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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동자석이 지니고 있는 의미와 가치및 특징에 대한 자료입니다.

제주 문화속의 동자석

제주 동자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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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분묘

제주의 산[묘]은 봉분에 산담을 두르고, 산담 이외에 상석을 놓고 비석, 동자석, 인석, 망주 등 여러 가지 석물들을 세우기도 한다. 이를 ‘오행물’이라고도 하는데, 망인(亡人)에 대한 후손들의 예의이면서, 집안의 위풍을 보여주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상석, 비석, 동자석, 인석, 망주를 함께 차린 산의 석물을 ‘가진 석물’이라고 한다. 지금은 신분이 엄격히 구분되는 세상이 아니므로, 망인의 산에 설치하는 석물도 그렇게 엄격히 구분하여 차리지 않는 편이나 예전에는 엄격히 신분에 맞게 갖추는 편이었다.

우선 봉분과 산담이 조성되어 묘역의 모습을 갖추게 되면 석물의 기준이 되는 상석(床石)을 앉힌다. 상석 앞에는 반드시 향탁(香卓)을 놓아야 한다. 상석(床石)은 양척으로 2자 2치이나 침척(針尺)으로 1자 8치가 안되는 크기로 만든다. 통상 살아있을 때 개인 밥상 크기가 된다. 가정 형편상 비석을 세울 수 없을 때는 반드시 혼유석을 놓는다. 혼유석은 일명 ‘지방석’이라고도 하는데, 망인의 영혼이 앉아서 후손들의 배례를 받는 곳이기 때문이다. 묘소를 찾아 지내는 묘제 때에도 그곳에 영혼이 있다는 관념으로 제사를 모시게 되는 것이다. 나중 형편이 되어 비석을 세우게 되면 반드시 혼유석은 제거해야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제주 분묘 전경1 제주 분묘 전경2

비석은 ‘체석’(體石)이라고도 하는데, 봉분의 높이가 석 자 이내 이므로 비석의 높이도 석 자를 넘지 않도록 하는 편이다. 비석은 정면을 보도록 왼쪽 앞에 세운다. 비석은 묘지에 따라 크기가 조금 다른 편이다. 일반적으로 묘지는 일반묘지, 가족묘지, 공동묘지로 나뉜다. 일반 묘지의 비석은 보통 석 자의 것을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가족묘지는 일정한 면적을 제장터라고 하여 가족묘지로 정하게 되면 그곳에 제단과 큰 묘비를 설치한다. 이 경우에는 5자 정도의 묘비를 사용하는 편이다. 제단 비석을 세우고 한 곳에서 제사를 모실 수 있도록 제단을 설정한 후 묘가 조상부터 차례대로 들어오면 각 묘 앞에 비석을 세우는데 이를 표기 비석이라고 하며 석 자를 넘지 않는 것이 예의상 좋은 편이다. 비석을 세울 수 없는 경우 산을 구분하기 위해 산담이 신문(神門) 방향으로 구분하여 나중에라도 후손들이 알 수 있도록 표시하였는데, 이 경우 앞에서 보아 왼편에 난 신문인 경우에는 망인이 남자이고, 오른편의 경우에는 여자인 경우였다고 한다. 합묘하는 경우를 ‘합폄’이라고 하는데, 비석을 세우지 않은 경우에는 알 수 없었으므로 신문을 양쪽에 설치하여 합묘임을 알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이 경우 나중에 비석을 세울 경우에는 중앙에 설치한다.

그리고 비석이나 석물들은 선대(先代) 산에 설치하지 않은 경우에는 후대(後代) 산에도 하지 않은 것이 상례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 등을 확인하고 맞추어서 하게 되므로, 비석과 동자석은 통상 3년에서 5년 사이에 하는 것도 예의(禮義)로 보는 편이었다. 요즘은 영장이 나도 석재사가 있어서 곧바로 비석 등을 준비할 수 있으므로 즉시 세우는 편이다. 비석을 하면 함께 ‘동자석’도 차려 모실 수 있다고 한다.

인석은 두 가지로 구분하였는데, 문인석(文人石), 무인석(武人石)이 그것이다. 정상품의 통정대부나 정이품의 가선대부의 벼슬을 지냈거나, 생전에 벼슬을 지내지 않다가도 벼슬을 받은 망인(亡人)의 경우에는 문인석을, 무과(武科)에 등과하여 무관직을 지냈거나 벼슬을 받은 망인의 경우에는 무인석, 장군석을 세워 구분하였던 것이다.

망주는 ‘망자’,‘망주석’(望柱石), ‘망두석’(望頭石), ‘망주석표’(望柱石表)라고도 불리는 것으로, 주로 산에 모신 망자가 남자의 경우에 한하여 세우는 편이었다. 특히 무과(武科)직에 종사하였던 분의 산에 주로 세웠다고 한다. 반면 석상은 망자의 성별에 관계없이 세우는 편이었다. 차량이 흔해 교통이 편리해진 요즘과는 달리, 그날 행상(行喪)을 하는 것만도 큰일이었는데, 망주와 석상 같은 것을 함께 가지고 가서 설치할 겨를이 없었다. 월라산에 있는 망주의 경우 장방형의 거대한 산담 안에 동자석과 문인석 사이에 세워져 있다. 4각 기둥에 모서리진 부분을 가공하여 8각으로 만든 다음 상부에 유두(乳頭) 모양으로 각하여 얹은 형태를 하고 있다. 상부의 모습은 유두 이외에도 남근, 꽃봉오리 등 다양하다. 큰 것은 170cm에 이르기도 하나 작은 것은 77cm에 지나지 않는 것도 있다. 망주의 경우 주로 현무암을 재료로 하여 본터에서 만들어 세우는 편이었다.

동자석

직함을 가지고 부유하게 살았던 사람들은 담뱃대를 들고 앞서거나, 초롱을 들고 앞서도록 하면서 시동을 부렸듯이 그렇게 데리고 살았던 것이 동자(童子)였다. 이렇듯 생전에 도움을 받고 살았던 동자를 죽어서도 데리고 살 수 있도록 갖추어 주었던 것이 산[묘]의 ‘동자석’인 것이다. 신분제도가 엄격하였던 과거에만 하더라도 무덤의 동자석은 망인의 직함에 따라 설치할 수 있고 없었던 것이었다고 한다. 하층민은 생전에 동자를 두고 살 수 없었듯이 죽어서도 동자석을 둘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자석은 삼척(三尺) 이내로 만드는 편이다. 숙련공들이 만들어 조형성이 뛰어난 육지부의 문인석(文人石)과 달리 비숙련의 토착민들이 필요에 의해 만들다 보니 조형적인 세련미는 떨어지는 편이다. 주로 방형(方形)의 사각기둥을 재료로 하여 음각(陰刻)을 위주로 만들었는데, 동자석은 크게 두부와 흉부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두부(頭部)는 머리와 얼굴을 표현한 부분으로 전면의 경우 얼굴과 입 부분은 음각 실선으로 처리하였으며, 후면은 댕기를 표현한 것과 표현하지 않은 삭발형의 모습으로 처리하고 있다. 이 표현법에 의해 민머리 삭발 동자석, 댕기머리 동자석 등으로 구분되는데, 이것이 바로 제주동자석이 갖는 특징 중의 하나다. 이는 다른 지방의 경우 기능공이 만들어 다양한 표현이 가능했던 반면, 제주도의 경우 비숙련의 토착민들이 만들다 보니 표현 방법에 제한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자석1 석물 동자석2

동자석은 두부를 제외하면 어깨부터, 요대(腰帶) 위로 모은 손과 가슴을 표현하고 있는 흉부(胸部)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흉부는 방형의 특징이 보여주듯 전면과 양측면, 후면으로 이루어진다. 전면은 가지런히 모은 손에 주전자, 술병, 술잔, 부채, 홀, 창, 꽃 등을 들고 있도록 양각으로 조각하였으며, 양측면은 소매를 표현한 모습을, 후면은 관복 위로 요대(瑤臺)를 두른 모습을 조각하고 있다. 화산섬 제주에서 풍파를 견뎌내며 바다를 개척하고, 밭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던 제주 사람들은 삶이 각박했던 것 이상으로 저승에서 평온을 기원하며 영혼을 위하는 이승에서의 신앙이 다양한 것으로 느껴진다. 다양한 신들이 존재하는 무속에서 만큼 산의 민속도 그것에 맥이 닿은 것은 아닌지 살펴볼 일이다.

동자석에 피는 석화(石花)는 지역에 따라 다른데 바닷가 지역이 덜 피는 편이다. 가랑비가 많이 오고 안개가 자주 끼는 교래리 지역 같은 곳에서는 5년 내에 꽃이 피기도 한다. 그러나 50년이 지나도 그냥 있는 곳도 있다. 예전에는 생기(生氣) 처와 사기(邪氣) 처라 하여 구분하기도 하였는데, 석화가 잘 피고 꽃 같은 것이 잘 자라면서 농사도 잘 되는 곳이면 생기 처라 하였다. 이러한 지역은 모든 것이 살아나는 곳이라고 믿었다. 반면 사기 처는 모든 것이 죽어지내는 곳이라서 해서 좋지 않은 곳으로 구분하였다. 해수(海水)가 들어오는 곳은 특히 석화가 잘 피지 않는 지역이었다.

집필자 : 김동섭 (제주특별자치도 박물관운영부 연구관)
담당부서 :
제주시 정보화지원과
담당팀 :
정보지원담당
전화번호 :
Tel) 064-728-2293, Fax) 064-728-22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