 타고난 이동능력을 수송산업이 장악하면, 그 생산물인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이동이 아예 불가능해지는 것과 같다. 근대경제학은 이러한 필요를 설득하기 위해 ‘희소성’(scarcity)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이반 일리치의 주장이다. 인간이란 자립적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 주어진 환경에서 자기 삶을 충분히 꾸려나갈 수 있는 존재임에도, 자본주의적 산업사회는 상품과 이윤을 위해 결핍(scarcity)을 과장하고 필요를 조작한다는 것이다. 동력에 사로잡힌 이동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목차
머리말
제1장 에너지 위기
제2장 교통의 산업화
제3장 속도에 마비된 상상력
제4장 시간 횡령
제5장 가속의 비효율성
제6장 수송산업의 근본적 독점
제7장 가늠하기 어려운 속도의 한계
제8장 자력이동의 효율성
제9장 주요수단으로서의 동력과 보조수단으로서의 동력
제10장 저설비, 과잉개발, 그리고 성숙된 기술
참고문헌
해설 / 박홍규(영남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