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개 코스 425킬로미터
스무 날 동안 걷고 만나고 기록한
제주,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

제주의 빼어난 풍광, 가슴 아픈 역사, 독특한 풍습을 섬세하게 포착해낸 역작

2007년 1코스를 개장한 제주올레는 2012년 21코스가 개장되면서 5개 지선을 포함한 총 26개 코스가 완성되었다. 제주올레가 불러온 걷기 열풍으로 전국에 크고 작은 트레일이 생겨났고 걷기는 그 자체가 하나의 문화 행위로 정착되었다. 나아가 ‘제주 이민’이라는 신풍속이 이어지며 제주는 여행지로서뿐 아니라 ‘새로운 삶의 정착지’로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이 책은 십여 년간 기자로 활동했으며 이후 문화예술 관련 글을 꾸준히 써온 저자의 제주올레 완주기로, 총 26개 코스를 걸으며 보고 만난 제주도,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은 물론, 가슴 아픈 역사와 독특한 풍습들이 길을 걷는 사람들,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길을 만든 사람들의 생생한 진술을 바탕으로 기록되어 있다. 저자는 길을 걸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중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꾼도 여럿이었다. 각 코스마다 그 길에서가 아니면 결코 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넘쳐난다. 저자는 사람들과 직접 나눈 대화 속에 오고 간 그 이야기들을 속속들이 책에 옮겨놓고 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뜻의 제주말 ‘폭삭 속았수다’를 제목으로 한 이 책은 159번째로 제주올레길을 완주한 저자의 제주 여행기이기도 하지만, 전 세계 트레일 관계자들이 주목하는 올레길의 탄생 과정과 그 길에 얽힌 제주의 문화와 역사를 총망라한 ‘제주올레 전문서’로도 손색이 없다. 게다가 한데 모인 26개의 길 이야기는 감동적이기도 하다. 저자는 각기 다른 매력과 이야기를 간직한 길을 따라 걸으며 그 길과 사람의 관계를 주의 깊게 살핀다. 길이 갖고 있는 자연환경과 더불어 그곳에 모이고 쌓인 사람들의 이야기가 결국 ‘길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길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통해 그 길을 상상할 수 있으며, 이야기에 이끌려 길을 찾아 떠나기도 한다. 아름답고 이색적인 풍경 없이, 혹은 제주 사람들의 독특한 말씨와 먹거리를 비롯한 그곳의 문화를 알지 못한 채 제주의 길을 떠올리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에메랄드빛 바다, 신비로운 정경의 오름, 물결치는 보리밭과 검은 돌담 등 제주의 빼어난 풍광은 이미 잘 알려진 대로다. 거기에 더해 저자는 제주 섬을 한 바퀴 돌며 좀더 구석지고 내밀한 곳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나무와 넝쿨식물ㆍ야생풀들로 이루어진 밀림 ‘곶자왈’의 비경과 눈물나무에서 황금나무로 변신한 감귤나무의 사연, 바람ㆍ돌ㆍ여자가 많아 일컬어지는 ‘삼다도’의 속사정, 이웃 동네 해녀들 간의 못 말리는 신경전, 제주도와 해병대의 오랜 인연, 제주 출신 재일교포들의 뿌리 깊은 애향심, 그리고 4ㆍ3사건의 비극과도 마주하게 된다.

“정말로 좀 쉬고 싶어서” 제주올레를 찾는 사람들
그들은 왜 힘들게 걸으며 쉬려고 할까

저자가 제주올레를 걷기로 작정하고 캐나다에서 날아왔다고 해서 매일같이 길을 걷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배탈이 나 쉬고 싶은 순간도 있었고, 길을 잘못 들어 애써 걸어온 길을 돌아가야 할 땐 짜증도 밀려왔다. 올레길을 걷고 있는 다른 이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저자가 길에서 만난 이들 가운데는 중장년층이 많았는데, 퇴직 후 전국을 여행 중인 사람도 있었지만 실직 걱정에, 돌연 찾아온 우울증에 힘들어하는 이들도 있었다. 제주올레를 찾은 이유는 “정말로 좀 쉬고 싶어서”인 경우가 많았다. 사람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이 고생을 하나”라는 자문을 던지면서도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길을 나섰다. 그저 묵묵히 걷는 이들에게는 “걷는 것 자체가 순도 높은 힐링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캐나다에 살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트레일 가운데 하나인 브루스트레일을 여러 차례 걸었던 저자는 ‘걷기’ 자체에 관한 이야기도 빠트리지 않는다. 왜 걷는지, 걷기의 좋은 점은 무엇인지,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 어떤 복장과 도구를 준비하는 것이 좋은지를 책의 곳곳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도로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올레길 화살표와 리본이 보이지 않는다. 코스를 벗어나 얼마나 걸었는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는다. 되돌아서 가는 길이 참 멀고 지루하다. 제주도에 온 이래 처음으로 나 스스로에게 짜증이 확 밀려온다. 길에서 벗어난 것이 문제가 아니다. 세상사에서 얻은 마음의 상처를 곱씹느라 길을 놓쳤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와서…… 그저 순하게 용서하자며 마음을 다잡는다. 다시 바다가 보인다.”(87쪽)

“호젓한 숲속의 오솔길을 걸으며 ‘나는 왜 걷는가’를 새삼 생각하게 된다. 트레일을 걷는 도보 여행이 여행의 여러 장르 중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축에 속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유람선이나 버스에 몸을 싣고 편히 쉬며 천천히 관광지를 돌아보는 것, 자동차를 타고 먼 거리를 신속하게 움직이며 많은 것을 보고 느끼는 것이 여행의 정형화한 패턴이다. 일반 여행이 몸을 어떻게 하면 좀더 편안하게 하는가 하는 쪽으로 진화해왔다면, 도보 여행은 몸을 어떻게 하면 더 불편하게 만드나 하는 쪽에 관심을 갖게 된다. 걷기 여행은 편하게 빨리 이동하며 보고 느낄 수 있는 방법을 일부러 멀리하면서, 낯선 곳에서의 모든 것을 몸으로 직접 느끼고 받아 들이게 한다. 몸을 불편하게 하는 여행은 곧 몸을 위한 여행이다. 숲속에 들어서면 모든 감각이 저절로 열리고 민감하게 작동한다. 새소리, 바람 한 점이 내 몸으로 스며드는 느낌.”(417~418쪽)

제주도의 독특한 풍습들, 기부 문화와 독립생활

저자는 여러 마을을 지날 때마다 어김없이 비석거리를 만나게 된다. 마을마다 그 마을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이들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을 세워둔 것인데, 현재 그곳에 살고 있는 이들을 통해 비석의 사연을 듣는다.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재일교포들의 사연이 담긴 공덕비다. 제주도 출신 교포는 마을마다 없는 곳이 없다. 일제강점기의 혹심한 수탈과 가난, 광복 후 4ㆍ3사건 등으로 쫓겨나다시피 일본으로 건너간 제주 사람들은 참담한 고통 속에서 번 돈을 고향에 희사했다. 육지에서는 고루한 말로만 남아 있는 애향심이 제주도에서는 지금도 곳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18코스에 있는 모충사에는 제주의병항쟁 기념비와 더불어 거상 김만덕의 묘가 모셔져 있다. 김만덕은 1795년 대흉년 때 전 재산을 털어 제주도의 기아민을 구휼한 의인으로, 저자는 이같은 김만덕의 의로운 행동을 제주 기부 문화의 또 하나의 상징으로 본다. 제주올레가 국내 트레일 가운데 유일하게 민간의 기부를 바탕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 또한 이렇듯 뿌리 깊은 제주의 기부 문화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육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제주의 독특한 풍습은 또 있다. “부모님 모시고 살아도 같이는 안 산다.” 길에서 마주친 제주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저자의 귀에 쏙 들어온 말이다. 그 말은 여러 코스에서 반복되었다. 제주에는 독립적으로 생활하는 노인들이 많다. ‘독거노인’이 아니라 이른바 ‘독립노인’인데, 자식이 없어서가 아니다. 제주는 예부터 부모와 자식이 한집에 살아도 살림을 따로 하는 문화가 발달해 있다. ‘철저한 분가 원칙’이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올레길을 걸으며 이러한 제주 사람들의 강한 독립 정신을 반영한 전통적 가족 제도를 처음 접하게 된다.

“예부터 제주도에서는 아들이 결혼하면 집과 경작지를 나눠주고 바로 독립시킨다. 장남이고 차남이고 예외는 없다. 부모가 집을 마련해줄 수 없어서 한 지붕 아래 살더라도, 경작지를 나누어 농사는 따로 짓는다. 부엌을 같이 써도 솥을 갈라서 상을 따로 차린다. 물론 제사를 함께 모시고 식사를 같이 하는 경우도 있고 음식을 나누기도 하지만, 기본 원칙은 어디까지나 분가이다. 과거 육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전통이다.”(157쪽)

아픈 역사, 제주 4ㆍ3사건

19코스 함덕해수욕장 동쪽으로는 서우봉이 우뚝 솟아 있는데, 이 봉우리를 넘으면 조천읍 북촌리이다. 이곳은 제주 4ㆍ3사건을 ‘공식 활자’로 써서 처음 세상에 알린 소설가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의 무대가 된 마을이다.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입은 곳이어서 비극을 상징하는 마을이 되었다. 마을 입구에서 만난 청년은 “현기영 선생을 아느냐”는 저자의 물음에 ‘순이삼춘’을 기억해내며 “남자들은 그때 거의 다 죽었다고 보면 된다”고 말한다. 여러 학살터 가운데 하나였던 너븐숭이에는 ‘너븐숭이 4ㆍ3기념관’이 들어섰다. 이곳에서 해설을 맡고 있는 고은숙 씨는 사건 희생자의 유족으로, 당시의 일들을 상세히 들려준다.
제주도는 신화 시대 이래 “기쁨은 모래알처럼 작았고 시련은 바위처럼 컸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험한 환경 속에서 역사를 이어온 곳이다. 제주도가 척박한 자연환경과 관권의 폭압 및 왜구의 노략질 등을 견뎌낼 수 있었던 건 특유의 상부상조하는 정신 덕분인데, 1948년 발생한 4ㆍ3사건 이후 마을 공동체 의식이 깨졌고 이는 가장 큰 아픔으로 남아 있다. 3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광기의 동족 대학살 당시 밀고당한 가족과 밀고한 가족은 한동네에 살면서도 지금까지 말을 섞지 않는다고 한다. 마을은 ‘폭도 부락’으로 낙인찍히고 후손들은 연좌제의 족쇄에 채워지는 등 고통은 계속되었다. 이후 정부에서 국가권력에 의한 대규모 희생이 이루어졌음을 인정하고 유족과 제주도민에 대한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는 등의 조치가 이루어졌지만, 저자가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뇌리 속에, 그리고 사건 당시의 총탄에 한 귀퉁이가 떨어져나간 등명대 건립비에는 이러한 아픔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저자는 제주올레길을 걸으며 “제주도 어른들은 인사를 해도 잘 받아주지 않는다. 너무 무뚝뚝하다”며 서운한 감정을 토로하는 올레꾼들이 귀기울이면 좋을 이러한 이야기들을 전하고 있다.

제주올레와 트레일 문화

※ 이 책 『폭삭 속았수다』는 2013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우수기획안 지원’ 사업 당선작이기도 하다.

2000년대 한국이 만들어낸 문화상품의 최대 히트작은 제주올레와 한류이다. 한류, 그중에서도 대중음악이 세계 대중들의 새로운 취향에 정교하게 부응한 것이라면, 제주올레는 한국 사람들의 21세기형 여가 문화 욕구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한국에서 여가 문화에 대한 욕구가 최고조에 달한 즈음, 제주올레가 그것이 분출할 수 있는 새로운 물꼬를 터준 것이다. 색다른 여가 문화를 즐기기 위해서든, 무한 경쟁으로 인해 생긴 피로감과 상처를 해소ㆍ치유하기 위해서든 한국 사람들은 제주올레길이 열리자 뜨겁게 호응했다.
2007년 9월 17일 1코스를 개장한 제주올레는 2012년 11월 24일 21코스를 개통하면서 제주 섬을 한 바퀴 도는 약 440킬로미터의 길로 완성되었다. 제주올레길은 바다와 하늘, 산과 들, 오름과 목장 등 아름다운 자연 조건을 두루 갖춘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아일랜드 트레일’이다. 트레일로서 최상의 조건을 두루 지닌 제주올레가 갖추지 못한 한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그 길의 정체성을 밝히는 ‘제주올레 이야기’이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은 말한다.
“이런 지적을 하는 이들이 있다. 제주올레길의 풍광은 세계적으로 손색이 없으나 산티아고나 시코쿠 길처럼 길에 ‘스토리텔링’이 없지 않느냐고. 그냥 걷기만 하는 건 단순하니 길에 역사와 문화를 입혀서 업그레이드해야 한다고”(『꼬닥꼬닥 걸어가는 이 길처럼』, 북하우스, 2010).
스페인의 산티아고, 일본의 시코쿠, 영국의 코츠월드웨이, 캐나다의 브루스트레일 등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트레일들이다. 이 길을 걷기 위해 사람들은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다. 유명 트레일들은 큰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는 길을 둘러싼 아름답고 평화로운 자연 조건, 둘째는 길 자체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 ‘길 이야기’를 예외 없이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야기를 일부러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길에 녹아 있는 것을 수집ㆍ정리해 트레일의 문화적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 정체성은 길의 브랜드가 되어 전 세계에 트레일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있다.
산티아고는 예수의 제자 성야고보의 무덤을 찾아가는 순례의 길로, 시코쿠는 일본의 명찰 순례 길로 유명하다. 캐나다의 브루스트레일은 수만 년 전 나이아가라 지대의 지각 변동으로 생겨난 원시림 속을 지나는데, 이 트레일 관계자들은 숲속의 길을 찾아 이으면서 숲에 사는 동식물을 하나하나 연구했다. 그 성과를 잡지와 단행본을 통해 정리ㆍ소개함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풍성한 자연 자원을 가진, 세계에서 가장 긴 숲길이라는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브루스트레일 사무국은 교수급 연구자 두 명을 상근 직원으로 두고 있다).
스토리텔링은 제주올레를 브랜드로 만드는 데도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이다. 물론 제주올레길을 주제로 쓴 좋은 책들이 여러 권 나와 있다. 그러나 그 책들은 제주올레길이 완성되기 전에 쓰여졌고, 내용 또한 제주올레길을 부분적으로 다룬 까닭에 제주올레길 전체를 조망하는 스토리텔링으로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추사의 유배지 등 역사적으로 유명한 현장들은 제주올레 가이드북에도, 정보서에도 잘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누대에 걸쳐 길 위에 쌓이고 쌓인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지금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의 이야기, 길을 걷다가 감명 받아 그곳에 정착한 사람들의 이야기 등 길과 사람의 관계를 전반적으로 조명한 책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2013년 4월 세계트레일컨퍼런스에서 제주올레길의 현황에 대해 발표한 이수진 씨(제주올레 비주얼커뮤니케이션 팀장)에 따르면, 세계 각국의 트레일 관계자들이 신생 트레일에 대해 가장 많이 관심을 갖는 대목이 바로 길과 사람의 관계였다. 길 주위에 어떤 사람들이 살며, 길은 그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누가 만들었으며, 사람들이 왜 찾아오는가라는 점에 특히 주목했다는 것이다. 이는 트레일의 성격과 지속 여부를 파악할 수 있는 관건이기 때문이다.
제주올레는 탄생한 지 5년여밖에 되지 않은 ‘꼬마 트레일’이지만 수려한 풍광과 한국 사회에 끼친 문화적 충격으로 인해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2013년 4월 미국 피닉스에서 열린 세계트레일컨퍼런스(미국 주최)에서 ‘올해의 트레일’로 선정되는 등 제주올레는 세계 트레일 관계자들 사이에 ‘트레일 신데렐라’로 떠올랐다. 제주올레를 찾는 연 인원이 50년 전통이 넘는 캐나다 브루스트레일의 두 배를 넘는다는 사실 또한 경이로운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2012년 제주올레를 찾은 사람은 백만 명으로 집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