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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촌유래

오라동은 시가지 중심 남쪽의 중산간지대에 산재한 마을로 오라1·2·3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라1동은 속칭 '모로냇가름'이라고 하며 한내를 끼고 있다. 마을 남쪽에 '내머리왓'이 있고, 오라2동은 '사평리(沙坪里)', '연미(淵味)', '동도노미(정실, 井實)' 등의 자연취락을 포함하고 있다.

오라3동은 속칭 '중댕이굴'이라고 하며 북쪽 우회도로 가에는 1979년 7월 1일 문을 연 시외버스 터미널과 1970년 5월 29일 개장한 종합경기장 등이 자리잡고 있어 발전하고 있다. 이 마을은 월라(月羅)라 기록하기도 하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오라리라 해서 제주면(濟州面)에 편입되었다가 1955년 제주시(濟州市)에 편입되는 동시에 오라1·2·3동으로 분할됐다.

1962년 동제(洞制) 실시에 따라 연동(蓮洞)을 합하여 오라동회가 되었다가 1979년 연동이 분할, 독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오라동의 한 자연취락인 연미마을은 지금으로부터 300여년 전 문(文)씨에 의해 설촌되어 호수 103여 호의 마을이었으나 빈번히 화재가 발생하므로 당시 풍수지리설에 따라 동네에 큰 연못을 팠다. 연미라는 마을 이름은 이 연못에서 연유한 것으로 물이 생수같이 깨끗하고 물맛이 좋았다고 한다. 그 후 이 연못은 매립되고, 1948년 4·3사건으로 인하여 마을은 완전 소실되었었다. 피난갔던 사람들은 사건이 끝난 후 100여호 만이 돌아왔으나, 1973년 3월 5일 건설부고시 제88호로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인구의 증가도 둔화되고 발전의 템포도 빠르지 못했으나 행정·의회·시민이 하나로 힘을 모아 끈질긴 해제노력을 쏟은 결과 1999년 7월 22일 전면해제 되었다. 이 마을의 유적으로는 조설대(朝雪臺)와 문연사(文淵社)가 있는데 한말인 1905년(광무 光武 9) 이 마을에 살던 이응호(李膺鎬)가 중심이 되어 선비들의 모임인 '집의계(集義契)'를 결성하고 구국을 도모하던 장소이다.

한편, 정실마을은 조선조 선조(宣祖) 때에 김해(金海) 김(金)씨가 여기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당시에는 이 마을의 지형 때문에 '도래뫼'라고 불리웠다. 또한 1910년께는 오늘의 제주시 오등동과 죽성 등 마을들을 한데 묶어 한북리(漢北里)라고 부른 적도 있었으나 한천(漢川)을 중심으로 동서 간의 분쟁이 생겨 한천 서쪽 동네가 오늘의 정실 쪽으로 옮겨 왔다는 설도 있다.

한편, 연미마을의 고씨들에 따르면 지금도 정실에 '고씨터'라고 불리우는 지명이 있으며 연미마을에 사는 고씨의 13대조가 여기 살았었다는 주장을 미뤄 이 마을의 설촌이 400여 년 전에 이뤄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를 증거하듯 이 마을에는 수령 400여 년으로 보이는 고목 팽나무들도 있다.

이 마을 역시 4·3사건의 피해로 폐동되었다가 1960년대 초 12세대가 돌아와 재건하기 시작하여 차츰 25세대로 불어났으며 1973년 3월에는 전기도 가설되었다. 1978년에는 제주시 중산간마을로서는 처음으로 취락구조 개선사업을 실시하여 지금과 같은 문화복지 농촌을 만들었다. 오라골프장의 시설로 관광지로서도 한 몫을 하고 있다.

※ 제주도지(濟州道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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