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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제주도 시인’ 오승국이 드디어 시집을 냈다. 나이 환갑에 이르러 발간하는 첫 시집이니 그의 말처럼 ‘너무 늦게 나온 시집’이기도 하다. 발문을 쓴 김수열 시인의 표현처럼 ‘오랜 유예를 마치고 마침내 도착한’ 이 시집에 실린 시편들은 그의 문청시대를 포함하여 지난 40여 년 어간에 써냈던 글들을 가려 묶은 것이다. 40년의 시력이면 꽤 묵직한 두께의 시집이 되어야 마땅하나, 이 시집에 실린 시편은 고작 서른 편이다. 이리된 사연은 그동안 예전에 써두었던 시들도 이리저리 망실되어 찾을 수 없었고, 그나마 주변 지인들이 나서서 이책 저책에 실렸던 글들을 긁어모아 그중에서 지금 보니 조악하다 생각되는 것 버리고 묶다보니 이렇게 된 것이다. 그는 “첫 시집에 오르지 못한 내 젊은 날의 모든 시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오 시인의 문학과의 인연은 대학시절부터 시작된다. 제주대학 문학동아리 <신세대>에 가입하면서 그의 문청시대는 열렸다. 당시 신세대는 소위 진보적 문학동아리였다. 현재 제주에서 활동하는 역량 있는 시인 중 이 신세대 출신들이 많다. 김수열 시인은 발문에서 “문학동아리 <신세대>에 가입한다는 것은 이미 그가 문학에 뜻을 두었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 제가 발 딛고 선 제주를 자양분 삼아 민족과 민주와 민중을 담아내는 그런 문학으로 지향점을 삼았다는 것이다. 문학동아리 <신세대>는 제주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출중한 문청조직”이라고 했다. 어쨌든 그는 이들 신세대의 멤버들과 젊은 날의 우정과 객기, 진보적 낭만(?)을 찾으면서 시인이 되어 갔다.
대학 1년을 마치고 군대에 가게 되는데, 여기엔 일종의 전설이 있어 짧게 소개한다. 입대 날 논산훈련소에 늦게 도착해보니 영문이 잠기고 위병소에서는 집으로 돌아가서 다음번에 다시 오라고 하자 그 문을 잡고 돌아갈 수 없다고 지구전을 펼친 결과, 일반 훈련중대는 이미 인원 편제가 끝났던 터라 주로 헌병이나 특전사 카투사로 뽑혀 가는 훈련중대에 배치된 것이다. 이 훈련기간 벌어진 듣다 보면 배꼽을 잡게 되는 에피소드들이 꽤 있어 술자리 담화로 최고의 안줏감이었다. 사실 오 시인은 동 세대의 평균 키인 170cm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그런 그가 특전사나 헌병으로 뽑혀갈 훈련중대에서 훈련받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그렇게 지각한 탓에 카투사가 된 그는 동두천에서 근무하게 되는데, 이 기간에도 쉬지 않고 시를 썼던 모양인데 이 시집에도 실려있다. 동두천은 주한미군이 오래도록 주둔한 곳으로 소위 양공주, 양키, 양주 등이 떠오르는 곳이었기에 그는 말로만 듣던 소위 제국 아메리카 양키들의 만행과 동두천 주한미군 생태계를 들여 다 보았던 경험을 시로 남긴 것이다.
3년 군대생활을 마치고 제대한 그는 복학하여 신세대 활동을 지속하다 대학을 마친다. 졸업 후 <신세대> 선배들이 활동하던 문학동인 <풀잎소리>에 가입하여 시작 활동을 계속한다. 또한 제주에서는 87년 유월항쟁 이후 장르별 문화운동 그룹들이 이 시기에 속속 생겨나는데, 신세대 인맥이 주를 이루던 제주문화운동협의회 소속 <청년문학회>에 가입하여 진보적 문화운동에 가담하면서 지역문화운동가로서 성장해 나간다. 이 당시까지 오 시인은 늘 책 한 권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면서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문화운동판의 마당발이 되어있었다. 이 시기 그의 별칭이 ‘자칭타칭 민족시인’이었다.
개인적인 에피소드인데, 언젠가 제주의 민주화운동사를 다룬 사진집들을 보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 적이 있었는데, 제주지역 민주화운동의 현장에서 찍힌 사진들 중에 그가 끼지 않은 사진은 보기가 힘들 정도였는데, 우연인지 의도였는지, 현수막을 펼치면 늘 그가 어느 한쪽에서 잡고 있던 것이다. 혹시나 하여 다시 뒤적여도 마찬가지였다. 현수막을 들면 절대 트리밍 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
그 후 오 시인의 활동반경은 4·3으로 옮겨간다. <제주4·3연구소> 사무처장을 맡으면서 4·3 관련 활동을 열정적으로 이어나간다. 물론 4·3과의 인연은 이미 이전에 제주도의회 4·3특위에서 주도하여 처음으로 4·3피해신고조사가 시작될 때, 조사요원으로 2년여간 활동한 바 있다. 당시만 해도 4·3생존자들이 많이 살아 있을 때였고, 그들을 일일이 만나 신고서를 작성하면서 생존자 및 유족들의 개인사에 드리운 4·3으로 인한 상처와 회한을 육성으로 접하면서 4·3에 대한 그의 인식은 더욱 깊어졌을 것이다. 이 시집의 시편들 중 <죽었다가 살았다가 또 죽었네>, <키 커부난 죽언>, <진혼> 등이 그 육성을 시로 남긴 것들이다.
연구소의 4·3사무처장을 맡으면서 그는 이제 연구소의 아이콘이 되어 갔다. 4·3관련 각종 집회나 성명서 기자회견 때면 예외 없이 그가 나서서 마이크를 잡거나 원로들을 모시고 자리잡고 앉아 있는 모습이 카메라에 종종 포착된다. 특히 이 시기 그는 4·3유적지 해설가로 유명세를 누렸다. 이때 마침 소위 다‘크투어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4·3유적지 탐방을 찾아 제주에 온 단체나 그룹들은 우선 4·3연구소에 먼저 물어온다. “저 혹시 유적지 안내를 해주실 수 없을까요?” 하면 오 시인이 나설 수밖에 없었고, 그런 횟수가 하나둘 늘더니 어느 날 오 시인이 4·3유적지 해설사로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것이다. 물론 거의 봉사활동이나 다름없던 사무처장의 가난한 주머니를 나름 쏠쏠하게 채워주는 건 덤이었다.
그러던 중 정부의 4·3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고 4·3의 법적 제도적 해결이 시작될 즈음, 4·3평화공원이 조성되고 평화재단이 문을 연다. 이때 그는 4·3평화재단 직원으로, 소위 그동안의 활동을 인정 받아 경력직 직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때부터 이제 거리나 소위 문화판보다는 주로 평화재단이 벌이는 행사장에서 곧잘 그의 얼굴을 보게 된다. 오 시인이 시들에게 미안하게 된 시기는 바로 이 시기부터였다. 공기관의 실무직원으로 정부미를 먹게 되면서 게을러지기 시작했는지, 아니면 일에 치여 시 쓸 시간이 없어서였는지, 카투사일 때도 시를 썼던 시인 오승국이 시와 소원해진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몇 편의 작품들을 써냈는데, 다름 아닌 위령비에 새겨진 추도시들이 그것이다. 이 즈음에 도내 곳곳에 4·3위령비가 세워지기 시작했는데, 오 시인의 추도시들이 4·3위령비들에 꽤나 많이 새겨져 있다. 혹 그 위령비들을 보게 되면 그의 추도시들을 재미 삼아 한 번쯤 찾아보시길 권한다.
올해 환갑인 오 시인에게도 정년퇴임은 여지없이 찾아왔다. 재단 사업팀장을 거쳐 4·3평화재단 산하 4·3트라우마센터 부센터장으로 일하던 그도 예외 없이 정년의 끝에 다다른 것이다. 그런 와중에 오 시인이 회원으로 있는 <제주작가회의> 동료와 후배들이 발 벗고 나섰다. 그의 시집을 내자고 도원결의를 한 것이다. 안 그러면 그의 시집은 영원히 빛을 볼 날이 없을 거라고 선배 후배가 거들었다. 그렇게 몇 개월을 볶아댄 결과 이 시집이 세상에 나왔다.
정년퇴임을 하고 나면 아마도 이제 제주의 문화판 곳곳에서 그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된다. 늘 책 한 권 옆구리에 끼고, 다시 시인이 되어 문화판을 마당발로 쓸고 다닐 그가 눈에 선하다. 아마도 그의 두 번째 시집은 훨씬 가까운 시일 내에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그의 신작 시들을 만날 날을 고대한다.
오 시인의 첫 시집인 만큼 이 시집에는 그의 젊은 날의 시편들이 실려있다. 어쩌면 그에게는 추억의 시집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집의 제목도 ‘아쉬운 기억’이다. 새로운 시편들은 아니겠지만, 오히려 오 시인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시편들을 통해 우리가 살아낸 지난 40여 년간의 아쉬운 기억들을 다시 소환하거나 환기할 수 있다는 점, 그런 동시대적 공감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측면의 묘미가 있다. 오 시인을 알고 지낸 독자나 모르는 독자나 한 번쯤 ‘제주도 시인’ 오승국의 시집을 펼쳐보시길 권한다.
발 문
오래된 유예를 마치고 마침내 도착한
김수열(시인)
1.
오승국 시인의 첫 시집 『아쉬운 기억』의 원고를 받았다. 원래 일정보다 조금 뒤늦었지만, 무척이나 반가웠다. 아니 반가웠다기보다는 고마웠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것 같다.
올해로 그는 육십갑자를 한 순배 돌아 원래 있었던 자리로 돌아온, 환갑을 맞는 해이다. 그리고 정년이 되어 그가 다니던 제주4·3평화재단(그는 지금 제주4·3평화재단 산하 제주4·3트라우마센터 부센터장으로 근무하고 있다.)에서 자리를 훌훌 털고 책상을 정리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해이기도 하다.
그런 저간의 사정을 알고 있던, 적당히 죽이 맞는 몇몇과 우연히 함께 한 술자리에서(그 자리에는 당연히 오승국 시인도 있었다.) 어기차게 한 약속이 있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금년 퇴직 전에 첫 시집을 세상에 내놓자는 것이었고, 그가 시집을 내놓는 데 있어서 각자 역할을 나누었는데 내게 주어진 일거리가 다름 아닌 이 글을 쓰는 일이 되고 만 것이다.
물론 그 자리에는 그에 대한 면면을 더 지근한 거리에서 더 오랫동안 함께 한, 그를 꼭 닮은, 아주 오랜 벗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쓰게 된 건 - 지금 돌이켜보면 ‘느가 쓰는 게 맞다. 아니우다 성이 써 삽주.’ 하는 부질없는 밀당을 주고받기엔 술집의 코로나 영업 제한시간은 너무 급하게 다가왔고, 그렇다고 2차를 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더군다나 오늘은 이쯤에서 작파하고 다음에 다시 만나 논의하자고 하기엔 - 그의 시집 출간이 너무 간절하게 와 닿았던 사정이 있었다.
막상 원고를 받고 보니 오래전에 쓴 시편들을 붙잡고 무척이나 고민이 깊었을 거란 생각이 우선 들었다. 환갑을 관통하는 나이에 첫 시집을 내면서 그는 30여 년 훌쩍 바깥이던 문청 시절에 썼던, 이를테면 대학 시절의 시편들이나 군을 제대하고 발표한 군 관련 시편들을 보면서 참 많은 회한에 잠겼으리란 생각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때 발표한 것과는 결이 달라진 시편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그가 직접 얘기했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되다 보니 조악한 것들이 눈에 띄어서’ 뺄 건 빼고 덧붙일 건 덧붙이는 수고를 머리에 쥐가 나도록 했다는 얘기다.
헤아려보니 30편의 시와 1편의 산문이 들어있다. 통념으로 봤을 때 편수가 부실하다 할 수 있겠지만 시의 편수가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긴 소출이 그러할진대 달리 방법이 없지 않겠냐고 위안으로 삼아본다. 물론 시집을 내기로 약조하고 새롭게 쓴 시편들도 여기에 더러 포함되어 있다.
시를 써본 사람은 안다. 시가 무슨 자판기에서 커피 뽑듯 동전만 집어놓으면 자동으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장마철 가난한 집에 빗물 새듯 천장에서 줄줄 떨어지는 것도 아니란 것을 말이다. 이를 계기로, 한 바퀴 갑자를 돌아 새롭게 출발 지점에 선 그에게 시의 신께서 강림하시어 문운이 창창하기를 절절히 빌어 마지 않는다.
어림잡아 헤아려보니 그와 함께한 세월이 그럭저럭 40년이 되어 간다. 그와 함께 나눈 말을 풍선에 담아 떠올리면 아마도 그가 나고 자란 남원 태흥리 앞바다에 있는 지귀섬 정도는 거뜬히 들어 올릴 무게일 것이고, 둘이서 함께 쓰러뜨린 술병을 일렬로 이어보면 그가 나고 자란 산남과 내가 자란 산북을 족히 왕래할 만한 분량의 시간을 함께 지내온 듯하다.
연례행사로 이미 자리 잡았는데, 올여름 그와 함께 남원읍 속령이골에 있는 무장대 무덤 벌초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의 고향 태흥리에 잠깐 들렀다. 유년 시절 그가 놀았던 포구와 지금은 흔적조차 사라져버린 소금밭 ‘펄개’ 풍경 앞에 잠시 말없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리고 해안도로로 차를 몰고 나오는데 그가 한 마디 툭 던진다.
“이 해안길이 나, 어릴 때 학교 다니는 길이라 났수다. 벗들은 다들 지름길로 가는데 난 참 이 길이 좋읍디다.”
해녀를 어머니로 둔 오승국 시인의 유년은 당연히 바닷가에서 하루가 열렸을 것이고 바닷가에서 하루를 갈무리했을 것이다. 바닷가에서 유년을 보낸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등하굣길을 혼자서 바닷길로 다녔다면 이건 좀 다른 문제가 된다. 놀이의 공간으로서의 바다가 아니라 오승국 시인에게 태흥리 바다는 그것과는 결이 다른 그 무엇을 덤으로 안겨준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자,
“벗도 어시 혼자 바당길을 왔다갔다 허멍, 뭐했나?” 하는 물음에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혼자 헐 게 뭐 있수과? 모르쿠다. 그냥 좋읍디다.”
모르긴 뭘 모르겠다는 건가. 소싯적 그의 문학적 감성을 일깨워준 게 있다면 나는 단언한다. 그의 고향 바다가 그를 깨우쳤으리라고. 지금은 고향을 등지고 거처를 옮겼지만 저물어 귀소하는 새처럼 조만간 고향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고, 지금 몸은 여기 있어도 그는 늘 태흥리를 말하고 태흥리와 함께 산다.
2.
그에게 문학과의 본격적인 인연은 대학에서부터 시작이 된다. 대학 문학동아리<신세대>에 가입하면서 그의 문청 시대가 열린 것이다. 문학동아리<신세대>에 가입한다는 것은 이미 그가 문학에 뜻을 두었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 제가 발 딛고 선 제주를 자양분 삼아 민족과 민주와 민중을 담아내는 그런 문학으로 지향점을 삼았다는 것이다. 문학동아리<신세대>는 제주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출중한 문청조직이고 그곳에서 배출된 문인들을 헤아리자면 열 손가락으론 부족할 정도다. 그와 가근한 시인들만 꼽자면, 지금도 호시탐탐 보성시장 현경식당에서 순대와 머릿고기를 가운데 두고 ‘콩이여 팥이여’ 술잔 기울이는, 그의 동기인 강덕환 시인이 있고 1년 후배인 김경훈 시인이 있다. 그네들끼리 만날 때마다 <신세대> 출신이 아니라는 것이 나는 약간 약이 오른다.
그는 대학 1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하게 되는데, 동두천에 위치한 미군부대의 카투사로 복무한다. 관념적으로 머리에 맴돌던 아메리카의 실상을 그는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들의 행태를 통해 여실하게 깨닫게 된다. 이번 시집에 실려 있는 「동두천 하늘 아래」 연작은 그 무렵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인데 지금 읽어봐도 오목가슴이 절여 오는 짠한 수작들이다. 한국의 양공주가 웃음시중 술시중을 드는 미군 전용 업소(그의 말에 따르면 미군을 동반하면 카투사도 출입이 가능했다 한다)에서 만난 ‘조선 민들레’들에게 그가 어떤 연민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을 상대하는 양키들의 추행에 어떤 분노를 느끼고 있었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한국인 출입금지 / 보산동 미군거리 // 내 땅에서 추방당한 / 황당한 기분으로 / 냉랭한 가슴속을 / 더욱 움츠리게 했던’ 낯선 곳에서 그는 말할 수 없는 아픔을 느껴야 했고, 호흡이 정지된 상태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기막힌 계약 불평등 언약으로 / 한 마디 저항도 못 했고 / 미군 병사는 소리 없이 떠난’ 빈자리를 바라보면서 그는, 제대하면 미국으로 데려가겠다는, 가서 결혼하겠다는 미군의 달콤한 사탕발림만 믿고 어떤 폭력에도 한 마디 저항도 하지 않고, 가난한 고향이 싫어 가난이 대물림되는 이 조국이 싫어, 지금은 얻어터지더라도 조금만 참고 견디다가, 마침내 아메리카에만 가면, 가서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만 되면, 하고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조선 민들레’는 결국 말 한마디 없이 도망치듯 고국으로 떠나버린 미군의 농간에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진 채 초점 잃은 눈으로 그쪽 하늘만 우두망찰 바라보는 그런 민들레들을 수도 없이 보아야 했다.
더욱 안타까운 건 그런 ‘조선 민들레’들이지만 다시 밤이 찾아오면 어쩔 수 없이 온몸에 어둠을 바르고 먹고살기 위해 빈약한 얼굴에 다시 미제 향수를 뿌리고 꽉 끼인 코트를 입고 야윈 허리를 개망초처럼 꺾여야 했다. 희고 검은 미군 병사들이 ㅤㅆㅘㄹ라ㅤㅆㅘㄹ라 외자기는 코 큰 말들이 산탄총처럼 텅 빈 몸에 피멍으로 꽂혀도 그 통점과 통증마저 감추고 눅이면서 위대한 달러 앞에 무릎 꿇고 어제처럼 오늘도 까라면 까야만 했다. 결국 동두천에서의 ‘한국적인 소리는 늘 (미군) 헬리콥터에 묻혀’ 사라져가고 만다는 사실을 여실하게 깨닫고 그는 3년간의 복무를 마치고 제주로 돌아온다.
이러구러 대학을 졸업하고 <신세대> 선배들이 주로 활동하고 있는 문학동인 <풀잎소리>에서 그는 문학의 꿈을 이어간다. 어느 날 한 선배가 시 두 편 가지고 동인에 들어오라 했다 한다. 그 무렵 <풀잎소리> 동인에 입회용으로 제출한 시 중의 한 편이 「억새별곡」이다. 그에게 동인 가입을 권한 그 선배는 안타깝게도 지금 이승에 없다.
1987년 유월항쟁 이후 봇물처럼 터져 나온 민주화의 열기에 힘입어 제주에서도 부문별 운동체가 결성이 되는데 문화예술부문의 조직체로서 <제주문화운동협의회>가 그해 8월에 결성이 된다. 놀이패<한라산>, 노래패<우리노래연구회>, 문학패<제주청년문학회>가 그것인데 오승국 시인은 <제주청년문학회> 창립 멤버의 한 사람으로 합류하면서 그의 진보적인 문학 행보는 계속 이어지게 된다.
그해 겨울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직선제를 쟁취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죽 쒀서 개 준’ 꼴로 권력을 빼앗긴 민주진영은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다음 해에 있을 국회의원 총선만큼은 반드시 쟁취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충만하고 있었다.
그런데 제주에서 기막힌 일이 벌어지고 만다. 1988년 4월25일 총선 하루를 앞두고 오후 5시경 제주MBC의 개표상황 예행연습 방송이 전파를 타면서 시민들이 중앙로를 중심으로 모여 들어 ‘투표도 없었는데 민정당 후보 당선이 웬 말이냐!’ 등의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항의 시위는 선거 당일인 26일에도 이어졌다. 오전 시위에 이어 오후 7시가 되자 제주시 지역 개표 장소인 시민회관으로 진출하게 된다.
당시 상황을 적나라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그날 오승국 시인이 그 시위 현장에 있었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서다. 그것도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으로, 올림픽 대표단의 기수처럼 태극기를 들고서 말이다. 『제주민주화운동사(제주민주화운동사편찬위원회 편. 선인. 2013) 』는 그날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날 시위 과정에서 경찰 형사기동대 봉고차량 1대와 KBS봉고차량 1대가 화염병 투척에 의해 전소되었으며, 동문·삼담파출소에도 화염병이 투척되어 경찰관 3명이 부상당했다. 또한 시위 도중 문00(제주대 회계학과 3학년) 등 3명이 최루탄을 맞고 부상당했다. 이날 시위 과정에서 많은 시민·학생이 경찰에 연행되었는데, 이들 중 송00(제주대 상업교육과 3학년)와 오승국(‘제문협’ 회원) 등 학생·시민 4명은 공공건조물 방화와 집시법, 국회의원선거법 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됐다.(『제주신문』1988년 4월 27일자 ;『제대신문』1988년 5월 2일자)
그가 연행되었을 당시, 제주경찰서에서 경찰들을 맞상대로 그와, 아들의 체포 소식에 태흥리에서 와랑와랑 올라온 그의 어머니가 남긴 모자지간의 용맹무쌍한 무용담은 그 시절을 함께 했던 많은 벗들에게 전설처럼 인구에 회자되고 있으니, 궁금한 독자가 있으면 그에게 직접 청해 듣기 바란다. 한 병 한 사라만 있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청년 오승국은 그의 젊음을 부끄러움 없이 보내고자 했다. 1991년 제주도 개발 반대를 외치면 산화한 故 양용찬 열사를 기리는 시를 통해 ‘죽어서 장두가 되는 / 서러운 시대의 싸움 앞에서/ 진실한 섬놈’으로 살아가고자 했고(「우리 시대의 장두」), 제주 역사의 굴곡진 구비마다 의연하게 일어섰던 강제검, 방성칠, 이재수 등 민란의 역사를 마치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전하는 시(「모슬포 이야기」)가 눈에 띄는가 하면, 1992년 민주 진영의 대선 참패를 딛고 다시 일어서려는 의지를 담고 있는 시(「알젠틴 소녀에게」)도 보인다. 그와 함께 같은 지역에서 같은 눈높이로 세상을 바라본 한 사람으로서 감회가 새롭다.
아무튼 열혈 청년으로서 그의 20세기 말은 온갖 불의와 맞서면서 노을 지듯 서서히 ‘아쉬운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길고 긴 반역의 세월 앞에
다시 새로운 햇살이
헤어진 뭇 영혼의 상처 위에
부서지고 있습니다
저 황량한 한라의 들판에서
새 생명을 꾸려가는 질경이꽃과
무리지어 피어나는 억새꽃들에게
패배의 쓸쓸함은 말하지 마십시오
화려한 꽃들은 지고 없으나
그 간절한 시대의 언저리에서
가슴과 가슴끼리 피어나던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짓밟힌 정의의 숨결이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오던, 아
그리운 벗들의 얼굴 위로
피투성이 팔십년대의 사랑이
용암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온전한 것 하나도 없는 깡마른 눈물땅에서
어머니의 노동이 물결치던
탑동점령지의 숨비소리는
까마득히 돌아오지 않고
가고 없는 세월과 사람들이
세기말 햇살에 빛나고 있습니다
-「세기말 기억」 전문
<제주청년문학회>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 한 가지만 덧붙이겠다.
1993년에 발간된 기관지 2집 『남도에 피는 꽃』에는 회원들의 작품 이외에 공동창작 작품이 3편 수록되어 있는데, 1990년 4월에 완성되어 제주대학교 교지 『한라산』에 수록된 「용강 마을, 그 피어린 세월」을 비롯하여,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건설 과정을 다룬 「우리들의 학교, 우리들의 교실」 그리고 금악리 한라레저골프장 건설 반대 투쟁을 형상화한 「내 땅 딛고 굳게 서서」 등이 있는데, 물론 개인적인 작품은 아니지만, 오승국 시인은 그때부터 문학 동지들과 함께하면서 제주섬의 역사와 현실에 깊이 천착하고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중에 오승국 시인이 공동창작의 한 구성원으로 참가하면서, 그의 앞날이 4·3항쟁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음을 암시하는 시, 「용강 마을, 그 피어린 세월」의 일부를 소개한다.
그대 아는가 / 무자년 그날 / 한라의 영봉에 봉화가 오르고 / 삼백 예순 봉우리로 번지던 / 4월의 희망을 / 자유와 굶주림으로 / 해방조국의 그날을 위해 / 불길이 가 닿는 곳마다 일어서던 / 순박한 섬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을 // 징병으로, 징용으로, 공출로 / 더는 빼앗길 그 무엇도 갖지 못한 사람들이 / 해방의 문턱에서 / 통일된 조국의 해방된 민족이고자 / 산으로 산으로 오르는 / 그날의 함성소리 / 숨가쁘게 옥죄어 오던 / 압제의 군화발 소리를 // 더러는 5만이라고도 하고 / 더러는 8만이라고도 하는 사람들이 / 섬그늘 돌아가며 지천으로 피고 지던 / 철쭉꽃 꽃무더기처럼 / 그리운 햇살 한 번 / 따사하게 받아 보지 못하고 / 제국의 사주를 받은 이들의 총칼 앞에 / 짓이겨져 죽어간 것을 / 그대 아는가 // 불길이 가 닿는 곳마다 / 일어서던 섬, 섬의 분노 / 통일조국의 그리운 그날을 위해 / 순결한 산의 품속에서 / 죽창을 깎아 들고 / 항쟁의 죽음으로 섬을 메우던 것을 / 그날 죽지 못한 자들이 / 미제의 군화발 소리 / 요란하게 들리는 식민의 땅에 / 마흔 세 해가 지난 오늘까지 / 상처투성이 몸으로 / 죽은 자들과 함께 있음을 / 그대 아는가 / 이 땅에 제국의 그림자 사라지는 날까지 / 죽은 자와 산 자가 / 한라 영봉에서 만나 / 제국의 심장을 향해 죽창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 그대 아는가 / 그대는 알고 있는가
3.
그 후 오승국 시인은 <제주문화운동협의회> 대표를 역임하고, <제주4·3연구소> 이사와 사무처장 직을 맡아 일하다가, 지금은 <제주4·3평화재단>과 <제주4·3트라우마센터>에서 정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다시 말해 그가 살아온 인생의 절반을 온전히 4·3과 함께 살아왔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그의 4·3 관련 활동 중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4·3항쟁 60주년을 1년 앞두고 한라일보에서 기획한 연재물이 있었는데, 2007년 4월 3일부터 시작된 <오승국의 4·3유적지를 찾아서>가 바로 그것이다. 이 연재물은 2008년 12월 30일, 69회를 끝으로 마무리가 되는데, 잃어버린 마을인 와산 종낭밭을 시작으로 제주의 4·3 유적의 많은 부분이 그의 손에 의해 알려지게 된다. 마지막 연재물은 <4·3유적지 취재의 여정을 마치며>라는 제목인데, 이 지면에 함께 실린 <편집자 주>를 여기 소개한다.
지난 2007년 4월, 4·3 59주년을 맞아 한라일보는 '오승국의 4·3유적지를 찾아서'를 연재하기 시작하여 오늘까지 근 2년간 69회를 연재하였습니다. 본 기획을 통하여 현대사의 아픈 역사인 제주4·3의 생생한 진실을 현장의 유적을 매개로 다시 한 번 확인함과 동시에 무관심 속에 버림받은 4·3유적지의 실태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4·3평화재단과 문화재 당국에서도 4·3의 진실을 증언할 현장의 유적지를 중요한 문화재로 지정하고 보호해야 할 시점임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본 연재는 4·3 이슈의 소강기에 진행되어 다시 한 번 역사의 진실과 그 기억을 유지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발품으로 제주 전역을 취재, 집필하여 주신 필자와 애정 어린 시선으로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다시 말해 그는 4·3을 시로 형상화하여 독자들에게 알려왔다기보다는, 비록 지면에서지만 ‘4·3유적지 해설사’가 되어 독자들을 인솔하고, 사람들이 잘 모르는 섬 구석구석 4·3의 상처가 남아 있는 곳을 찾아다니면서 현장을 확인하고 당대를 살아오신 어르신과 만나 체험담을 나누면서 열심히 발품을 팔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시집에 실린 그의 4·3시는 비록 과작이지만 그가 발품을 팔아 직접 증언을 듣고 형상화한 시편이기에 마치 증언자가 옆에서 독자들에게 직접 이야기를 전해주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감나무에 묶여 총살당한 할아버지를 잊지 않기 위해 감나무 곁에 집을 지어 평생을 사신 할머니 이야기(「감나무와 할머니」)가 그렇고, 잃어버린 영남 마을에 노란 산국을 키우며 홀로 40여 년을 살아오신 할아버지 이야기(「그 할아버지」)가 그렇고, 수용소에 끌려갔다가 전쟁통에 옥문이 열려 집에 왔는데 다음 날 다시 잡혀가 서귀포 앞바다에서 수장당한 의귀리 열여덟 청년의 이야기(「죽었다가 살았다가 또 죽었네」)가 또한 그렇다.
그의 시집 『아쉬운 기억』에 실려 있는 4·3 시편들을 읽다가 제목부터가 오금을 확 저리게 만드는 시를 발견했다.
청춘의 나이가 죄가 되어
한시 하루 죽음의 두려움에 떨었네
물찻말찻산란이오름 골짝 골짜기에
짐승처럼 숨어살다 봄햇살이 들 때쯤
하얀 천 깃발 들고 눈물로 하산했주
젊은 청년들 잡아들여 주정공장 가둬두고
별별 고생 다 시킨 후
열여덟 살 이상 한 줄로 집합시키난
영식이 삼촌은 그 나이가 되어도
키가 한 발밖에 안 되언
열일곱이엔 허연 살아났고
앞동네 춘식이 형은 열일곱이라도
훌쭉하게 커부난 폭도질했댄 허영
육지감옥소로 실러부렀주
-「키 커부난 죽언」전문
산란이오름에 숨어 지내다 백기를 들고 투항하고 주정공장에 수용되어 별의별 고생을 하던 어느 날, 열여덟 이상을 마당에 집합시켰는데 ‘영식이 삼촌’은 나이가 되어도 키가 작아 열일곱 살이라 속여 살아남았고, ‘앞 동네 춘식이 형’은 나이는 열일곱이었는데도 키가 ‘홀쭉하게 커부난’ 결국 육지 형무소로 끌려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나이에 비해 키가 큰 것도 죄가 되던 시절이었다. 이 시에는 그 당시 열여덟 살의 기준 키를 말하고 있진 않지만, 괜히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이다. 그 시절 내가 살아 주정공장 그 자리에 줄을 서고 있었다면 나는 어찌 되었을까를 생각하니, 오승국 시인은 한편으론 좋겠다는 생각에 앞서 육지형무소로 끌려가는 ‘홀쭉하게’ 키가 큰 아무개를 새삼 떠올리자니 왠지 억울하고 처량해지는 것이다.
4.
태흥리 앞바다. 물질하는 어머니와 해녀 삼촌 곁으로 수웨기가 나타나면 동네 형들과 나란히 서서 손나팔 만들어 “물 알로! 물 알로!” 큰 소리로 외치던 어린 오승국은 이미 중년을 넘어섰지만, 그가 변함없는 모습으로 우리들 곁에 있어준 게 새삼 고맙다. 40년 세월이 흐르다 보니 염색한 머리숱은 듬성해지고 삶의 연륜마냥 아랫배가 볼록하게 나온 게 변화라면 변화겠지만 그때처럼 지금도 만나면 알콩달콩 투닥투닥, 되는 얘기 안 되는 얘기 주고받다가 다음 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무런 흉허물 없이 세상 얘기를 나누는 그런 벗으로 함께 살아준 것이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니다.
이제 그는 정년을 앞두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그가 어떤 길을 선택하든 그의 길을 끝까지 지켜보면서 응원할 것이다. 그 또한 주변의 기대와 성원을 잘 알기에 결코 어긋남 없이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것임을 믿는다. 그의 무궁무진한 앞날에 건강과 건필을 기원하면서 첫 시집 출간을 맞아 진심으로 다시 한번 힘찬 박수를 보낸다.
오 시인의 문학과의 인연은 대학시절부터 시작된다. 제주대학 문학동아리 <신세대>에 가입하면서 그의 문청시대는 열렸다. 당시 신세대는 소위 진보적 문학동아리였다. 현재 제주에서 활동하는 역량 있는 시인 중 이 신세대 출신들이 많다. 김수열 시인은 발문에서 “문학동아리 <신세대>에 가입한다는 것은 이미 그가 문학에 뜻을 두었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 제가 발 딛고 선 제주를 자양분 삼아 민족과 민주와 민중을 담아내는 그런 문학으로 지향점을 삼았다는 것이다. 문학동아리 <신세대>는 제주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출중한 문청조직”이라고 했다. 어쨌든 그는 이들 신세대의 멤버들과 젊은 날의 우정과 객기, 진보적 낭만(?)을 찾으면서 시인이 되어 갔다.
대학 1년을 마치고 군대에 가게 되는데, 여기엔 일종의 전설이 있어 짧게 소개한다. 입대 날 논산훈련소에 늦게 도착해보니 영문이 잠기고 위병소에서는 집으로 돌아가서 다음번에 다시 오라고 하자 그 문을 잡고 돌아갈 수 없다고 지구전을 펼친 결과, 일반 훈련중대는 이미 인원 편제가 끝났던 터라 주로 헌병이나 특전사 카투사로 뽑혀 가는 훈련중대에 배치된 것이다. 이 훈련기간 벌어진 듣다 보면 배꼽을 잡게 되는 에피소드들이 꽤 있어 술자리 담화로 최고의 안줏감이었다. 사실 오 시인은 동 세대의 평균 키인 170cm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그런 그가 특전사나 헌병으로 뽑혀갈 훈련중대에서 훈련받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그렇게 지각한 탓에 카투사가 된 그는 동두천에서 근무하게 되는데, 이 기간에도 쉬지 않고 시를 썼던 모양인데 이 시집에도 실려있다. 동두천은 주한미군이 오래도록 주둔한 곳으로 소위 양공주, 양키, 양주 등이 떠오르는 곳이었기에 그는 말로만 듣던 소위 제국 아메리카 양키들의 만행과 동두천 주한미군 생태계를 들여 다 보았던 경험을 시로 남긴 것이다.
3년 군대생활을 마치고 제대한 그는 복학하여 신세대 활동을 지속하다 대학을 마친다. 졸업 후 <신세대> 선배들이 활동하던 문학동인 <풀잎소리>에 가입하여 시작 활동을 계속한다. 또한 제주에서는 87년 유월항쟁 이후 장르별 문화운동 그룹들이 이 시기에 속속 생겨나는데, 신세대 인맥이 주를 이루던 제주문화운동협의회 소속 <청년문학회>에 가입하여 진보적 문화운동에 가담하면서 지역문화운동가로서 성장해 나간다. 이 당시까지 오 시인은 늘 책 한 권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면서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문화운동판의 마당발이 되어있었다. 이 시기 그의 별칭이 ‘자칭타칭 민족시인’이었다.
개인적인 에피소드인데, 언젠가 제주의 민주화운동사를 다룬 사진집들을 보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 적이 있었는데, 제주지역 민주화운동의 현장에서 찍힌 사진들 중에 그가 끼지 않은 사진은 보기가 힘들 정도였는데, 우연인지 의도였는지, 현수막을 펼치면 늘 그가 어느 한쪽에서 잡고 있던 것이다. 혹시나 하여 다시 뒤적여도 마찬가지였다. 현수막을 들면 절대 트리밍 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
그 후 오 시인의 활동반경은 4·3으로 옮겨간다. <제주4·3연구소> 사무처장을 맡으면서 4·3 관련 활동을 열정적으로 이어나간다. 물론 4·3과의 인연은 이미 이전에 제주도의회 4·3특위에서 주도하여 처음으로 4·3피해신고조사가 시작될 때, 조사요원으로 2년여간 활동한 바 있다. 당시만 해도 4·3생존자들이 많이 살아 있을 때였고, 그들을 일일이 만나 신고서를 작성하면서 생존자 및 유족들의 개인사에 드리운 4·3으로 인한 상처와 회한을 육성으로 접하면서 4·3에 대한 그의 인식은 더욱 깊어졌을 것이다. 이 시집의 시편들 중 <죽었다가 살았다가 또 죽었네>, <키 커부난 죽언>, <진혼> 등이 그 육성을 시로 남긴 것들이다.
연구소의 4·3사무처장을 맡으면서 그는 이제 연구소의 아이콘이 되어 갔다. 4·3관련 각종 집회나 성명서 기자회견 때면 예외 없이 그가 나서서 마이크를 잡거나 원로들을 모시고 자리잡고 앉아 있는 모습이 카메라에 종종 포착된다. 특히 이 시기 그는 4·3유적지 해설가로 유명세를 누렸다. 이때 마침 소위 다‘크투어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4·3유적지 탐방을 찾아 제주에 온 단체나 그룹들은 우선 4·3연구소에 먼저 물어온다. “저 혹시 유적지 안내를 해주실 수 없을까요?” 하면 오 시인이 나설 수밖에 없었고, 그런 횟수가 하나둘 늘더니 어느 날 오 시인이 4·3유적지 해설사로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것이다. 물론 거의 봉사활동이나 다름없던 사무처장의 가난한 주머니를 나름 쏠쏠하게 채워주는 건 덤이었다.
그러던 중 정부의 4·3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고 4·3의 법적 제도적 해결이 시작될 즈음, 4·3평화공원이 조성되고 평화재단이 문을 연다. 이때 그는 4·3평화재단 직원으로, 소위 그동안의 활동을 인정 받아 경력직 직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때부터 이제 거리나 소위 문화판보다는 주로 평화재단이 벌이는 행사장에서 곧잘 그의 얼굴을 보게 된다. 오 시인이 시들에게 미안하게 된 시기는 바로 이 시기부터였다. 공기관의 실무직원으로 정부미를 먹게 되면서 게을러지기 시작했는지, 아니면 일에 치여 시 쓸 시간이 없어서였는지, 카투사일 때도 시를 썼던 시인 오승국이 시와 소원해진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몇 편의 작품들을 써냈는데, 다름 아닌 위령비에 새겨진 추도시들이 그것이다. 이 즈음에 도내 곳곳에 4·3위령비가 세워지기 시작했는데, 오 시인의 추도시들이 4·3위령비들에 꽤나 많이 새겨져 있다. 혹 그 위령비들을 보게 되면 그의 추도시들을 재미 삼아 한 번쯤 찾아보시길 권한다.
올해 환갑인 오 시인에게도 정년퇴임은 여지없이 찾아왔다. 재단 사업팀장을 거쳐 4·3평화재단 산하 4·3트라우마센터 부센터장으로 일하던 그도 예외 없이 정년의 끝에 다다른 것이다. 그런 와중에 오 시인이 회원으로 있는 <제주작가회의> 동료와 후배들이 발 벗고 나섰다. 그의 시집을 내자고 도원결의를 한 것이다. 안 그러면 그의 시집은 영원히 빛을 볼 날이 없을 거라고 선배 후배가 거들었다. 그렇게 몇 개월을 볶아댄 결과 이 시집이 세상에 나왔다.
정년퇴임을 하고 나면 아마도 이제 제주의 문화판 곳곳에서 그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된다. 늘 책 한 권 옆구리에 끼고, 다시 시인이 되어 문화판을 마당발로 쓸고 다닐 그가 눈에 선하다. 아마도 그의 두 번째 시집은 훨씬 가까운 시일 내에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그의 신작 시들을 만날 날을 고대한다.
오 시인의 첫 시집인 만큼 이 시집에는 그의 젊은 날의 시편들이 실려있다. 어쩌면 그에게는 추억의 시집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집의 제목도 ‘아쉬운 기억’이다. 새로운 시편들은 아니겠지만, 오히려 오 시인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시편들을 통해 우리가 살아낸 지난 40여 년간의 아쉬운 기억들을 다시 소환하거나 환기할 수 있다는 점, 그런 동시대적 공감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측면의 묘미가 있다. 오 시인을 알고 지낸 독자나 모르는 독자나 한 번쯤 ‘제주도 시인’ 오승국의 시집을 펼쳐보시길 권한다.
발 문
오래된 유예를 마치고 마침내 도착한
김수열(시인)
1.
오승국 시인의 첫 시집 『아쉬운 기억』의 원고를 받았다. 원래 일정보다 조금 뒤늦었지만, 무척이나 반가웠다. 아니 반가웠다기보다는 고마웠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것 같다.
올해로 그는 육십갑자를 한 순배 돌아 원래 있었던 자리로 돌아온, 환갑을 맞는 해이다. 그리고 정년이 되어 그가 다니던 제주4·3평화재단(그는 지금 제주4·3평화재단 산하 제주4·3트라우마센터 부센터장으로 근무하고 있다.)에서 자리를 훌훌 털고 책상을 정리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해이기도 하다.
그런 저간의 사정을 알고 있던, 적당히 죽이 맞는 몇몇과 우연히 함께 한 술자리에서(그 자리에는 당연히 오승국 시인도 있었다.) 어기차게 한 약속이 있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금년 퇴직 전에 첫 시집을 세상에 내놓자는 것이었고, 그가 시집을 내놓는 데 있어서 각자 역할을 나누었는데 내게 주어진 일거리가 다름 아닌 이 글을 쓰는 일이 되고 만 것이다.
물론 그 자리에는 그에 대한 면면을 더 지근한 거리에서 더 오랫동안 함께 한, 그를 꼭 닮은, 아주 오랜 벗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쓰게 된 건 - 지금 돌이켜보면 ‘느가 쓰는 게 맞다. 아니우다 성이 써 삽주.’ 하는 부질없는 밀당을 주고받기엔 술집의 코로나 영업 제한시간은 너무 급하게 다가왔고, 그렇다고 2차를 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더군다나 오늘은 이쯤에서 작파하고 다음에 다시 만나 논의하자고 하기엔 - 그의 시집 출간이 너무 간절하게 와 닿았던 사정이 있었다.
막상 원고를 받고 보니 오래전에 쓴 시편들을 붙잡고 무척이나 고민이 깊었을 거란 생각이 우선 들었다. 환갑을 관통하는 나이에 첫 시집을 내면서 그는 30여 년 훌쩍 바깥이던 문청 시절에 썼던, 이를테면 대학 시절의 시편들이나 군을 제대하고 발표한 군 관련 시편들을 보면서 참 많은 회한에 잠겼으리란 생각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때 발표한 것과는 결이 달라진 시편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그가 직접 얘기했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되다 보니 조악한 것들이 눈에 띄어서’ 뺄 건 빼고 덧붙일 건 덧붙이는 수고를 머리에 쥐가 나도록 했다는 얘기다.
헤아려보니 30편의 시와 1편의 산문이 들어있다. 통념으로 봤을 때 편수가 부실하다 할 수 있겠지만 시의 편수가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긴 소출이 그러할진대 달리 방법이 없지 않겠냐고 위안으로 삼아본다. 물론 시집을 내기로 약조하고 새롭게 쓴 시편들도 여기에 더러 포함되어 있다.
시를 써본 사람은 안다. 시가 무슨 자판기에서 커피 뽑듯 동전만 집어놓으면 자동으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장마철 가난한 집에 빗물 새듯 천장에서 줄줄 떨어지는 것도 아니란 것을 말이다. 이를 계기로, 한 바퀴 갑자를 돌아 새롭게 출발 지점에 선 그에게 시의 신께서 강림하시어 문운이 창창하기를 절절히 빌어 마지 않는다.
어림잡아 헤아려보니 그와 함께한 세월이 그럭저럭 40년이 되어 간다. 그와 함께 나눈 말을 풍선에 담아 떠올리면 아마도 그가 나고 자란 남원 태흥리 앞바다에 있는 지귀섬 정도는 거뜬히 들어 올릴 무게일 것이고, 둘이서 함께 쓰러뜨린 술병을 일렬로 이어보면 그가 나고 자란 산남과 내가 자란 산북을 족히 왕래할 만한 분량의 시간을 함께 지내온 듯하다.
연례행사로 이미 자리 잡았는데, 올여름 그와 함께 남원읍 속령이골에 있는 무장대 무덤 벌초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의 고향 태흥리에 잠깐 들렀다. 유년 시절 그가 놀았던 포구와 지금은 흔적조차 사라져버린 소금밭 ‘펄개’ 풍경 앞에 잠시 말없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리고 해안도로로 차를 몰고 나오는데 그가 한 마디 툭 던진다.
“이 해안길이 나, 어릴 때 학교 다니는 길이라 났수다. 벗들은 다들 지름길로 가는데 난 참 이 길이 좋읍디다.”
해녀를 어머니로 둔 오승국 시인의 유년은 당연히 바닷가에서 하루가 열렸을 것이고 바닷가에서 하루를 갈무리했을 것이다. 바닷가에서 유년을 보낸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등하굣길을 혼자서 바닷길로 다녔다면 이건 좀 다른 문제가 된다. 놀이의 공간으로서의 바다가 아니라 오승국 시인에게 태흥리 바다는 그것과는 결이 다른 그 무엇을 덤으로 안겨준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자,
“벗도 어시 혼자 바당길을 왔다갔다 허멍, 뭐했나?” 하는 물음에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혼자 헐 게 뭐 있수과? 모르쿠다. 그냥 좋읍디다.”
모르긴 뭘 모르겠다는 건가. 소싯적 그의 문학적 감성을 일깨워준 게 있다면 나는 단언한다. 그의 고향 바다가 그를 깨우쳤으리라고. 지금은 고향을 등지고 거처를 옮겼지만 저물어 귀소하는 새처럼 조만간 고향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고, 지금 몸은 여기 있어도 그는 늘 태흥리를 말하고 태흥리와 함께 산다.
2.
그에게 문학과의 본격적인 인연은 대학에서부터 시작이 된다. 대학 문학동아리<신세대>에 가입하면서 그의 문청 시대가 열린 것이다. 문학동아리<신세대>에 가입한다는 것은 이미 그가 문학에 뜻을 두었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 제가 발 딛고 선 제주를 자양분 삼아 민족과 민주와 민중을 담아내는 그런 문학으로 지향점을 삼았다는 것이다. 문학동아리<신세대>는 제주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출중한 문청조직이고 그곳에서 배출된 문인들을 헤아리자면 열 손가락으론 부족할 정도다. 그와 가근한 시인들만 꼽자면, 지금도 호시탐탐 보성시장 현경식당에서 순대와 머릿고기를 가운데 두고 ‘콩이여 팥이여’ 술잔 기울이는, 그의 동기인 강덕환 시인이 있고 1년 후배인 김경훈 시인이 있다. 그네들끼리 만날 때마다 <신세대> 출신이 아니라는 것이 나는 약간 약이 오른다.
그는 대학 1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하게 되는데, 동두천에 위치한 미군부대의 카투사로 복무한다. 관념적으로 머리에 맴돌던 아메리카의 실상을 그는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들의 행태를 통해 여실하게 깨닫게 된다. 이번 시집에 실려 있는 「동두천 하늘 아래」 연작은 그 무렵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인데 지금 읽어봐도 오목가슴이 절여 오는 짠한 수작들이다. 한국의 양공주가 웃음시중 술시중을 드는 미군 전용 업소(그의 말에 따르면 미군을 동반하면 카투사도 출입이 가능했다 한다)에서 만난 ‘조선 민들레’들에게 그가 어떤 연민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을 상대하는 양키들의 추행에 어떤 분노를 느끼고 있었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한국인 출입금지 / 보산동 미군거리 // 내 땅에서 추방당한 / 황당한 기분으로 / 냉랭한 가슴속을 / 더욱 움츠리게 했던’ 낯선 곳에서 그는 말할 수 없는 아픔을 느껴야 했고, 호흡이 정지된 상태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기막힌 계약 불평등 언약으로 / 한 마디 저항도 못 했고 / 미군 병사는 소리 없이 떠난’ 빈자리를 바라보면서 그는, 제대하면 미국으로 데려가겠다는, 가서 결혼하겠다는 미군의 달콤한 사탕발림만 믿고 어떤 폭력에도 한 마디 저항도 하지 않고, 가난한 고향이 싫어 가난이 대물림되는 이 조국이 싫어, 지금은 얻어터지더라도 조금만 참고 견디다가, 마침내 아메리카에만 가면, 가서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만 되면, 하고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조선 민들레’는 결국 말 한마디 없이 도망치듯 고국으로 떠나버린 미군의 농간에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진 채 초점 잃은 눈으로 그쪽 하늘만 우두망찰 바라보는 그런 민들레들을 수도 없이 보아야 했다.
더욱 안타까운 건 그런 ‘조선 민들레’들이지만 다시 밤이 찾아오면 어쩔 수 없이 온몸에 어둠을 바르고 먹고살기 위해 빈약한 얼굴에 다시 미제 향수를 뿌리고 꽉 끼인 코트를 입고 야윈 허리를 개망초처럼 꺾여야 했다. 희고 검은 미군 병사들이 ㅤㅆㅘㄹ라ㅤㅆㅘㄹ라 외자기는 코 큰 말들이 산탄총처럼 텅 빈 몸에 피멍으로 꽂혀도 그 통점과 통증마저 감추고 눅이면서 위대한 달러 앞에 무릎 꿇고 어제처럼 오늘도 까라면 까야만 했다. 결국 동두천에서의 ‘한국적인 소리는 늘 (미군) 헬리콥터에 묻혀’ 사라져가고 만다는 사실을 여실하게 깨닫고 그는 3년간의 복무를 마치고 제주로 돌아온다.
이러구러 대학을 졸업하고 <신세대> 선배들이 주로 활동하고 있는 문학동인 <풀잎소리>에서 그는 문학의 꿈을 이어간다. 어느 날 한 선배가 시 두 편 가지고 동인에 들어오라 했다 한다. 그 무렵 <풀잎소리> 동인에 입회용으로 제출한 시 중의 한 편이 「억새별곡」이다. 그에게 동인 가입을 권한 그 선배는 안타깝게도 지금 이승에 없다.
1987년 유월항쟁 이후 봇물처럼 터져 나온 민주화의 열기에 힘입어 제주에서도 부문별 운동체가 결성이 되는데 문화예술부문의 조직체로서 <제주문화운동협의회>가 그해 8월에 결성이 된다. 놀이패<한라산>, 노래패<우리노래연구회>, 문학패<제주청년문학회>가 그것인데 오승국 시인은 <제주청년문학회> 창립 멤버의 한 사람으로 합류하면서 그의 진보적인 문학 행보는 계속 이어지게 된다.
그해 겨울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직선제를 쟁취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죽 쒀서 개 준’ 꼴로 권력을 빼앗긴 민주진영은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다음 해에 있을 국회의원 총선만큼은 반드시 쟁취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충만하고 있었다.
그런데 제주에서 기막힌 일이 벌어지고 만다. 1988년 4월25일 총선 하루를 앞두고 오후 5시경 제주MBC의 개표상황 예행연습 방송이 전파를 타면서 시민들이 중앙로를 중심으로 모여 들어 ‘투표도 없었는데 민정당 후보 당선이 웬 말이냐!’ 등의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항의 시위는 선거 당일인 26일에도 이어졌다. 오전 시위에 이어 오후 7시가 되자 제주시 지역 개표 장소인 시민회관으로 진출하게 된다.
당시 상황을 적나라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그날 오승국 시인이 그 시위 현장에 있었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서다. 그것도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으로, 올림픽 대표단의 기수처럼 태극기를 들고서 말이다. 『제주민주화운동사(제주민주화운동사편찬위원회 편. 선인. 2013) 』는 그날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날 시위 과정에서 경찰 형사기동대 봉고차량 1대와 KBS봉고차량 1대가 화염병 투척에 의해 전소되었으며, 동문·삼담파출소에도 화염병이 투척되어 경찰관 3명이 부상당했다. 또한 시위 도중 문00(제주대 회계학과 3학년) 등 3명이 최루탄을 맞고 부상당했다. 이날 시위 과정에서 많은 시민·학생이 경찰에 연행되었는데, 이들 중 송00(제주대 상업교육과 3학년)와 오승국(‘제문협’ 회원) 등 학생·시민 4명은 공공건조물 방화와 집시법, 국회의원선거법 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됐다.(『제주신문』1988년 4월 27일자 ;『제대신문』1988년 5월 2일자)
그가 연행되었을 당시, 제주경찰서에서 경찰들을 맞상대로 그와, 아들의 체포 소식에 태흥리에서 와랑와랑 올라온 그의 어머니가 남긴 모자지간의 용맹무쌍한 무용담은 그 시절을 함께 했던 많은 벗들에게 전설처럼 인구에 회자되고 있으니, 궁금한 독자가 있으면 그에게 직접 청해 듣기 바란다. 한 병 한 사라만 있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청년 오승국은 그의 젊음을 부끄러움 없이 보내고자 했다. 1991년 제주도 개발 반대를 외치면 산화한 故 양용찬 열사를 기리는 시를 통해 ‘죽어서 장두가 되는 / 서러운 시대의 싸움 앞에서/ 진실한 섬놈’으로 살아가고자 했고(「우리 시대의 장두」), 제주 역사의 굴곡진 구비마다 의연하게 일어섰던 강제검, 방성칠, 이재수 등 민란의 역사를 마치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전하는 시(「모슬포 이야기」)가 눈에 띄는가 하면, 1992년 민주 진영의 대선 참패를 딛고 다시 일어서려는 의지를 담고 있는 시(「알젠틴 소녀에게」)도 보인다. 그와 함께 같은 지역에서 같은 눈높이로 세상을 바라본 한 사람으로서 감회가 새롭다.
아무튼 열혈 청년으로서 그의 20세기 말은 온갖 불의와 맞서면서 노을 지듯 서서히 ‘아쉬운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길고 긴 반역의 세월 앞에
다시 새로운 햇살이
헤어진 뭇 영혼의 상처 위에
부서지고 있습니다
저 황량한 한라의 들판에서
새 생명을 꾸려가는 질경이꽃과
무리지어 피어나는 억새꽃들에게
패배의 쓸쓸함은 말하지 마십시오
화려한 꽃들은 지고 없으나
그 간절한 시대의 언저리에서
가슴과 가슴끼리 피어나던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짓밟힌 정의의 숨결이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오던, 아
그리운 벗들의 얼굴 위로
피투성이 팔십년대의 사랑이
용암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온전한 것 하나도 없는 깡마른 눈물땅에서
어머니의 노동이 물결치던
탑동점령지의 숨비소리는
까마득히 돌아오지 않고
가고 없는 세월과 사람들이
세기말 햇살에 빛나고 있습니다
-「세기말 기억」 전문
<제주청년문학회>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 한 가지만 덧붙이겠다.
1993년에 발간된 기관지 2집 『남도에 피는 꽃』에는 회원들의 작품 이외에 공동창작 작품이 3편 수록되어 있는데, 1990년 4월에 완성되어 제주대학교 교지 『한라산』에 수록된 「용강 마을, 그 피어린 세월」을 비롯하여,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건설 과정을 다룬 「우리들의 학교, 우리들의 교실」 그리고 금악리 한라레저골프장 건설 반대 투쟁을 형상화한 「내 땅 딛고 굳게 서서」 등이 있는데, 물론 개인적인 작품은 아니지만, 오승국 시인은 그때부터 문학 동지들과 함께하면서 제주섬의 역사와 현실에 깊이 천착하고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중에 오승국 시인이 공동창작의 한 구성원으로 참가하면서, 그의 앞날이 4·3항쟁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음을 암시하는 시, 「용강 마을, 그 피어린 세월」의 일부를 소개한다.
그대 아는가 / 무자년 그날 / 한라의 영봉에 봉화가 오르고 / 삼백 예순 봉우리로 번지던 / 4월의 희망을 / 자유와 굶주림으로 / 해방조국의 그날을 위해 / 불길이 가 닿는 곳마다 일어서던 / 순박한 섬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을 // 징병으로, 징용으로, 공출로 / 더는 빼앗길 그 무엇도 갖지 못한 사람들이 / 해방의 문턱에서 / 통일된 조국의 해방된 민족이고자 / 산으로 산으로 오르는 / 그날의 함성소리 / 숨가쁘게 옥죄어 오던 / 압제의 군화발 소리를 // 더러는 5만이라고도 하고 / 더러는 8만이라고도 하는 사람들이 / 섬그늘 돌아가며 지천으로 피고 지던 / 철쭉꽃 꽃무더기처럼 / 그리운 햇살 한 번 / 따사하게 받아 보지 못하고 / 제국의 사주를 받은 이들의 총칼 앞에 / 짓이겨져 죽어간 것을 / 그대 아는가 // 불길이 가 닿는 곳마다 / 일어서던 섬, 섬의 분노 / 통일조국의 그리운 그날을 위해 / 순결한 산의 품속에서 / 죽창을 깎아 들고 / 항쟁의 죽음으로 섬을 메우던 것을 / 그날 죽지 못한 자들이 / 미제의 군화발 소리 / 요란하게 들리는 식민의 땅에 / 마흔 세 해가 지난 오늘까지 / 상처투성이 몸으로 / 죽은 자들과 함께 있음을 / 그대 아는가 / 이 땅에 제국의 그림자 사라지는 날까지 / 죽은 자와 산 자가 / 한라 영봉에서 만나 / 제국의 심장을 향해 죽창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 그대 아는가 / 그대는 알고 있는가
3.
그 후 오승국 시인은 <제주문화운동협의회> 대표를 역임하고, <제주4·3연구소> 이사와 사무처장 직을 맡아 일하다가, 지금은 <제주4·3평화재단>과 <제주4·3트라우마센터>에서 정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다시 말해 그가 살아온 인생의 절반을 온전히 4·3과 함께 살아왔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그의 4·3 관련 활동 중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4·3항쟁 60주년을 1년 앞두고 한라일보에서 기획한 연재물이 있었는데, 2007년 4월 3일부터 시작된 <오승국의 4·3유적지를 찾아서>가 바로 그것이다. 이 연재물은 2008년 12월 30일, 69회를 끝으로 마무리가 되는데, 잃어버린 마을인 와산 종낭밭을 시작으로 제주의 4·3 유적의 많은 부분이 그의 손에 의해 알려지게 된다. 마지막 연재물은 <4·3유적지 취재의 여정을 마치며>라는 제목인데, 이 지면에 함께 실린 <편집자 주>를 여기 소개한다.
지난 2007년 4월, 4·3 59주년을 맞아 한라일보는 '오승국의 4·3유적지를 찾아서'를 연재하기 시작하여 오늘까지 근 2년간 69회를 연재하였습니다. 본 기획을 통하여 현대사의 아픈 역사인 제주4·3의 생생한 진실을 현장의 유적을 매개로 다시 한 번 확인함과 동시에 무관심 속에 버림받은 4·3유적지의 실태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4·3평화재단과 문화재 당국에서도 4·3의 진실을 증언할 현장의 유적지를 중요한 문화재로 지정하고 보호해야 할 시점임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본 연재는 4·3 이슈의 소강기에 진행되어 다시 한 번 역사의 진실과 그 기억을 유지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발품으로 제주 전역을 취재, 집필하여 주신 필자와 애정 어린 시선으로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다시 말해 그는 4·3을 시로 형상화하여 독자들에게 알려왔다기보다는, 비록 지면에서지만 ‘4·3유적지 해설사’가 되어 독자들을 인솔하고, 사람들이 잘 모르는 섬 구석구석 4·3의 상처가 남아 있는 곳을 찾아다니면서 현장을 확인하고 당대를 살아오신 어르신과 만나 체험담을 나누면서 열심히 발품을 팔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시집에 실린 그의 4·3시는 비록 과작이지만 그가 발품을 팔아 직접 증언을 듣고 형상화한 시편이기에 마치 증언자가 옆에서 독자들에게 직접 이야기를 전해주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감나무에 묶여 총살당한 할아버지를 잊지 않기 위해 감나무 곁에 집을 지어 평생을 사신 할머니 이야기(「감나무와 할머니」)가 그렇고, 잃어버린 영남 마을에 노란 산국을 키우며 홀로 40여 년을 살아오신 할아버지 이야기(「그 할아버지」)가 그렇고, 수용소에 끌려갔다가 전쟁통에 옥문이 열려 집에 왔는데 다음 날 다시 잡혀가 서귀포 앞바다에서 수장당한 의귀리 열여덟 청년의 이야기(「죽었다가 살았다가 또 죽었네」)가 또한 그렇다.
그의 시집 『아쉬운 기억』에 실려 있는 4·3 시편들을 읽다가 제목부터가 오금을 확 저리게 만드는 시를 발견했다.
청춘의 나이가 죄가 되어
한시 하루 죽음의 두려움에 떨었네
물찻말찻산란이오름 골짝 골짜기에
짐승처럼 숨어살다 봄햇살이 들 때쯤
하얀 천 깃발 들고 눈물로 하산했주
젊은 청년들 잡아들여 주정공장 가둬두고
별별 고생 다 시킨 후
열여덟 살 이상 한 줄로 집합시키난
영식이 삼촌은 그 나이가 되어도
키가 한 발밖에 안 되언
열일곱이엔 허연 살아났고
앞동네 춘식이 형은 열일곱이라도
훌쭉하게 커부난 폭도질했댄 허영
육지감옥소로 실러부렀주
-「키 커부난 죽언」전문
산란이오름에 숨어 지내다 백기를 들고 투항하고 주정공장에 수용되어 별의별 고생을 하던 어느 날, 열여덟 이상을 마당에 집합시켰는데 ‘영식이 삼촌’은 나이가 되어도 키가 작아 열일곱 살이라 속여 살아남았고, ‘앞 동네 춘식이 형’은 나이는 열일곱이었는데도 키가 ‘홀쭉하게 커부난’ 결국 육지 형무소로 끌려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나이에 비해 키가 큰 것도 죄가 되던 시절이었다. 이 시에는 그 당시 열여덟 살의 기준 키를 말하고 있진 않지만, 괜히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이다. 그 시절 내가 살아 주정공장 그 자리에 줄을 서고 있었다면 나는 어찌 되었을까를 생각하니, 오승국 시인은 한편으론 좋겠다는 생각에 앞서 육지형무소로 끌려가는 ‘홀쭉하게’ 키가 큰 아무개를 새삼 떠올리자니 왠지 억울하고 처량해지는 것이다.
4.
태흥리 앞바다. 물질하는 어머니와 해녀 삼촌 곁으로 수웨기가 나타나면 동네 형들과 나란히 서서 손나팔 만들어 “물 알로! 물 알로!” 큰 소리로 외치던 어린 오승국은 이미 중년을 넘어섰지만, 그가 변함없는 모습으로 우리들 곁에 있어준 게 새삼 고맙다. 40년 세월이 흐르다 보니 염색한 머리숱은 듬성해지고 삶의 연륜마냥 아랫배가 볼록하게 나온 게 변화라면 변화겠지만 그때처럼 지금도 만나면 알콩달콩 투닥투닥, 되는 얘기 안 되는 얘기 주고받다가 다음 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무런 흉허물 없이 세상 얘기를 나누는 그런 벗으로 함께 살아준 것이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니다.
이제 그는 정년을 앞두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그가 어떤 길을 선택하든 그의 길을 끝까지 지켜보면서 응원할 것이다. 그 또한 주변의 기대와 성원을 잘 알기에 결코 어긋남 없이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것임을 믿는다. 그의 무궁무진한 앞날에 건강과 건필을 기원하면서 첫 시집 출간을 맞아 진심으로 다시 한번 힘찬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